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효사상 고찰 (2)
- 대학생 및 일반성인을 위한 소고 -
김 성 영 (성결대학교교수)
Ⅱ. 충무공의 구국정신과 충과 효
우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충무공의 구국활약상, 또는 구국정신이 그의 충과 효, 또는 충효사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자는 1. 구국명장으로서의 충무공, 2. 충무공의 멸사봉공의 충사상, 3. 충무공의 지극정성의효사상에 대하여 진술한 다음 충무공의 충과 효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구국명장(救國名將)으로서의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여10) 훈련원 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간 후 오랜 세월 말단 관직을 전전하다가 수군(水軍)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면서부터이다. 관직의 출발이 비교적 늦었던 것처럼 그가 능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수군의 지휘관에 발탁된 것도 무척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아 머지않아 왜군이 침략해 올 것을 예견하고 있던 그는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자 여수의 좌수영을 본거지로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와 군량을 확충하는 등 다가올 전란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마침내 1592년 (선조 25) 4월 13일을 기해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된 이후 옥포에서 왜군을 대파한 옥포대첩을 비롯하여 당포대첩, 한산대첩 등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일본 해군의 예봉을 꺾고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왜군이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부산포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으나 정적들의 모함으로 통제사의 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충무공의 지도력으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던 조선의 해군은 다시 왜군에 의해 무참히 패배를 당하자 조정은 그에게 백의종군을 명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게 되자 선조 임금은 그를 재차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의 직을 회복했을 때 그의 휘하에는 겨우 120명의 수군과 12척의 병선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전선을 거느린 왜군과 싸워 31척을 쳐부수는 등 다시 대승을 거두고 제해권(制海權)을 회복하게 된다. 조선군의 전열을 회복하고 장병들을 다시 모집하는 한편 백성들의 후원 하에 군비를 강화함으로써 한산도 시절보다 10배나 더 능가하는 전력을 회복하는 등 충무공은 전쟁수행 못지 않게 행정과 경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는 왜군의 500척의 대함대와 싸워 전사하면서도 적을 대파하는 등 세계 해전 역사상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명장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무공은 나라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뛰어난 통솔력으로 역사상 가장 큰 위기에서 나라를 지킨 구국명장이다. 이러한 충무공에 대해 당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은 “하늘과 땅이 놀랄 능력을 가졌으며 천추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운 분”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조선실록>의 사관은 “그의 일편단심 충성심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며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인들 이에 더할 수 있으랴.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옳지 못하여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하고 통탄하였다.
정인보(鄭寅普)선생은「이충무공 순신기념비」에서 “공은 명장보다는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예찬하였다. 천관우(千寬宇)선생은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11)
이은상(李殷相)선생은 “모두 흔히 충무공은 초인적인 존재로 설명하려고 들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충무공이야말로 ‘참사람’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것을 죄다 가졌고, 사람으로 안가져야 할 것은 모두 안가졌다’(人所應有盡有 人所應盡無) 이 말은 남사(南史)에 있는 옛 글귀인데 충무공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 그러기에 ‘참사람’일 뿐, 인간을 벗어난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닌 것이다. 우리도 사람이기에 그가 간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12)
해전연구학자인 발라드(Ballard, G.A.)는 “이순신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 같았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영국 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3) 이에 상응하여, 일본 최근세사의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도고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는 자기를 영국의 넬슨제독과 조선의 이순신장군에게 비겨 찬양하는 축사를 듣고 답사할 때에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겸양했다고 한다.14)
우리의 구국의 영웅 이순신이 이처럼 명장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처럼 세인들로부터 아낌없는 평가를 받기에 합당한 연전연승의 명장으로서의 탁월한 전술을 구사하게 된 근본 저력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특히 충무공의 구국일념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충무공의 남달리 투철한 충효사상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충무공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충사상 - “백의종군”으로 표현되는 충성심
이순신장군은 그의 시호(諡號) 충무(忠武)에서 보듯이 국가에 충성하는 무인으로서의 기계와 사명감을 뚜렷이 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이순신이 첫 벼슬을 귀양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첫 임지는 함경도 땅 삼수(三水)고을 동구비보(童仇非堡)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옛날 제도에 사형 다음가는 1등 귀양지로서 제주도를 오히려 2등 귀양지로 칠 정도였다고 한다. 32세로 비교적 늦게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이 이처럼 첫 임지를 험악한 귀양지로 가게 된 것을 혹자는 그의 무능함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본성이 충용(忠勇)하고 강직하여 명리(名利)를 탐내거나 권세가의 문을 두드림이 없다보니 과거에 급제하고도 그 해가 다가도록 임지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15) 즉 자신의 입신영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세가를 찾아 청탁을 하고 뇌물을 쓰는 것은 곧 관리를 부패시켜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임을 알았던 터이다.
3년간의 첫 임지 생활을 마치고 서울 훈련원 봉사(奉事, 從八品)로 전근되어 와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시련을 겪게 되었다. 훈련원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오품(正五品) 서익(徐益)이란 사람이 상관으로 있었는데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차서(次序)를 뛰어넘어 정칠품(正七品) 참군(參軍)에 임명하려 하자 그 실무를 맡은 색관(色官)으로서 이순신은 분연히 반대하였다. 국가기관의 질서와 기강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한때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충무공은 35세 때 충청도 병영(兵營)의 병사군관(兵使軍官)으로 자리를 옮겼다. 충무공이 이곳 병영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의 방에는 옷과 이부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16) 그 뿐 아니라 어쩌다 고향을 다녀올 일이 있을 때에는 배급받은 식량이 남으면 반드시 양식을 맡은 직원에게 도로 돌려주었다고 하니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백리(淸白吏)의 모델이 될 만 하며 진정 나라사랑하는 충무공의 몸에 벤 충사상(忠思想)을 짐작할 만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척결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말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엄청난 부정축재를 일삼는 오늘의 많은 위정자들이나 국가공무원들이 귀감을 삼아야 할 일이다.
충무공이 발포만호(鉢浦萬戶)시절에는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鎛)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한 일이 있다. 이를 본 충무공은 심부름을 온 사람에게 “이것은 나라의 물건이다. 사사롭게 쓸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심은 지 오래된 나무인데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하고 엄히 책망하여 보냈다고 한다.17) 이처럼 공사(公私)가 분명한 충무공의 물질관에 상관이 수사도 감복했다고 한다.
충무공은 43세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서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는데 이때 첫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경험하게 된다. 이 당시 녹둔도에는 오랑캐의 기습이 빈번한 실정이어서 충무공은 소수의 방수군(防守軍)으로는 위험하므로 상부에 군병을 더 배치시켜 달라고 청원을 했으나 병사(兵事)는 허락하지 않았다. 예견했던 대로 오랑캐들이 안개와 야음을 틈타 우리 지역의 묵책을 넘어 공격해 왔다. 충무공은 중과부적의 상황 속에서도 악전고투하면서 붙잡혀가던 우리 백성 60여명을 도로 찾아오기까지 하였으나 상관인 병사(兵事) 이 일(李鎰)이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고 충무공을 죽이려 마음먹었다. 충무공을 체포하여 패전한 전황을 아뢰라고 호통을 쳤는데 충무공은 엄숙하고도 당당한 목소리로 “내가 역전 고투하여 적도들을 격퇴시키고 우리 동포 60여명을 구출했는데 어찌 패전이라 할 수 있겠소. 또 내가 진작부터 군사를 더 배치시켜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던 공문서 초안이 내게 있으니 조정에서도 이것을 알면 죄가 결코 내게 있지 않을 것이오!”하고 대답했다.18) 그러나 이 일은 충무공을 하옥시켜 버리고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로 꾸며서 충무공을 모함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충무공에게 “백의종군하여 다시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이 일은 충무공에게 닥친 첫 번째 백의종군으로 너무나도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내려진 최종의 명령이기에 충무공은 묵묵히 그것을 감수했던 것이다.
충무공의 보다 감동적인 충사상은 그가 47새 때 전라좌수사가 되어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던 때에 여실히 나타난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전이 된다. 충무공이 늦게나마 해군의 한 지역 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은 평소 그의 인품과 능력을 남달리 인정하고 있던 당시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천거에 의한 것이다.19) 전라좌수사가 된 충무공은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여 물샐틈없는 준비에 들어갔다. 첫째는 휘하 군의 기강을 강화하였다. 충무공은 좌수영 본영은 물론 관할 아래 있는 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여도, 녹도, 발포 등 오관오포(五官五浦)를 빠짐없이 순시하면서 군인을 사열하고 군기를 점검하는 등 군인들의 임전태세를 강화하였다.20) 특히 그 당시 충무공 휘하에는 결사각오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가진 충직한 부하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충무공의「난중일기」에 보면 임진왜란 중 크게 활약한 유명한 장수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가령 5월 초 1일자 일기에 보면 “해군들이 앞바다에 모두 모였다……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雲)등을 불렀더니 모두 다 의기충천하여 제 한 몸은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과연 의사(義士)들이다”21)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제조하여 해전에 대비하였다. 충무공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적이 침략해 오기 1년 전인 선조 24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 1년여 동안 전심전력하여 거북선을 제작하여 전쟁 직전에 완성하였으니 이는 국난을 막으려는 충무공의 지성(至誠)에 하늘이 감동하여 도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일본을 경계하는 것을 오히려 오해와 화를 불러오는 결과가 된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은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왜적을 미리 걱정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고 병정을 뽑아 들이는 일 때문에 영남 국민들은 원성이 높은 뿐더러 비변사에서 장수 재목을 뽑는다고 이순신 같은 사람을 좌수사로 높이 기용한 것은 모두 그릇된 정책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거북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서 거북선 완공에 대해 기록한 것을 참고하면 그해 2월 초8일에 거북선에 달 돛베 29필을 구입했으니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64일 전이다. 또한 3월 27일에 거북선에서 대포 쏘기를 시험했으니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15일 전이다. 또한 4월 12일에 거북선에서 지자(地字)대포와 현자(玄字)대포를 쏘아 실험하였는데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한 일로서, 대한민국 최대의 국난 중 하나인 임진왜란으로부터 이 땅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강한 섭리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셋째,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장기적인 전쟁에 대비하였다. 충무공은 당시 국력이 쇠퇴한 조정에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 그것으로 내륙지방의 백성들에게 조달하고 대신 곡식과 채소와 물물교환을 하여 그것으로 군의 양식을 비축하였다.22) 충무공이 이처럼 유비무환의 자세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은 그의 주도면밀한 성격과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직 일념으로 국가의 안녕을 위하고 나라의 간선을 지키라고 발탁해 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특출했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거룩한 충사상은 그의 두 번째 백의종군 사건을 전후하여 더욱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충무공은 연전연승, 남해에서 일본 해군을 제압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의 상황을 역전시켰건만 원균(元均) 등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이었지만 서울로 압송된 그에게는 가혹한 고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충무공은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원망하거나 끌어들임이 없이 의연하게 고문에 임했다. 죽음 직전에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목숨을 건진 충무공은 당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된다. 개선장군을 위한 상급은 고사하고 반대로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무등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다시 싸워 죄업을 탕감 받아야 하는 치욕을 당하였건만 충무공은 그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였다.23) 이처럼 충무공이 초인적 인내와 침묵의 극기가 가능했던 것은 오직 일념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억울하다면 이보다 더 억울할 수가 없고, 섭섭하다면 이보다 더 섭섭할 수가 없는 누명이요 가혹한 형벌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증오심을 품거나 임금을 원망함이 없이 묵묵히 형벌을 받아들였다. 충무공의 충사상의 절정이자, 인간으로서 국가를 위한 충성심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24)
다음 장인 ‘충무공의 효사상’에서 살펴보겠지만, 충무공은 죄인의 몸으로 백의종군하기 위해 남해로 내려가던 중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게 된다. 남다른 효심을 지닌 충무공은 평소에 지극한 마음으로 어머님을 섬겨온 터였지만 그 상황 속에서 그는 “나 같은 죄인이 세상천지에 또 있겠는가. 일찍 죽는 것만 못하구나”하고 오열했으니 충과 효 사이에서 갈등하는 충무공의 고뇌를 읽을 수 있겠다.25) 여기서 우리는 충무공이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죄인이 아니나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죄인의 심정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몸이 되어 백의종군하는 신세-억울하게 죄값을 치르는 신세-가 되었으며,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은혜 보답 못한 죄인으로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식도리 제대로 못하는 죄인의 신세-당연히 해야할 자식된 도리도 못하는 신세-가 된 미묘한 대조성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26)
특히 충무공이 노량해전을 앞둔 정유년 11월 17일 밤의 ‘최후의 기도’는 충무공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의 압권이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27) 이 기도를 두고 노산 이은상선생은 인류의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기도에 하면서 “공께서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하고 원했던 것은 결코 단순히 원수를 미워한다거나 복수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악을 무찌름으로써만 내 겨레 내 나라가 살 수 있고,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 악을 뿌리 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공의 유일한 소원이요, 최후 최고의 염원이었던 것이다”라고 갈파했다.28)
이튿날(11월 18일) 노량바다의 최후의 대해전에서 애석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도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내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 싸움이 한창 급하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공께는 최후의 일각까지 조국의 존망을 염려하는 구국일념이 있을 뿐이었다.29)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무공은 첫 임지로 북방 간선을 지키면서부터 최후의 격전지인 남방 노량바다에서 순국하시기까지 한 순간도 나라일을 걱정하지 않는 때가 없었고 오직 나라사랑, 구국일념으로 그의 생을 여한없이 조국에 바쳤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아니 동서고금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큼 투철하고도 순수한 충사상을 소유한 인물이 달리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 충무공의 지극정성(至極精誠)의 효사상-죄인의식으로 표현되는 효도심
충무공은 39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부친의 이름은 이정(李貞)이며 고향 아산에서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당시 충무공은 함경도 건원보(乾原堡) 권관(權管)으로 오랑캐를 토벌하고 있었다.30)
그러나 길이 멀고 험해 50일이나 지난 이듬해 40세 되던 해 감신년 1월에 부친의 부음을 듣고 그날로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효자로 이미 소문이 나 있던 충무공이 얼마나 심심했던지 평소 충무공의 인품을 알아주던 우찬성(右贊成) 정언신(鄭彦信)이 함경도를 순찰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충무공이 행여 몸을 상치나 않을까 염려하여 사람을 보내 뒤를 보살펴 주도록 했다고 한다. 충무공은 먼 길을 바삐 가지 말라는 권유도 마다하고 별을 이고 길을 달려 부친의 빈소를 찾았다. 충무공이 상중에 거하는 동안에도 북쪽 오랑캐의 준동이 빈번하여 조정에서는 3년 상이 언제 끝나느냐고 재촉하였다. 왜냐하면 사나운 오랑캐들이지만 조선의 장수 중 겁을 내는 사람은 이순신이라는 것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무공은 탈상을 하자마자 궁중의 사복사(司僕寺) 주부(主簿, 從六品)가 되었다가 행공한 지 겨우 16일 만에 함경도 경흥고을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로 또다시 북쪽 변방을 지키러 떠나야 했다. 이처럼 충무공은 벼슬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함경도 최북단과 인연이 있어서 세 번이나 험준한 함경도 땅이 그의 임지로 주어졌다. 이로 볼 때 충무공은 비단 수군(水軍)에서만 명장이 아니라 일찍 육군(陸軍)에서도 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곳에서 충무공은 경흥에서 가까운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직하다가 상관인 북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으로 첫 번째 백의종군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니까 충무공은 생애에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었는데 한번은 육군의 장교급 군인 시절에, 다른 한번은 해군의 장성급 총사령관 시절에 경험한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부친을 여읜 충무공은 모친(卞氏)에 대한 효성이 더욱 지극하였다. 충무공은 과거에 급제한 지 14년만에 야전군 장교생활을 끝내고 작은 고을의 수령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정읍현감(井邑縣監)자리이다. 일찍부터 충무공이 큰 재목임을 알고 후원을 아끼지 않은 서애 유성령은 이러한 충무공을 두고 “공은 조정에서 밀고 당기는 이가 없어서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넘도록 승진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충무공은 정읍 현감에 부임하면서 고향에서 늙으신 어머니(당시 75세)를 모셔온 것은 물론 어버이를 잃은 어린 조카들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31) 충무공의 맏형 희신(羲臣)은 충무공보다 10세 위인데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당시 관례로는 관리로서 직계 자손이 아닌 식구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남솔(濫率)이라 하여 파면시키는 조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충무공은 “내가 비록 남솔이란 허물을 쓰고 파직이 될망정 차마 의지 없는 어린 조카들을 내버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감동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충무공은 음식을 먹이는 일에서부터 혼인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식들보다 조카들을 먼저 위하고 먼저 생각했다고 한다.
노산은 이러한 충무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과연 우리는 여기서 ‘인간 충무공’을 볼 수 있다. 이른바 법규나 규칙에 사로잡히는 작은 인물, 그리고 제 자식이나 사랑할 줄 아는 조라진 어버이가 아니라 인간의 눈물과 사랑과 양심과 의리를 가지고 모든 작은 것을 초월한 ‘참 인간상’으로서의 충무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충무공이 의지할 곳 없는 조카들을 자기 자식들보다 더 아끼고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한갓 어떤 가족주의적인 관념에서 한 일이라고 풀이하고자 아니한다. 그 뛰어난 인자심과 경외감의 힘이 그대로 뻗어서 마침내는 동포 전체를 사랑하고 구원하는 데에까지 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32)
충무공이 임진년 5월 초4일, 여수항을 떠나 경상도 해역을 향해 구국항전의 첫 출정을 한 날은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생신날이었다.33) 이 사실을 두고 혹자는 어머님의 생신도 소홀히 하는 불효자라고 할지 모르나 「난중일기」는 이러한 고의적인 비평이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난중일기 전편에는 연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도 한시도 어머니를 잊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 때문에 소중한 나라 일을 그르친 일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어머니를 생각하는 간절하고 숙연한 마음은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고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승화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난중일기」 계사년(癸巳年, 서기1593년, 선조26) 5월 초4일 일기를 보면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태 뒤인 을미년(乙未年)같은 날 일기에도 “이 날은 어머님 생신인데, 몸소 나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먼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라고 탄식하고 있다. 또한 병신년(丙申年, 서기 1596, 선조 29)과 정유년(丁酉年)의 같은 날에도 “이날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고 기록, 조국의 바다를 지키느라 어머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한 죄스러운 심경을 비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충무공은 전쟁 중에 잠시 틈을 내어 어머님을 찾아 뵌 적이 있다. 이때의 정황을 그는 일기에다가 이렇게 적고 있다.
아침에 어머님을 뵈옵기 위해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고읍내(古音川)에 대었다. 남 의길, 윤 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가니 아직 주무시고 계시어 일어나지 않으셨다. 웅성대는 바람에 놀라 깨셨는데, 기운이 아주 가물가물해 앞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다만 애닲은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에 착오는 없으셨다. 적을 토벌한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34)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충무공의 지극한 효성도 효성이려니와 이러한 충무공이 있기까지 어머니 변씨께서 아들이 남다른 충효심을 갖도록 평소 엄격하게 교육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 날인 1월 12일자의 일기에서 그것을 읽어볼 수 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 하셨다. 선창에 돌아와서는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늘 곁에 두고 싶은 자식이건만 사사로운 정리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나라일을 걱정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고 당부하시는 충무공의 어머님이야말로 오랜 국난과 시련 속에서도 이 민족을 지탱해준 한국의 위대한 모성(母性)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충과 효가 서로 다른 이질적 개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충무공 어머니 변씨의 가르침은 진정한 효도는 조국에 충성하여 영예를 드높이는 것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충무공의 효심을 극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은 그가 두 번째 백의종군하는 사건을 통해서일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충무공은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한 죄명을 쓰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옥중에서 28일간의 모진 고문을 받고 정유년(丁酉年) 4월 초1일에 석방되었다. 충무공이 죽음을 면하고 석방되기까지 많은 충신들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 중에서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상소문은 유명하다.35)
충무공이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출옥을 하기는 하였으나 삼도(三道)의 수군을 통괄 지휘하던 통제사의 직위는 빼앗기고 직함이 없는 백의(白衣)의 군인으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 배속되어 종군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충무공은 합천(陜川) 초계(草溪)에 있는 권율 장군의 휘하를 찾아 남행하던 중 , 그해 4월 13일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다.36) 당시 충무공의 어머니는 여수 고음천 피난집에 있다가 아드님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가까운 아산(牙山) 고향땅으로 올라오던 도중 해상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충무공은 그해 13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을 때,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별세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궁그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안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37)
한편 충무공은 어머님이 별세한 바로 그날인 11일의 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이틀 뒤에 부음을 들었지만 비보에 접하기 전에 효성이 지극한 충무공은 어떤 불안한 예감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새벽에 꿈이 몹시 산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德)이를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일까.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안후를 알아오게 하였다.38)
충무공은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를 형편이 못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집행유예를 받은 죄인의 몸인데다가 나라의 형편이 위급한 터라 충무공을 호송하는 금부도사가 길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어머님을 여읜 충무공의 죄인된 심정은 그의 일기 속에 계속 나타나 있다.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4월 16일자 일기). “금부도사의 서기 이수영(李壽永)이 공주로부터 와서 어서 가지고 재촉하였다”(4월 17일자 일기).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4월 19일자 일기).
하루라도 육신의 휴식을 취할 겨를 없는 전란 속에서도 남다른 효성심으로 어머니를 공경해온 충무공이었지만 조국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막상 어머님을 잃은 슬픔을 당하고 보니 다만 죽고 싶다는 탄식밖에 없었다. 더욱이 어머님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루어 드리지 못하고 전선을 향하여 떠나야 하는 자신이 이보다 더한 죄인일 수는 없다는 자책감을 갖게 된 것이다.39)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필자는 충무고의 효사상을 ‘죄인의식’으로 표현되는 지극한 효성심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4. 충무공의 충과 효의 상관관계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라 우리는 자연히 충무공에게 있어서 충과 효는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모으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충(忠)’은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나 임금과 상전에게 충성하고 복종하는 의미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흔히 ‘충’이란 말을 생각할 때 그것이 군주나 국가나 인격체 또는 조직체에 대한 충성으로 평면적 이해를 하기 쉽다.40) 이러한 인식은 충성이 바쳐지는 대상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충성하는 것인가의 주체적 요소를 전제할 때는 인식을 달리하게 된다. 즉 내 자신이 무엇에 충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무엇에 대한 희생과 봉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충성을 통한 자아의 실현 또는 자기 이상의 성취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충’에 대한 인식을 자기 희생 일변도로 생각했다면 편견일 뿐이다. ‘충’은 자기희생을 통한 자기실현이란 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충’은 ‘자기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盡己之謂忠)이다.41)
충무공이 일생을 통하여 보여준 ‘충’사상이야말로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충’개념에 부합된 것이다. 즉 태어난 조국과 자신을 인정해 준 군주를 위해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는 한편, 이 값진 희생을 통하여 조국을 위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영원히 실현한 대표적 케이스이다.
또한 ‘효(孝)’의 진정한 의미도 그렇다. 우리의 전통사회는 ‘효’를 부모와 자녀 관계의 가족윤리로만 한정시켜 이해하기 쉬우나 ‘효’는 참된 인간 실현의 근본(爲仁之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2) 나아가서는 정치와 교화의 근원(敎之所由生)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충무공의 효사상 또한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효’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충무공이 어머님께 대하여 보여준 지극한 효심은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에 머물지 않고 친지와 이웃, 그리고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본다.
1) 충⇒효, 효⇒충의 충무공사상
충과 효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나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의 정신적 자세를 설명할 때 “들어가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한다”(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는 취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43) 요컨대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충효사상의 핵심적 요소라 할 것이다.
충무공에게 있어서 ‘충’과 ‘효’는 서로 상충하거나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충’으로써 ‘효’하고, ‘효’를 통하여 ‘충’을 실현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충무공은 전장(戰場)에서 혼신을 다하여 적을 무찌름으로써 자주 뵙지 못하는 어머님께 대한 효도를 값하려 애썼음을 알 수 있으며, 반대로 어머니와 조카들을 극진히 공양하고 보살핌을 통해 이웃과 국가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 ‘효’에 우선하는 ‘충’
그럼에도 필자가 생각하기에, 충무공에게 있어서 ‘충’과 ‘효’ 양자 중에서 무엇이 우선하느냐는 극단적인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면 ‘충’이 ‘효’에 우선하는 삶을 살았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충무공이 ‘충’을 ‘효’보다 중시했다거나 ‘효’를 ‘충’보다 경시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충무공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그가 직면한 조국의 급박한 현실은 충무공으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충’을 우선하도록 만들었다고 하겠다. 즉 충무공은 그러한 조국의 현실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면서까지 ‘효’에 치중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나라에 부름 받은 자식에게 ‘충’으로써 ‘효’를 실천하도록 명하신 어머니의 가르침을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실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