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시138:1-8)-2016.8.7
누구든지 주안에 있으면 날마다 새롭고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강건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도 하나님이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약한 자로 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니 우리도 역시 강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오는 자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세상에서 우리가 약하여 넘어지고 낙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내 영혼을 강건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강건을 입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오산리에서 우리 중고등부 여름캠프에 참석했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에 기도원은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여름철 휴가를 기도원으로 온 듯 했습니다. 가족들끼리 오신 분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이분들이 왜 기도원을 찾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찾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내 영혼이 강건해지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너무 연약합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문제는 넘어지고 일어설 줄 모릅니다. 그만큼 영혼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영혼이 강건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강건하지 못하면 세상에 잡혀 먹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한 성도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으면 악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건강치 못한 사람은 믿음이 병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자기 영혼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은 조금만 이상 징후가 발견되어도 질병을 의심하고 병원을 찾는데 자기 영혼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히 당신의 신앙은 병든 것입니다. 보통 영적으로 병든 자의 건강 상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건강할 때는 하나님께 민감하지만, 신앙이 병들면 하나님께 둔감해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사라지고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것에 대해 변명이 많아집니다. 한마디로 감사가 시들고 불만과 불평이 잦아듭니다. 자꾸만 부정적인 마음이 들고 부정적인 말이 여과없이 터져 나옵니다. 예배에 대한 열정도 없고, 예배는 드려도 마음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교회 출입이 뜸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것에 자꾸 마음이 쏠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겨하던 모든 것에 시선이 돌아갑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내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상들입니다. 문제는 본인이 그런 자신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자기 영혼에 적색불이 켜진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치료할 의지가 없습니다. 즉시 손쓰지 아니하면 큰일 납니다.
영혼이 강건한 자는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신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성품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해 드립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합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모든 말에나 일에나 한결같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영적인 것에 둡니다. 이는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강건케 하셨습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강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3절). 이것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은 강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자기 삶에 영적 빨간 불이 켜질 때 누구보다 연약했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환난과 고통,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죄악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고, 무지함과 교만함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애매하게 당하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자기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건함으로 극복했습니다.
다윗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강건해져 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다윗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정금같은 다윗을 만들기 위해 불같은 시련으로 단련하신 것입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영적 체질로 만들어갑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길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고, 아들의 반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으며, 밧세바와의 간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터득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다윗은 성숙해졌고 강건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으로 건강해야 범사가 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무나 강건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강건함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1절).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2절). 또한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3절).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16-18절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내 영혼을 강건케 하시는 것일까요?
(1) 내 영혼을 장려해 주십니다(3절)
내 영혼을 강건케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내 영혼을 장려해주시는 것입니다. 장려해 주신다는 말씀은 ‘권하여 좋은 일에 힘쓰도록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상에도 장려상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장려상은 지금 당장은 성적이나 실적보다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바라보고 힘과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하여 주는 상입니다. 본문에서 장려해주신다는 말씀도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면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내 영혼을 만족케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감히 누가 나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내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내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 내 영혼을 만지실수 있고, 위로해 주실 수 있으며, 격려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 영혼을 만족시켜 줄자가 없습니다. 이 땅의 사는 모든 사람들의 피곤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육체만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정신적으로 더 피곤합니다. 이른바 영적인 피곤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피곤함보다는 영적인 피곤함에 지쳐있습니다. 육체적 피곤은 잘 쉬면 금방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피곤함은 그리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영적 피곤함은 두말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피로라고 말하지만, 불신자들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무튼 영적인 피로가 쌓이고 쌓이면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 됩니다. 사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영적인 피곤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고통도 영적인 고통으로 오는 것이요, 육체적인 고통도 영적인 고통으로 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영혼의 고통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을 미리 염려하므로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영적인 고통들입니다. 영적인 고통은 영적인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영적인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 고통입니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에만 무려 365번이 나옵니다. 이는 일년 365일 동안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찬송가 495장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장려하여 주옵소서’ ‘지친 내 영혼을 북돋아 주옵소서’ ‘상한 내 심령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곤고한 내 영혼에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 ‘갈급한 내 심령을 만족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 지치고 상한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삶에 지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체의 목마름과 영혼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지체들도 많습니다. 사랑을 갈급하며 외로움에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장려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지치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만지셨고 위로하셨으며, 힘과 용기를 더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을 장려하셨습니다.
(2) 환난 중에서 내 영혼을 소성케 해 주십니다(7절)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도 받았지만, 환난이나 핍박, 인간적인 배신 등을 다 겪어본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영욕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을 한번도 배신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고 보장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향해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7절을 보십시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한마디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소성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소성케 하신다’는 말씀은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뜻입니다. 혹은 ‘큰 병을 앓고 있다가 기적같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장려한다’는 의미와는 약간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장려한다’는 의미가 위로와 격려, 소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차원이라면, ‘소성한다’는 의미는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주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시골에서 보리농사를 지을 때 거들어 보았습니다. 보리농사를 지을 때, 가을에 파종하여 추운 겨울을 어떻게 넘길까 걱정이 듭니다. 하지만 파종하면 조금 지나 파란 보리 싹이 납니다. 그리고 파란 보리 싹이 겨울을 지납니다.
추운 겨울에 파란 보리 싹이 눈에 덮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얼지 말라고 보리 싹을 밟아줍니다. 이것이 보리밭 밟기입니다. 보리밭을 밟는 것이 장려입니다. 죽으라고 밟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보리가 자라나서 거둘 때가 됩니다. 보리를 수확합니다. 이것이 소성입니다. 한마디로 장려가 호전시킨다는 의미라며, 소성은 장려보다 한 단계 진보된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도와주는 것이 장려라면, 산소 호흡기를 떼고도 살 수 있는 단계가 소성입니다. 장려가 호전을 의미한다면, 소성은 반전 혹은 역전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취업하지 못한 자녀가 풀이 꺾여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너는 반드시 좋은 직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소망을 주는 것이 장려하는 것이라면, 좋은 직장을 잡아서 다니도록 축복해주는 것이 소성과 같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지친 나머지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힘들어서 기운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곤한 잠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어루만져 주시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권면합니다. 떡과 물을 공급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장려’입니다.
하나님이 지친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용기를 북돋아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떡도 먹고 물도 마셨지만 다시 드러눕고 맙니다. 한마디로 장려가 제대로 안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십니다(왕상19:7). 물론 우리가 천사든지 여호와의 사자든지 억지로 구분할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이에 엘리야가 다시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성’입니다. 한마디로 장려보다는 소성이 훨씬 더 성숙한 진보입니다.
다윗은 7절에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켜주셨다는 말을 소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숨이 막혀서 호흡이 곤란하고 답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시고, 혈액을 순환시켜 주시며, 정상화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시편 23:4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죽음의 끈을 푸시고 다시 소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의 집요한 박해와 수없는 환난 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손을 펴시고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권능의 손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7절). 이것이 소성입니다.
시편 기자는 119편107절에서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19:7절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인생이든지 예기치 못한 환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환난 속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은혜가 바로 ‘소성’입니다. 가뭄이 들어 땅이 갈라지고 수목이 타들어가며 강이 갈라집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비를 내리시며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며, 수목으로 생기를 돌게 하시고 목타는 시냇물을 노래하게 해주시는 것이 ‘소성’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것이 ‘소성’입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것이 ‘소성’이요, 나인성의 죽은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소성’입니다. 문둥병자가 고침 받는 것이 ‘소성’입니다.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 ‘소성’입니다. 막힌 것이 뚫리는 것이 ‘소성’입니다. 닫힌 것이 열리는 것이 ‘소성’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여러 가지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의 환난, 건강의 환난,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겪는 환난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는 것이 ‘소성’입니다. 때문에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소성케 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돈과 명예가 없는 자가 아닙니다. 건강이 무너진 자가 아닙니다. 학벌이나 배경이 없는 자도 아닙니다. 자기 영혼을 소성시켜 줄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내 영혼을 소성시켜 주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애가1:16절을 보면, “나를 위로하여 내 영혼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니라”. 그래서 자기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른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소성시켜 주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행복합니다.
(3)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해 주십니다(8절)
하나님이 내 영혼을 강건케 하신다는 말은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보다 더 귀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완전케 하신다는 말씀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여러 가지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나 때문에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것이니라”(창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꼭 아브라함에게만 주시는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으로 삼으셨고,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믿는 모든 자는 누구든지 동일한 효력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때문에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이 완전케 되는 축복이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관계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내안에서 찾아보십시다. 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그런 모든 것들을 완전케 해주신다고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선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로마서 8장28절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뜻대로 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8절에서 말씀하시는 ‘완전케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기준에서 보는 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의 완전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들쭉날쭉하여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단지 우리의 욕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끝없는 탐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완전함’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것은 불완전하지만, 오직 우리 하나님만 완전하십니다. 완전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완전케 하실 분은 우리 주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돈이 얼마나 있어야 완전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수억, 수백억, 수천억, 어떤 이는 단돈 몇 백 만원만이라도, 혹은 몇 천 만원만 있어도 완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물질의 완전함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완전함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완전함을 염두 해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결코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고, 공격을 당해 빼앗기지도 아니하며, 탈취당하거나 소실되거나 유실되지 않고 완전히 보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면 이 땅에서 우리와 관계되는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주안에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믿으십니까? 더 이상 이제 나약한 성도로 살지 마십시오. 세상 것으로 근심이나 걱정, 염려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승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내 영혼을 장려해 주시고, 소성케 하시며,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해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강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