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성사를 보시기 전, 꼭 깊은 성찰을 하세요.
빠다킹신부
초대
-조명연 신부-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스스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쉽게 좌절하고 주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의 고통과 나의 시련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 고통과 시련으로 어려움 속에 있을 때
과연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셨는지를, 아니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도록
초대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 때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분께 의지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 모든 문제들을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에는, 별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힘들고 지쳐했던 것 같습니다.
대림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정말로 기쁜 성탄, 예수님의 탄생하심에
감사하는 성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좋은 자리이든, 나쁜 자리이든 상관없이….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김명희-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사에게 칭찬도 듣고 싶습니다. 아랫사람들한테 존경도 받고 싶습니다. 세상의 명예도 다 가지면 마음이 더 흐뭇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한테 칭찬을 듣기 위해, 존경을 받기 위해, 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늘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할지 요리조리 궁리합니다.
‘아! 이 사람은 요런 사람이니까 요렇게 대하면 나를 좋아하겠지. 저 사람은 이걸 좋아하니까 이걸 주면 나를 존경하겠지.’ 저 사람은 저렇게 대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대하고 그때그때 다릅니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옵니다. 사람을 만나면 피곤해지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졌으니 이제 부도 가져야 합니다. 돈을 많이 가져야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넓은 집에 살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멋있어질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해야 돈을 많이 버는지 고민합니다. 마음도 몸도 분주해집니다. 잠을 자는 시간도, 기도를 하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열심히 열심히 일을 합니다. 돈이 제법 모인 것 같습니다. 큰 차도 마련했습니다. 넓은 집도 장만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은 차만 타고 바쁘게 다니다 보니 이젠 운동 부족입니다. 이 일 저 일로 이 사람 저 사람과 호텔이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자주 외식을 하다 보니 과식 때문에 체중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관절도 아프고 심장도 안 좋고 몸이 천근만근, 여기저기 뼈마디가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명예도 부도 다 가진 것 같은데 왜 사는 것은 점점 고달픈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을 혹사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알맞은 멍에는 무겁지 않으며 오래도록 메고 가도 고달프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알맞은 적절한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권하는 가볍고 편안한 멍에를 그리스도와 함께 메고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러 가야 할 때입니다.
- 김현 신부 -
철부지 아이 같은 나의 투정을/ 언제나 말없이 받아 넘기고/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반기는/ 그대는 내 인생의 동반자/ 그대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의 샘터엔/ 행복이 가득/ 목마른 꽃잎 위에 촉촉한 이슬/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가수 엄선영씨가 부른 ‘내 인생의 동반자’란 대중가요의 노랫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노랫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맺기 위한, 평생의 동반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들이 힘들고 지칠 때, 기대어 위로를 받고 편안한 쉼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의 동반자를 곁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멀리서만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반자는 곁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며, 같은 곳을 향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힘겨워하는 우리들에게 먼저 손 내밀며 우리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다가오신 예수님과 우리들이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은 어떠한 삶이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 한 요양병원에 병자 방문을 갔다가 그 곳에 쓰인 글귀가 너무 좋아서 메모해서 온 것이 있는데, 바로 이 글귀 속에 들어있는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이 아닐까 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씨 따뜻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슴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은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삶을 성실히 가꾸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언제나 손 내밀며 다가오시는,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됩니다”
-홍성만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초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며, 때론 비틀거리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초대에 응하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압니다.
주님과 진솔한 관계 안에서만이, 삶에서 우러나오는 작고 큰 짐들을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렇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가벼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멍에와 집은 궁극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보람찬 일을 할 때, 힘이 생기면서 마음이 뿌듯해지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걸머지면 주님의 죽음과 부화의 신비를 깨우치게 됩니다.
삶의 무게, 내 삶의 짐, 나의 십자가가 주님으로 인해 가벼워져서,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
-강병규 신부-
‘비오는 날이면 가끔 비를 그냥 맞으며 걷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럴 때면 '과연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우산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산을 깜빡 잊고 가져 오지 않아서 뛰어다니는 사람에게는 우산이 필요할테지만, 애처롭게 비를 맞으면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우산보다는 함께 걸어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울고 있는 사람 중에 어디가 아파서 우는 사람이면 약이 필요하겠지만 서럽게 우는 사람에게는 약보다는 기대어 울 수 있는 가슴 하나가 없어서 일테지요.
술집 앞에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서성거리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이겠지만 술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술이 아니라, 앞에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눌 사람이 아닐런지요.
누군가 당신의 마음 씀씀이, 당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한번쯤 되돌아 흐뭇한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몫을 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글자 속에 파묻혀 죽은 하느님을 찾으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만들어 버렸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로 소개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벗이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고 계십니다.
많이 안다는 것에 머물러버리지 않고 먼저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 가까이 가는 방법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을 것을 해내려다 보니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살게 됩니다. 일이 많을수록 살아계신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모든 일은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 안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일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는 것... 등...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신세 망친 이유, 나약하게 죽은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 신학을 공부하고 사목일선에 주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지 8년째가 되었지만 그런 마음을 나는 아직도 품고 사는지 하고 반성해보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졸아만 들고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자꾸 힘들 적에 사랑하며 용서하고 보듬어 주셨던 그 분의 따스한 온기를 잊어가니.. 이제 다시 마음을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내쳐 버리고 냉정해져 버리면 누가 나의 마음을 보고서 주님의 행복한 미소로 답해줄 수 있겠습니까!
느리게 오더라도, 아름다운 몸짓이 아니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는 진한 여운으로 남는
주님의 미소로 다시 나야겠습니다.
주님, 항상 새 날이게 하소서.....
기대어 울 수 있는, 따스한 온기의 가슴이게 하소서..........◆
참다운 안식
-민경철 신부-
놀러 가고 싶은데 주일이라서 못가고, 조금만 달리 해보려고 하면 양심을
자극하지를 않나, 이사만 가면 성당 짓는다고 돈 내라고 하지를 않나,
삶이 잘 안 풀리면 주님께 원망의 마음이 들고… 어떤 이에게는
신앙생활 이전보다 신앙생활 하는 지금이 더욱 큰 무거운 짐이 되고
쓰라린 멍에가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편해볼까 하고
꼼수를 부리려고 하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 법망을 슬그머니 피해 야릇한 기쁨을 누리거나
부당 이익을 챙기려 하듯이 하느님의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볼까 하고
잔머리 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으로 최선을 다해 하느님 세계에
살아보지 못해서 주님 나라의 참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불평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주님 나라의 안식은 편하게 놀고먹는 그런
넉넉한 생활의 평안이 아닙니다. 고되고 지쳐 있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내는
이에게 찾아오는 참 자유인의 기쁨과 행복이지요.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제 영혼이 평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생각나는군요.
주님의 초대
-오영숙 수녀-
주님은 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젖어 그분을 까맣게 잊고 지낼 때도, 끝없는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항상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일 때문에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시며 우리가 초대에 응하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인내가 많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짐이 너무 무거워 힘들어하는 우리를 안쓰러워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삶은 때로 기쁨과 환희에 충만하기도 하지만 때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그때 주님은 상처 받고 지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우리의 짐, 멍에는 불평하고 한탄하며 울부짖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내 십자가를 그분과 함께 기꺼이 지고 가노라면 어느새 그 십자가는 나 자신과 하나가 되어 고통 안에서도 평화롭게 십자가를 끌어안을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하셨듯이 나에게 십자가를 지워준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내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회진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때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시며,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을 찾고 있고,
성당에 들어서서 성체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릴 때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와 안식”이 영속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단 하루도 지속시키기가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체 앞에서 돌아서면 다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앙이 “평화와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위안”을 주는 마약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의 일부만 듣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죠.
준주성범 11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름에 대해 이야기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이들 중에 천국을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따르는 이들이 적고,
위안을 받고 싶은 이들은 많으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이는 적다.
또한 누구나 다 예수님과 더불어 즐기려 하지만,
그분을 위해 고통을 참겠다는 이는 적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어려움을 겪지 않을 때만 사랑한다는 것이죠.
평화와 안식을 얻고 싶은데 예수님의 멍에는 배우고 싶지 않고,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네 마음입니다.
흔히 이 멍에를 우리는 십자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멍에는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도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버겁고 무거운 이 삶의 멍에들을
어떻게 하면 가벼운 주님의 멍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처럼 멍에를 메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삶의 멍에를 메고 간다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 맡겨진 멍에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받아 안고 간다는 것을 의미하죠.
다시 말해 당신에게 맡겨진 현실을 외면하거나 피하려 하기보다
끌어안고 마음으로 품어 안으면서 자신의 삶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도 지고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흔히들 사제는 두 개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말합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이 입고 있는 제의의 앞과 뒤 혹은,
제의 위에 걸치는 영대의 앞과 뒷면에 각각 십자가가 있습니다.
두 개의 십자가는 바로 자신의 십자가와 자신에게 맡겨진 교우들의 십자가를 의미하죠.
그런데 이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모두 등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 무겁게 자신의 등과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영대)를 앞으로 끌어안고
제대 즉,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사제들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모두 남이 주는 것, 남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멍에는 등에 지고 가야할 남의 멍에가 되어 우리의 삶을 짓누를 것입니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끌어안고 가야합니다.
그것을 자신이 끌어안지 않고 남의 짐이라고 계속 뒤로 물리면
앞은 가볍지만 뒤는 무거워 우리네 삶을 붙잡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온유함과 겸손함의 마음으로
삶의 멍에를 남이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고 가신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이미 그 짐과 멍에가 가볍고 편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때문이죠.
오늘 하루 그렇게 자기 주위에 널린 선물들을 남의 것이 아닌,
하느님이 내게 주신 나의 멍에로, 바로 나를 위한 선물로 끌어안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가만히 안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강영구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대에게
인생살이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근원적인 고뇌입니다.
그리고 인생길을 걸으면서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애타게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고통
오온성고(五蘊盛苦)-욕망의 불길이 날로 치성(熾盛)해지는 고통 속에서 삽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고자 몸부림칩니다.
돈과 권력의 힘으로, 자신이 쌓은 지식의 힘에 의지해서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려 애씁니다.
늪의 특징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지식과 향락은 나를 마비시킬 뿐
고통의 늪에서 구해주지 않습니다.
깨친 사람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릅니다.
거기 구원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봅니다.
비로소 인생(人生)팔고(八苦)마저도 하늘을 향한 발판임을 깨닫습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의 손을 잡고 고통의 늪을 건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분이 지워주시는 사랑의 멍에를 메고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삶에 지치고 어려울 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一明)
자신감 넘치는 착한 목자
-박동진 신부-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린다는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거짓된 목자에게
맞아떨어지는 말이라면, 이익을 보고도 의를 곧게 한다는 ‘견리사의’(見利思義)는
착한 목자에게 해당됩니다. 오리와 닭은 제 새끼들을 키우는 방식이 제각기
다르다고 합니다. 하나는 앞서 가면서 따르게 하고, 다른 하나는 맨 뒤에서
보살핍니다. 앞에 서야 할 때 앞에 서고, 뒤로 물러나야 할 때 뒤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전 되면, 진정한
지도자이자 착한 목자를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모습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앞서야 할 때 꽁무니를 빼고, 뒤로 머물러야 할 때 나서며,
희생을 요구할 때 피하고, 상 받을 때 나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학자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화한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어느
한 지역에서 부당한 학살을 감행하자, 암브로시오 성인은 황제에게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 앞에서
할 수 없는 입바른 소리를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것입니다. 또한 아리우스
이단자들에게 몇몇 교회를 내 주라고 했을 때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호하고자
밤새 교회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자신감 넘치는 착한 목자를 양들은 마땅히 알아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유설 신부-
◆남자들은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다른 이들에게 안식을 주는 사람으로 생각할까? 혹은 이러한 모습은 여성이나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가? 남성학에서 ‘남자다운 행동 틀(남자처럼 행동하기)’이 있다. 이는 사회가 남자에게 바라는 모습으로 울지 않는다?, 성에 대해서 안다?, 물러서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다?, 성공적이다?, 강하다?, 여성에게 주도적이다… 등이다. 반면에 ‘여자다운 행동 틀’도 있다. 이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잘 보살피고 복종적이고 너무 똑똑하지 않고 예쁘고 돈 잘 벌고 섹시하고 아이들을 잘 기르고 자기의 요구를 접어두는 것… 등이다. 사실 남성이나 여성이 이런 사회적 틀 안에서 24시간 생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남자가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아마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틀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강하면서도 온유한 분이셨다. 용기있는 분이면서 다른 이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겸손한 분이셨다. 예수님은 스승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자신은 종으로 왔다고 하셨지만 보통 잔치에서 시중 드는 사람은 여성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남성상을 보여주셨다고 본다.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서 좋은 것을 골라 새로 만들었다.
신학교 때 학장이셨던 신부님이 생각난다. 사제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분도 한국에 오게 되어 같은 공동체에서 살게 되었다. 그분은 연세도 많았고 학장이셨지만 식사 준비·설거지·청소·집안 정리·사목에 대한 결정에 모두 참여하셨다. 온유함과 강함이 조화를 이룬 분이셨다. 이번 대림절에 남자든 여자든 획일적인 사회의 틀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재능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획일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길 제안하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과 닮는 것이 아니던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양승국신부-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미사에서 영성체가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습관대로 잠깐 묵상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성체의 순간, 너무나 은혜로운 감사의 순간이기에 그냥 후다닥 일어날 수가 없지요. 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신자석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제 눈에 ‘확’ 띄는 자매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다른 신자들에 비해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다른 분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꽤 긴 침묵시간을 못 견뎌 몸을 뒤채는 사람, 심심하다보니 주보를 뒤척이는 사람,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하는 얼굴로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 기다리다 못해 먼저 일어서는 사람...
그러나 그 자매님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그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찬 나머지 광채까지 났습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미소 짓는 듯 했습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위로, 참된 평화, 참된 휴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 다니지만 미사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지만 성체성사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정처 없는 순례를 거듭하지만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입니다.
매일의 미사 중에 우리는 기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로, 슬픔에서 환희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파스카 축제,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매일 기적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데, 또 다른 기적을 찾아 헤매 다니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 일출 무렵,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참으로 영롱합니다. 정말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즉시 말라버립니다.
이른 아침,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단합니다. 정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찰나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눈앞에서 그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인간적인 위로가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위안거리를 찾아 숱하게도 헤매 다녀보지만 대체로 다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부초 같은 것들입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오래 가는 대상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자취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연들도, 우리가 목숨처럼 놓기 싫어하는 물건들도 덧없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오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안식처이십니다.
연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그분 앞에 자리 잡고 앉는 것입니다. 그분의 좋으심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멍에
-박상대신부-
매일미사의 준비를 돕기 위해 신자들이 손쉽게 쓰는 소책자 <매일미사>의 오늘 미사로 봉독되는 복음을 보면, 그 첫 부분이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덧붙인 말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복음의 본문으로 들어가는 전주(前奏), 또는 인트로(intro)의 역할을 맡아 연결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덧붙여진 말이다. 그런데 이 덧붙인 말이 오늘 복음의 진가(眞價)를 다소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이 가르침 형식의 단순한 "말씀"이기보다 앞서간 "찬양기도"(마태 11,25-27)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이를 찬양하는(25절)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앞의 부분(25-27절)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고, 오늘 복음(28-30절)은 인간을 향한 초대의 기도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시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리고는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초대하시면서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고 약속하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다는 말씀이 초대의 이유이고, 초대받은 자에 대한 약속의 내용이다.
"멍에"란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지 않고 무거운 짐이다. 멍에는 원래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로서 그 자체의 무게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것을 사람의 목에 맨다면 그 무게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거나 억누르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율법"을 의미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제시하는 율법의 멍에는 사람을 옭아매고 무겁게 짓누르고 자유를 속박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의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며 자유와 영원한 안식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도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산상설교(마태 5-7장)에 배웠듯이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은 유대교 율법 이상의 정심(正心)과 정의(正義)를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바로 사랑의 멍에라는 것이다. 이 멍에가 가볍고 편한 이유는 예수께서 스스로 지고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먼저 이 멍에를 매고 자신을 굽히셔서 우리 죄인의 반열에 서셨고, 우리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에까지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랑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이웃에게도 이 멍에를 함께 지자고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마태 11, 28-30)
-유 광수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작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조용히 이 말씀을 음미해보자. 누가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벗어버리고 해방되어야 한다. 정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즉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먼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대로 배워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 가기는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그냥 에수님께 가서 청하기만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 방법을 모른다.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네 목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라. 내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큰 평화를 얻었는가를!"(집회 51, 23-27)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첫댓글 주님! 무거운 짐 내려놓고 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