'
싹 트는 남자 ................................ ...................... '음악에 취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내 영혼은 고양된다. 아니, 물리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육신이 해체되고 영혼만 부유하는 것 같은 오롯한 실존. 나는 지금 이 귀에서 저 귀까지, 양쪽 관자놀이 사이를 수평으로 이어놓은 두개골의 윗부분만, 반구형의 울림통 형태로 떠 있는 것 같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눈높이쯤에서 허공을 유영하는 느낌이라 할까.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이 천상의 눈물처럼 가슴으로 흘러든다. 허스키하면서도 애상적인 이 남자의 목소리는 슬픔조차도 감미롭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슬픔을 치유하고 위무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고 슬픔이라는, 삶의 아이러니에 나는 안도한다. 기쁨은 표피에서 증발하지만 슬픔은 보다 깊숙이, 진피나 피하조직 어디쯤에서 천천히, 아주 조금씩 분해되고 배출된다. 슬픔에 관한 한 시간만한 명약이 없긴 하지만 유장하고 서러운 노랫가락이나 최루성 영화같은 응어리에 침착시켜 무더기로 방출해보는 것도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이따금은 유효하다. ................. .............................. .......... -최민자 님의 <손바닥 수필> 중에서-
학생들 문제지를 사러 서점에 들렀다가 순전히 '책머리' 작가의 말에 꽂혀 샀다. '문학의 사회적 사명 같은 것을 따로 염두에 두지 않는,
세상을 돌아보는 일보다 나를 버팅기는 일이 절실했다.
내게 있어 글쓰기란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호시탐탐 가격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허무에 대한 전면전 같은 것이다.
글도 삶도 손바닥 크기를 넘지 못했다. 쓸쓸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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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 안의 나를 뒤집어 햇살 아래 펼쳐 놓는다.
안이 바깥을 낳는 기묘한 분만, 글도 삶도 그것 아닌가.
숨기와 찾기, 감춤과 드러남이 결국 하나다.'
'숨기와 찾기, 감춤과 드러남이 결국 하나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그 찌릿찌릿함이란.
문자 메시지도, 카톡 울림도 방해가 되었다.
심장 두근두근, 자꾸만 마음에 스미어 밑줄을 긋게 했다.
힘듦, 좀체 위로 받지 못한 채 적잖이 버틴 것 같은데....
책을 읽다가 내가 나를 으서지게 안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주 특별한 경험을 삼켰다.
'운문이 아닌 산문도 형상화가 꽃피는 구나'
'시가 아닌 수필에서도 운율이 파도를 타는구나'
목차의 제목들을 진주알 꿰듯 읽으니 한 편의 詩가 된다.
쌀 씻는 마음으로 정결히 언어를 씻어 지은 걸까.
질지도 되지도 않은, 윤기 흐르는 쌀밥같은 문장.
요즘 중, 고등학생들의 치명적 약점이 약한 어휘력이다.
이 책은 사유 깊은 수필로 교훈과 감동을 안겨 주면서
어휘력 키우는데 훌륭한 교과서다.
깊은 통찰과 번득이는 예지, 섬세하면서도 정갈한 말맛으로 한국 산문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최민자의 신작 수필집이 나왔다. 『손바닥 수필』. 범상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범상치 않은 쉼표들, 서성이는 시간의 포스트 잇 같은 짧은 글들을 주로 엮었다.
2007년 타계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최민자의 수필을 일컬어 “최민자의 글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들어 있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예지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남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생,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은 정적이면서도 또한 지적입니다. 반짝이는 예지, 조금만 드러낼 줄 아는 자제력, 정제된 언어 그런 것들로 해서 그의 글은 아름답습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라면 나는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추천의 글을 쓴 바 있다.
저자 최민자
저자 : 최민자
저자 최민자는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가정대학을 졸업하였다. 1998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하였고, 수필집으로 『흰 꽃 향기』, 『꼬리를 꿈꾸다』 등이 있다. 2002년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자연과 인간의 바탕과 모서리를 오밀조밀하게,
살아온 생애의 숨과 결을 삼투시키면서 엮어낸 수필집
삶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와 불가해한 은유들을 정관(靜觀)의 여유 속에서 풀어내고 싶어 수필을 쓴다는 그는 글을 쓰는 이유를 “무엇이 되고자 해서, 허명이라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추는 시간의 춤이어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여서다.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허투루 쓰지 않은 글이 독자를 얼마나 황홀하게 하는가. 일단 이 책을 잡으면 글 이랑 사이를 그윽하게 서성이며 페이지를 넘기고 밑줄을 긋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그래, 봄이야, 봄. 봄(見, seeing)이라고! 봄에는 그저 ‘봄’만 할 일이야. 나무처럼 안으로 나이를 감추고 봄 햇살 속으로 ‘봄’ 하러 가야겠어. 느껴야 할 때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 때 느끼는 얼간이 맹추 노릇 집어치우고 말이야. 생명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때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봐 주어야 해. 그것이 생명의, 생명에 대한 예우야. 보고 또 보고 더 이상 볼 게 없다 싶어지면 감추어 둔 뿔 꺼내 얹고 세상을 멋지게 들이받아 볼 거야. 제 심장을 꼬챙이에 꿰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저 새처럼 말이야. -43쪽
술은 차게 마시고 차는 뜨겁게 마신다. 찬 술은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뜨거운 차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술은 기분을 끌어올리고 차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집 나간 마음을 불러들여 마주 앉고 싶을 때엔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헤쳐 숨통을 틔우고 싶을 때는 여럿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다. 술과 차는 따르는 법도 다르다. 천차만주淺茶滿酒, 술잔은 그득히 채워야 하고 찻잔은 얕게 따라야 한다. -44쪽
배꼽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절,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내부에 온전히 의존적으로 착생하여 존립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일무이한 증표다.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도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한 줄의 끈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명쾌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신은 가시면서 배꼽 위에 어머니를 조금 남겨두고 가시었으니’라는 김승희 시인의 시구대로, 배꼽은 우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목숨이거나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줄줄이 생산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스럽게 각인시킨다. 내 배꼽에서 어머니의 배꼽으로, 어머니의 배꼽에서 할머니의 배꼽으로……. 홀 맺힌 끄트머리를 조심조심 풀어 인연의 탯줄을 거슬러 오르면 생명의 원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저 하늘 너머 우주의 배꼽까지 당도할 수 있을까. 최초의 어머니 이브에게도 배꼽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배꼽은 어쩌면 생명 탄생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까지를 함구하고 있는 비밀스런 입술일지도 모른다. -56쪽
배롱나무의 벗은 몸은 매혹적이다. 누구는 상서로운 서기瑞氣를 발산하는 풍만한 꽃 잉걸을 찬탄하지만 나는 그의 벗은 몸에 반한다. 꽃으로 치장하고 잎으로 가리고 열매를 매달아 아름다운 나무 중에 나신까지 귀골貴骨인 나무는 드물다. 몽환적인 산수유도, 낭창대는 실버들도, 황금빛 스팽글의 은행나무도 벗겨놓으면 천격인 데 반해 자작나무나 배롱나무는 벗어도 귀티가 난다. 자작나무가 세상물정 모르는 늘씬한 서양 귀부인이라면 배롱나무는 면벽 수련 틈틈이 권법을 익힌, 내공 깊고 다부진 동양의 선사다. 건포마찰로 단련시킨 남자의 살갗처럼 기름기 없이 빛나는 피부, ‘앙’ 하고 깨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단단해 보이는 팔뚝, 쇠심줄처럼 구불거리며 허공을 껴안는 손가락들. 꽝꽝한 겨울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정물처럼 서 있는 한겨울 배롱나무가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처럼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
배롱나무는 운치를 아는 나무다. 드넓은 허공이라고 함부로 가지를 뻗지 않고 공간을 미학적으로 세분할 줄을 안다. 연과 행을 정확히 계산하여 말을 앉히는 시인처럼 가지와 가지 사이의 여백을 회화적으로 분할한다. 꽃이 흐드러진 여름에도 질펀하다거나 농염한 느낌보다는 화려하면서 단아한 느낌이 강하다.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애써 수형을 잡아가는 가지의 역동적인 조형성에서, 돋쳐 오르는 대지의 기운을 다스려내는 나무의 웅숭깊은 풍격을 읽는다. 나무는 진즉 알고 있는 것일까. 절제된 관능만이 대상을 더 깊숙이 끌어당기는 이치를. -70쪽
사람의 내면에 슬픔의 안개가 가득하면 눈빛으로 온 몸으로 슬픔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슬픔에도 반감기가 있어 봄 햇살에 천천히 바래지거나, 가을 빗소리에 녹아나오거나, 깊은 밤 뒤척이는 베갯머리에 어둠침침한 꿈으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끝끝내 증발하지 못한 슬픔의 흰 뼈들은 육신과 함께 순장되어 흙속에 파묻힌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흙, 세상에 흙처럼 무정한 것은 없다. 흙에 덮이면 모든 것이 무효다. 순간의 기억도, 투쟁의 역사도 속절없이 무화되어 버린다. -74쪽
높은 자리에 앉으면 심판의 권위가 절로 생겨나는가. 마당가를 오갈 때나 쪼그려 앉았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의자에 앉아 굽어보면 불필요한 것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 보인다. 곁가지가 보기 싫게 자란 산국이며 더위에 늘어진 맥문동 이파리며, 게릴라처럼 낮게 포복하며 옆으로 기어가는 씀바귀 줄기까지 고스란히 눈에 띈다. 화초나 잡초나 한 끗 차이련만 웃자란 쇠비름이 채송화 줄기 위로 붉은 장딴지를 슬며시 뻗는 것도 내 눈에는 썩 고와 보이지 않는다. 높이가 주는 시각 차, 기껏 한 뼘쯤 높이 앉았을 뿐인데 만족스런 것보다 못마땅한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것, 이상한 일이다. -83쪽
썩는다는 것은 형과 색과 살 속에 스민 생명의 기미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물질적 몸의 세상을 버리고 우주적 무의 권역에 복귀한다는 뜻이다. 덧없이 스러지고 소멸되는 게 허망해서 되지 않은 글줄이나마 끼적거려보는 것도 썩어지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모른다. 이대로 그냥 묻힐 수는 없다고, 서둘러 몸 밖으로 빼내주지 않으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소멸되어 버릴 것 같다고, 필사必死의 육신 안에 갇혀 사는 어리보기 정령 하나가 절박하게 SOS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나에게 방부제 치듯 시시때때 키보드를 두드려대는지 모른다. -87쪽
갈모산방이란 전통한옥의 추녀에서부터 부챗살처럼 퍼지는 선자서까래 아래에 대는, 삼각형 모양의 부재를 일컫는다. 팔작지붕은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양 처마 끝이 휘어져 올라가 멋들어진 중지곡선을 형성하는데, 자연 상태에서 적당히 구부러진 재목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보니 처마도리 밑에서 인위적으로 서까래를 받쳐주는 받침재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갈모산방이다. 도리와 추녀사이에 끼어 있어 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갈모산방이 없으면 한옥지붕 고유의 날렵한 맛을 내기 어렵다. -110쪽
가만히 있다 해서 좋고 나쁨이 없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소리는 귀에 달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거슬린다. 단지 내색을 안 할 뿐이다. 눈과 입이 작당하여 아첨하거나 알랑거리는 것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는데 귀는 교언도 영색도 하지 않는다. 누굴 위해 아부하며 누굴 위해 눈웃음치랴. 흔들리는 눈빛, 변명하는 입술과 달리 부끄러운 일을 하면 저 혼자 발그레하게 물들어버릴 만큼 정직하고 우직한 것이 귀다. 경망스럽고 호들갑스러운 눈 코 입과는 애당초 거리를 두고 물러앉아 침묵하는 성 밖의 무언군자無言君子, 그게 귀란 말이다.
비례와 대칭을 미의 근간으로 삼는 조물주는 눈동자나 콧구멍처럼 귓바퀴도 대칭으로 앉혀 두셨다. 하지만 귀는 다른 것들처럼 가까이 붙어 있지 않고 최대한 멀리, 반대쪽으로 떨어져 있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입체적으로 감지하여 적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눈꺼풀과 입시울이 닫히고 심신이 다 잠든 뒤에도 귀는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끊어져도 최후까지 살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도 있다. 잠들어도 잠들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려 애쓰는 성실한 불침번이 귀인 것이다. -120쪽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길에서부터 곁가지를 치고 얼기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게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쪽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번 다녀간 골목을 섣불리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이 일쑤 낯가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싶은데 없고 저기다 싶은 데 아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시멘트벽의 완강함, 4차원의 입구처럼 사라져버린 미로를 몇 바퀴씩 서성거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발견할 때도 있다. 해진 속옷과 빛바랜 수건과 색색의 양말짝들이 담장 너머로 공중그네를 타고, 밤사이 새끼를 친 무수한 말들이 담벼락 사이로 수군수군 넘나드는, 응달진 사람들의 남루한 삶터가 부끄러워 골목은 자꾸만 꼬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150쪽
거실 가득 퍼즐 조각들을 늘어놓고 잠들어버리는 아이처럼, 감나무 그늘 아래 소꿉장난을 하다 저녁 먹으러 가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벌여 놓은 자리 치우지 못하고 황황히 떠나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아침에 떴다 저녁에 지는 해도 한동안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데 숨이 끊어지고 꺼풀이 닫혔다 해서 수십 년 온축된 생의 기억들이 설마하니 단숨에 사라져버릴까요. 빛과 소리의 속도가 다르듯 육신과 정신의 죽음도 제각각 다른 속도로 완성되어 적멸에 이르는 것 아닐까요. 육신의 빛이 사위고 난 다음에도 의식은 천천히 어두워질 거라는, 육신과 정신의 달리기 속도가 생각보다 크게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런데 좀 섬뜩하지 않나요? 이승과 저승 사이, 그 아찔한 크레바스가 눈꺼풀 바로 아래, 두 속눈썹 사이에 숨겨져 있다니요. -161쪽
정해진 간격을 거스르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두 섬도 아주 가끔은 수상쩍게 맞붙을 때가 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불온한 바람이 대기를 흔들면 섬과 섬 사이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수면이 일시 출렁거리고 숲들도 꿈틀, 잠을 깨고 일어선다. 샅바싸움보다 기 싸움이 먼저라고, 수크령처럼 털을 세운 섬들이 앞머리를 박을 듯 으르렁거리며 격돌한다. 아랫녘 호숫가에 번개가 치고, 남녘 어디에서 우레 소리와 따발총 소리가 뒤섞이기도 한다. 풍랑이 거세지고 해일이 일면 호수가 범람해 넘치기도 하지만, 섬들이 떠내려가거나 가라앉는 일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190쪽
사람의 얼굴에는 터진 구멍이 여럿 있지만 다른 것들이 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점잖고 수동적인 처소인 데 반해 입은 적극적 능동적인 편이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외에 표정과 목소리로 희로애락을 드러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내기도 하니까. 사랑이 눈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사랑도 실은 입술에서 시작돼. 마주쳐 스파크가 일어난다 해도 눈과 눈은 물리적으로 포개지지도, 화학적으로 스며들지도 못하잖아. 도발적인 평화와 평화로운 도발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인간의 입술, 그 입술이 눈이 점찍은 대상을 향해 부드럽게 이완되어 귓바퀴를 향해 들려 올라가고, 그렇게 자주 마주서면서 물길 불길을 이어붙이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서사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가 없어.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포옹해도 심장끼리는 절대로 포개지지 않는 법이어서 그렇게 서로 입술과 입술을 견주어 상대를 면밀히 재단해보려는 것 같아. 그 방법 밖에는 제 안에 유숙하는 영혼의 몸피를 가늠해볼 방책이 없을 테니까. -221쪽
눈을 감고 잠시 바람소리에 취해 있다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몇 발짝 저편, 얼크러져 누운 억새 숲 사이에 비구니 한 분이 빙그레 웃고 서 계셨다.
“가을에는 바람에게 지느러미가 돋아나요. 연못 속 올챙이에 앞발 뒷발이 돋아나듯이. 늦가을 언덕에 일렁이는 바람의 은빛 지느러미, 억새랍니다. 억새풀들은 바람의 왕궁에 소속된 음유시인처럼 바람과 함께 누웠다가 바람과 함께 일어나지요…….”
그제야 알았다. 섬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날지 못하는 새들이 깃털을 뽑아 섬의 등때기에, 옆구리에, 아가미 부위에 은빛 지느러미를 한 터럭 한 터럭 부지런히 짜 붙여주고 있었다는 것을. -246쪽
육지의 끝자락은 언제나 젖어 있다. 바다가 저만치 물러난 다음에야 뭍은 슬며시 치마를 걷는다. 점잖은 척 물러 앉아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한 통속으로 스미는 소리에 내심 자극받고 있다는 증좌다. 흰 레이스 자락 아래 잠깐씩 드러나는 눈부신 뭍의 속살, 물러가던 바다가 되돌아와 달려들면 뭍은 다시 맨살을 감춘다. 갈망과 유혹으로 되풀이되는 노련한 관능의 숨바꼭질, 그 되풀이가 우주의 리듬을 창출한다. 바다-하늘. 하늘-대지, 대지-바다. 그것들이 함부로 몸을 섞어 바람과 파도, 구름을 낳는다. 이 거대한 혼음混淫의 현장. 세상이 갑자기 엄청난 음양의 카오스로 느껴진다. 그런 이치를 이제 알았느냐며 빛바랜 겹동백 하나, 퇴기退妓처럼 웃고 있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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