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김정렬의 효심과 자비심
테리비전 연예프로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개그맨 김정렬은 충남 청양의 가난했던 농촌 출신이다. 1981년 MBC 공채 1기 코미디언으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뒤 ‘숭구리당당 숭당당’이란 주문 같은 말에, 파도에 흔들리듯 추는 춤을 더해 많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개그맨이기도 하다. 그는 그 ‘숭구리당당 숭당당’으로 빌딩을 마련했다고 밝히는데 그 아이디어는 코미디언 조정현의 것으로 조정현에게 사용허락을 받고 고마워서 당시 5만원을 주었다고 한다. 5만 원이 억대의 빌딩이 된 것이다.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지나쳤다가 지난 설 전날이었던가, 밤늦게 TV 프로에 그가 나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눈시울을 적셨다.
김정렬은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형이 있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해서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겠지만 특히 그의 능력을 안 형이 무척 아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은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야 하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말로 부모님을 설득하여 결국 열여섯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처음엔 그의 어머니가 서울에 동행하여 도와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농촌에서 사시던 분이 답답한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가정의 서울에 있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하지만 가지 않는 이유는 콘크리트에 묻혀버린 서울에 가면 없던 병이 날 것 같은 몸살증과 외로움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서울의 자취방에서 믿지 못할 비보를 접하게 된다.
형의 죽음과 용서
1977년 10월 3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김정렬이 자취하는 집 앞에 군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군인들은 쌀 한 가마를 내려놓고 고향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시골집에 가서 김정렬의 형 김성환 상병의 죽음을 알린 후 유골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연금을 줄 테니 화장할 것을 요청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순순히 응했으나 형의 유골은 국립묘지에도 가지 못하고 연금도 없었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6개월 후 군 당국은 형이 농약 먹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유골은 유가족이 절대 자살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하자 군부대 뒷산에 묻혔다. 김정렬은 뒤늦게 형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이 일부러 시험공부 하는데 방해 될까봐 바로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김정렬은 형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형이 죽었다는 그 앞날 자기에게 와서 밤새도록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에 갔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시신을 화장하기 전에 어머니가 본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본 경험으로는 농약을 먹었으면 농약 냄새가 나야 하고 입술이 파래야 하는데 농약 냄새는 나지 않았으며, 온몸이 시퍼렇게 멍만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형의 죽음으로 고혈압이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심장병과 결벽증 증세까지 보였다.
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길이 없었다. 화장을 해버린 주검의 증거가 될 만한 사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에 품고 있던 의문은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야 풀 수 있었다. 독재정권 때 자행된 의문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출범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풀어달라는 진정을 한 뒤 한 여성조사관의 노력으로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밝히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사망한 김정렬의 형 김성환 상병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사를 맡은 여성 조사관은 김성환 상병이 사망한 시점에 그 부대에 탈영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분명 그 사람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하고선 그 사람을 찾아가 만났다. 그 사람은 서울 명문대 교수가 되어 있었다. 조사관이 김 상병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 교수는 ‘고백성사’를 했다.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김정렬의 형 김성환은 1977년 10월 2일 부대 선임병이 외박을 나가자 그 틈을 이용해 아끼던 동생을 찾아가 밤새워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뒷날 일찍 들어갔을 때는 외박을 나갔던 선임병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 선임병은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김성환 상병을 폭행을 하기 시작했고 김 상병은 쓰러졌다. 동료들이 급히 병원에 옮겼으나 김 상병은 숨지고 말았다. 그 뒤 부대 지휘관은 김 상병이 농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처리하기로 하고 부대원들과도 말을 맞추었던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선임병은 탈영하여 농약을 사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그 농약을 마셨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때 마치 근처를 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고 절로 데려가 치료한 덕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며칠 후 그는 부대에 복귀해 살인자가 아닌 탈영병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 석박사 과정을 거쳐 명문대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김성환 상병에 대한 죄책감에 눌려 지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 당시 함께 있던 사람들이 철문을 닫은 듯 감싸고 돌았으나 자신을 찾아온 조사관 앞에서 자백을 한 것이다.
2009년 10월 12일 서울 중구 남창동 롯데손해보험빌딩 10층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회의실. 그곳에는 김정렬씨 가족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들과 앉아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자는 김정렬 남매 앞에 고개를 숙였다. “평생 유가족에게 죄 짓는 마음이었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잘 수 없었다.”며 사죄한 뒤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김정렬은 이미 마음 정리를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나와 준 것만도 고맙다. 형이 30여 년 만에 명예회복된 것만으로도 평생의 한이 풀린 것 같다.” “그동안 화병으로 고생하신 어머니께도 위안이 되어 다행이다.” “형님의 사망 진실이 밝혀진 걸로 만족합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해자분을 만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고 모두 다 용서가 됐습니다.”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32년이 걸렸다. 유가족이나 가해자나 32년 동안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왔던 것을 내려놓게 한 것은 김정렬의 자비였다. 웃음을 팔아 살아가는 그의 깊고 넓은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언론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한다. “밝은 사회,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희처럼 억울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에게 진실이 밝혀져서 명예를 회복하는 영광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참고자료 : 레이디경향. 국민일보 등 각 언론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