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경주법칙(히12:1-3)-2016.8.14
지금 브라질 리우데 자이네로에서 제 3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207개 나라에서 온 선수들이 28개 종목에서 306개의 금메달을 놓고 경합을 벌입니다. 각기 자기 조국의 명예를 걸고 말입니다. 오직 그들의 최종목표는 메달일 것입니다. 그것도 금메달 말입니다. 물론 메달권에 미치지 못한 선수들은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이 최종의 목표는 메달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금메달을 목에 건다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자기 국가 전체의 영광과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국민들이 메달의 색깔을 따라 울기도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메달 한 개의 브랜드 가치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금메달이라 해도 은에 금을 도금한 것인데 액수로는 70여만 원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메달의 가치는 실로 엄청납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리우 올림픽의 금메달 브랜드 가치를 발표했는데, 국민통합과 사기진작, 국가적인 브랜드와 기업의 이미지 제고 등을 고려할 때 최소 1,950억 원에서 무려 2,690억 원의 가치가 충분하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부가가치가 발생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금메달을 따려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올림픽은 각본 없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수 년 동안 땀 흘리며 준비해온 올림픽에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쏟아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금메달 지상주의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은 최소한 4년 동안 세계 최고의 일인자 자리를 보장해줄 것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마다 금메달 하나만 따면 부와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신분까지 보장을 받을 수 있어 최고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계의 일인자가 되는 금메달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보통 잘해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선수는 적당히 볼만한 선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황영조 선수는 당시 인터뷰 기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연습할 때 너무 힘들어서 지나가는 차에 부딪혀 죽어버리고 싶었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다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양궁은 세계 정상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1위는 세계1위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양궁선수들은 저녁 11시가 넘도록 연습하고 맨손으로 뱀을 잡는 연습까지 한답니다. 금메달을 그냥 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안납니다. 어찌보면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실력이 좌우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사카에서 열린 육상선수권대회에서 100미터 경기의 금과 은메달의 기록은 11.01로 똑같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판독을 할 수 없어서 사진 판독으로 정밀 검사를 했더니 불과 0.003초라는 겁니다. 여러분!!! 0.003초의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우리 눈이 한번 깜박거리는 속도가 0.02초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보다 6배가 더 빠른 초스피드 시간인 셈이지요. 불과 0.003초의 기록이 한 선수는 영웅으로, 한 선수는 패잔병으로 갈라버리는 것이예요. 그런데 금메달과 은메달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는 감격해서 울고, 은메달을 딴 선수는 억울해서 웁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말씀 더하겠습니다. 1992년 25회 하계올림픽 때 미국 코넬대학 심리학 연구팀이 아주 재미있는 발표를 했습니다. 메달리스트가 게임을 종료하는 순간 표정을 통해 나타나는 감정을 조사해 보았는데, 은메달리스트 23명, 동메달리스트 18명의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표정과 감정이 전혀 다르더랍니다. 이른바 행복지수 10점 만점에 은메달 선수는 4.8이 나왔고, 동메달 선수는 7.1의 수치가 나오더랍니다. 객관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통계를 보고 여러 가지로 분석을 했더니 이유가 있더랍니다.
선수마다 자기들이 목표하는 가상의 성취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은메달 선수의 가상 성취메달은 금메달이고, 동메달선수의 가상성취 메달은 동메달이더랍니다. 그래서 은메달을 딴 선수는 실패로 보고, 동메달을 딴 선수는 성공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은메달 선수는 한번만 실수하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자기를 지배하므로 기쁨이 반감되고, 동메달 선수는 까딱 잘못했으면 노메달에 그칠 뻔 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그의 기쁨을 배가 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금메달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심정으로 뛰는 가 봅니다.
이처럼 운동선수에게 월계관이라는 금메달이 있듯이 신앙생활에도 면류관이라는 메달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금메달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이 땅에서 잠간뿐이지만, 신앙의 금메달은 세상의 스포츠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각 나라마다 보상하는 것도 천차만별이지만 하늘나라 금메달은 나라마다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금메달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고, 녹슬지 아니하며, 썩어지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올림픽은 실패하면 4년을 절치부심하여 기다려야 하지만, 하늘나라 올림픽은 4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올림픽은 일 년 열두 달 매일 열립니다. 비록 잠간 실패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 달리면 됩니다. 지금도 신앙의 올림픽은 진행 중입니다. 세상의 올림픽은 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경쟁의 대상이지만, 하늘나라 올림픽은 당신이 나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투기할 필요가 없고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경쟁과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올림픽은 순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대평가가 아니고 절대평가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끼리 경쟁하거나 투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올림픽은 종목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번 리우 올림픽의 종목은 28개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올림픽은 종목 제한이 없습니다. 기도, 전도, 사랑, 헌신, 봉사 등등 모두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또한 너와 내가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순서를 매기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절대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묵묵히 변덕부리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코스를 따라 달려가면 됩니다. 하늘나라 올림픽은 기록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기록에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똑같은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한 시간을, 어떤 이는 일 년을, 어떤 이는 평생을 걸려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은 신앙인들이 경주하는 법칙과 원리에 관한 지침서입니다. 마치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위해 경기장에 들어 서 있는 선수들과 같습니다. 스타디움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달려온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물론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선진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행복한 것은 그분들이 먼저 달려간 길을 보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실수한 것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며, 그분들이 상급 받는 것을 우리가 즐겨하며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달려온 경주의 법칙처럼 우리도 이렇게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경주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강조하는 경주자의 법칙은 첫째는 결단력, 둘째는 지구력, 셋째는 집중력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경주자의 기본원리요,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1) 먼저 결단력을 가져야 합니다(1절중)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결단력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결단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업도 결단력이 중요하고, 공부도 결단력이 중요하며, 운동도 결단력이 중요합니다. 믿음도 결단력이 무척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결단력을 가지려면 우리의 결단력을 방해하는 것들을 차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단은 하면서도 결단력이 없는 이유는 결단을 방해하는 것들을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단력은 마음이나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만 결단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결단력은 추진력을 통하여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경주하려면 경주에 방해가 되는 요인들을 찾아서 버려야 합니다. 본문 1절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모든 무거운 것’이요, 내적인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내외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찾아내어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결국 가볍게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만 가볍게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경주자도 가벼운 마음으로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달리다가 포기합니다. 결국 완주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경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운동선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무거운 것’입니다(1절중). 무거운 것은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짐을 지고 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특수한 경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짐이 될 만한 것들은 과감히 버립니다. 무거운 것들은 기록과 성적에 결정적 변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영 선수 같은 기록경기는 머리털은 물론이거니와 손과 다리에 나 있는 털까지도 경기력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찾아서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방해물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선수의 마음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들을 찾아서 버려야 합니다. 이른바 운동에 방해가 되는 패배의식, 과욕 내지는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찾아내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잠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고 언제 운동할까요? 때로는 먹는 것도 버리고, 마시는 것도 버리며, 입는 것도 자는 것도 심지어 일가와 친척, 좋아하는 취미생활까지라도 경기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은 과감하고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버리고 끊고 포기하는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1절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다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을 경주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단호하게 버리고 끊고 포기하지 않으면 믿음의 경주가 정말 어렵습니다. 믿음을 경주하는 목사라도 세상에서 즐겨하던 모든 것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곳까지 완주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세상 운동선수들도 머리카락 하나까지 무거운 짐이 될 정도로 민감한데, 믿음을 경주하는 우리들이 영적인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으로부터 민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올림픽은 참가하는데 의의를 둔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음의 올림픽은 절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자는 반드시 히브리서 11장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벗어버려야 할 정욕과 탐욕, 지저분하고 더러운 욕망을 회개하고 버리지 못한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경주는 보이지 않는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자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무서운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우리 스스로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사역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자존감을 파괴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이 우리를 정죄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조롱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얽매이기 쉬운 죄는 반드시 벗어버려야 합니다. 벗어버린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여 심령의 자유를 얻어야 가벼워집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그분의 성전이 되고 그분의 왕궁이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내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물론 모든 무거운 것도 주님이 나의 주, 나의 왕이 되시면 단번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살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합니다. 달리다가도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무엇보다 넘어진 곳에서 일어설 줄 모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특별히 세상은 첨단의 소재를 가지고 가볍고 빠르게 변화하는데, 성도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둔감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지금 당신에게는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없는지요? 지금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무거운 짐은 율법과 잡념과 취미 같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2) 그리고 지구력을 가져야 합니다(1절하)
결단력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력을 가져야 합니다. 지구력은 일정한 일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지만, 스포츠 과학에서의 지구력은 피로에 저항하는 유기체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버티는 힘이라는 말입니다. 경주에 경주를 다해서 달리고 뛰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뛰어야 합니다. 정말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힘을 내서 달려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의 올림픽은 불과 몇 초를 견디지 못해서 금메달을 놓치고 게임을 실패합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패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생활은 더욱 그러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결국 지구력에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래참고 인내하며 꾸준히 달리는 것이 완주의 변수가 됩니다. 지구력이 없으면 기도도 못합니다. 전도도 못합니다. 믿음의 경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한두 번 열심을 갖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버티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지구력이 없어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믿음으로 경주하던 선진들의 공통점은 강한 지구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참고 인내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건설하며 끈기 있게 버텨오던 노아를 기억하십니까?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열국의 아비로 삼아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만 믿고 끝까지 버텨오던 아브라함의 지구력을 기억하십니까? 자기 가진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리고서도 반드시 회복하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지구력으로 버티던 동방의 의로운 자 욥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이들이 자기들의 지구력으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지구력으로 승리케 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뭐니뭐니해도 우리 주님의 지구력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내심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욕을 들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뺨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 십자가에 친히 달리셨습니다. 당장이라도 하늘에 불을 내려 악인들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시오, 열 두 영 더 되는 천군들을 소집하여 원수들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참고 또 참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이 참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입었습니다. 이처럼 인내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인 것입니다.
(3) 또한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2절상)
좋은 결단력과 지구력을 가진 사람은 좋은 선수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는 집중력입니다. 선수에게 집중력은 최고의 경기력입니다. 집중력에 따라 경기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주하는 무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당수의 선수들이 집중력이 없어서 게임에 실패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의 공통점은 오직 경기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양궁은 이번에 개인전과 단체전을 모두 석권했습니다. 대단한 집중력입니다. 양궁선수들은 집중력을 훈련하기 위해 베틀에 누워 좌우로 오가는 베틀만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리지 않는 훈련을 한다합니다. 또한 미세한 것을 크게 보이려고 머리카락에 벼룩을 묶어서 종일 응시하는 훈련도 한다합니다. 빈대가 탁구공만큼 커져 보일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경주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으로 경주하는 우리들 역시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어찌보면 믿음의 경주는 세상의 어떤 스포츠보다 더 강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집중력이 흩어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자는 집중력 훈련을 강화해야 합니다. 솔직히 많은 성도들이 집중력이 산만하여 실패와 낭패를 당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집중력이 흩어지면 완전히 끝납니다. 예배도 집중력이 생명입니다. 어떤 이는 마치 예배를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참석하는 데 의의만 두면 안됩니다.
예배는 절대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환경도 보지 말며 모든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들의 시선이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갑니다. 세상을 두리번거리게 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면 세상에 집중합니다. 세상의 정욕과 연락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그러면 결국 실패합니다. 큰일 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세상에 집중하다가 수치를 당합니다.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교회와 성도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영혼의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순간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앞만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달려갈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우리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잖습니까?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사단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역대하 20장의 유다 왕 여호사밧은 주변 열국의 연합군대의 침공을 받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전쟁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열왕기하 20장은 병들어 죽게 된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이야기입니다. 그도 역시 오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집중하여 기도함으로 자기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였기에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신앙의 경주에서 절대 서두르거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완주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결단력과 지구력과 집중력, 이 세 가지를 잘 갖추고 믿음의 경주를 잘하여 하늘의 면류관을 받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