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이 말씀을 잘 분석해 보면 믿음은 구원을 받기 위한 출발이고 과정이지 구원의 완성은 아닙니다.
구원은 마지막 심판때 가서 결정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곧바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 심판 때에 가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홍해를 건넜으나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40년의 기나긴 광야길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구원을 향한 출발과 도착 사이엔 기나긴 시련과 연단과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많은 비유들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씨를 뿌리자 곧 열매가 맺힌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는 과정에는 파종과 성장과 추수라고 하는 중간과정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말씀은 씨앗이며 그것이 우리의 심령 밭에서 잘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알곡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보면 반드시 종들에게 사업자금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있고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 그것을 결산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도 투자가 있고, 또 결산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성도사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고 있는데, 유대인의 결혼제도를 보면 약혼과 결혼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혼과 결혼 사이엔 준비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남자는 집을 준비하고, 여자는 결혼 예복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가시겠다 하셨으므로(요14:2), 그 사이에 성도들은 흰옷을 준비해야하는 것입니다. (계19:7)
이렇게 첫 믿음을 가지는 것은 구원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출발하는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이 본문에서 "결국"이란 말은 원어로 [텔로스]인데, 끝, 마지막, 목적, 목표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믿음이라는 길의 마지막에 가서야 혼의 구원이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본문에 나오는 <받음이라>는 말이 현재형으로되어 있으니 이미 구원을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현재 받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믿으면 그 결과가 구원을 받는것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쓴 것입니다.
믿으라는 명령형은 연속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헬라어 문법에는 명령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어에서의 명령법은 원형동사를 사용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현재형을 사용하기도 하고, 과거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현재형을 사용할 때는 그 명령이 반복적이며 계속적임을 말하고, 과거형을 사용할 때는 단회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나오는 <믿으라>는 구절들은 대개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4:2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이상 위에 인용된 <믿으라>는 말은 모두 명령법 현재형이므로 '계속해서 믿으라'는 뜻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위의 제시된 성구들 중 요4:21절은 NA(네슬알란드)에서는 현재형이지만, TR(공인본문)에서는 과거형을 써서, 단회적 명령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중요한 행16:31절의 바울의 간수에게 하신 말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란 말씀에서 '믿으라'란 말씀이 명령법 과거로 되어 있어서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구절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방인인 간수이기에 개종을 권유하는 뜻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개종은 한번이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단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인 성질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입하지 말라
이렇게 구원이란 계속적인 믿음을 가짐으로써 그 마지막에 받는 것이므로 이제 겨우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식으로 교리를 주입한다거나 구원의 보장을 억지로 심어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으니 이 보배로운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잘 지켜나가라고 가르쳐야 성경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과 여러 사도들이 보여준 합당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아직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도 있을 법한데요.
그것은 이미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또는 그리스도의 크신 권세와 능력, 성령님께서 시시 때대로 보여주시는 은혜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성삼위 하나님이 늘 보호해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은혜를 볼 때에 우리는 결국은 약속하신 대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겠구나 하는 소망과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신앙생활 과정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 너무 확실하게 믿어지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은 개인적인 확신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공개적으로 교리를 만들어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엔 겨우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주입하는 식의 전도방법을 쓴 것은 60년대 이후 신복음주의자들이 교회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만들어낸 잘못된 관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이 믿는 자들을 반드시 구원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끝까지 믿고 따라야 겠지요.댓글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