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겨울 벤치에 앉아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선 십일번 에이츠의 시집 『첫사랑』을 읽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일천구백 칠십사년 초판이 나왔던 시집은 올해 넓은 판형 두툼한 두께의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초판과 개정증보판 사이 이십 년이란 세 월이 뚜벅뚜벅 흘러갔다. 초판본을 읽던 시절 나는 그녀를 사랑 했다. 첫사랑이었다. 그때 월영동 고목나무에 그녀의 이름을 칼 로 새기며 밤새워 신열에 떨며 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시인의 사랑은 그러해야 한다고 믿으며 깊은 밤 홀로 깨어 빈 원고지에 눈물을 채웠다. 세월은 흘러갔고 첫 사랑이 남긴 아픈 상처는 내 시집 속에 몇 편 슬픈 사랑의 물무 늬로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첫사랑의 개정증보판이라니! 시간 과 시간 사이에 쌓인 세월의 검은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가슴 설레는 첫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초판이 절판된 내 첫 사랑도 개정증보판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꿈을 꾸며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날처럼 더이상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판형이 커진 첫사랑의 개정증보판처럼 어느새 내 그리움의 허리도 기 름져 굵어져버렸다. 두툼해진 책의 무게처럼 내가 가지고 살아 가는 죄의 무게만 무거워져왔을 뿐이다. 이게 세월이구나, 아 득히 절망하며 첫사랑을 덮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오지 않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