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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원두표 묘역(경기 문화재자료 12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원호·원두표 묘역 입구 전경 |
원호(元豪, 1533~1592)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중영(仲英)이며, 고려(高麗) 시중(侍中) 홍필(弘弼)의 9대손이다. 할아버지 팽조(彭祖)는 무과에 급제하여 전쟁에 나간 일이 세 번이나 있었고, 아버지 송수(松壽)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이진자(頤眞子) 김덕수(金德秀)의 문하에서 윤두수(尹斗壽), 이해수(李海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무예도 연마하였으나 과거에 계속 낙방하자 탄식하고는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택하여 156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
▲ 좌측에 위치한 원두표선생 신도비 |
▲ 우측에 위치한 원호장군 신도비 |
선전관으로 임명된 뒤 경주통판으로 옮겨갔다가 운산·단천군수를 지내고 경흥부사를 거쳐 경원부사가 되었다. 경원부사로 있을 때 북쪽의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적병을 모두 격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중 전라좌도에 왜구가 침입하였는데 이 사실을 통고받지 못해 정상을 모르고 있다가 인책되어 고향 여주에 머물렀다. |
▲ 묘역을 오르면 맨 위에 원호장군 묘역이 있습니다. |
1592년(선조 25) 4월 14일 20만 왜군의 선봉으로 소서행장이 이끄는 1만 8,700명의 병력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의 군대를 격파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다가 여주의 남한강 신륵사에서 제동이 걸리는데 이는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군의 한양 진격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던 원호는 당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일단이 구미포(龜尾浦)에 들어가 약탈을 일삼자 새벽에 적의 감시병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앞세워 적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는 왜란초기 한강에서 거둔 조선군 최초의 승리였다. 구미포에서 적을 섬멸한 원호는 마탄(馬灘)으로 가서 이천부사 변응성(邊應星)과 협공하여 왜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
▲ 원호장군 묘역은 정경부인 상주김씨와 합장묘 |
의주로 몽진(蒙塵)길에 올라있던 선조는 이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며 원호에게 경기·강원 방어사겸 여주목사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원호는 북쪽에 있는 왜군 토벌의 임무를 맡고 금화(金化)로 진군하던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자 깊은 산의 낭떠러지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금화 고을 사람들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고향인 여주까지 운구하여 북내면 장암리에 안장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고, 금화에 충장사, 원주에 충렬사를 세워 제향하였다. 후에 아들 원유남(元裕男)이 귀하게 되어 순충보조공신의정부좌의정원창부원군(純忠補祚功臣議政府左議政原昌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
▲ 상석 전면에도 묘비명이 쓰여 있습니다. |
▲ 원호장군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묘는 장암리 아랫말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의 맨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육중한 몸집의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손에 홀(忽)을 꼭 쥔 채 시립(侍立)하고 있다. 상석의 앞면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해 놓았으며, 그 앞에 사각형의 향로석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 세워진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신은 백대리석을 사용하였는데,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쓰고 나머지 삼면에 묘표음기를 각자하였다. 그러나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팔십일년(八十一秊) 무자(戊子, 1708, 숙종 34) 시월(十月) 일립(日立)”이다. |
▲ 후측면에서 바라 본 원호장군 묘역. 앞에 보이는 봉분이 아들인 원두표 묘입니다. |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 받침인 방부의 높이를 전체적으로 좀 더 높게 하여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문은 영의정 최규서(崔奎瑞)가 찬(撰)하고 7세손 개성부유수 원인손이 서(書)하였으며 호조참판인 김시묵(金時默)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의 전후에 비문을 새겼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무자(三戊子, 1768, 영조 44) 구월(九月) 일(日)”이다. - 여주군사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아버지 원호장군 아래 위치한 원두표 묘역 전경 |
원두표(元斗杓, 1593~1664)는 현종대(顯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이며 충장공(忠壯公) 원호(元豪)의 손자이자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裕男)의 아들이다. 대학자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문인(門人)으로 광해군이 난정(亂政)을 펼치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다. |
▲ 원두표선생 묘역 후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과 묘역내 석물 모습 |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亂)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으며 이후 전라도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로 서인(西人) 가운데에서도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어 많은 활약을 하였다. 효종대왕이 재위 10년 동안 일구월심으로 주창한 북벌의 핵심 인물들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원두표이다. 원두표가 본격적으로 북벌계획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1653년(효종 4) 병조판서에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
▲ 원두표선생 묘역은 정경부인 삭녕최씨(朔寧崔氏)와 합장묘 |
원두표는 김자점(金自點)의 낙당(洛黨)과 대립되는 원당(原黨)의 영수였으므로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김자점이 죽고 난 뒤 정국을 이끌 적임자이기도 했다. 이때 효종대왕은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에 임명하는데 이는 문무를 조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써 원두표에게는 국방정책을, 이완에게는 그 실행을 맡긴 인사 조치였다. |
▲ 전방 좌우에서 바라 본 원두표선생 묘역 |
1654년 원두표의 건의로 인조 때 없어졌던 영장(營將) 제도가 부활되었다. 각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진영(鎭營)의 장관을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 하는 바, 이들은 정3품 당상직으로 8도에 46인, 강화부에 5인등 51명으로 구성되었고 지방의 군비확장사업을 담당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655년 장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에서 효종은 1만 3,000여명의 조선 군사들이 펼치는 열무식(閱武式)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현종 3) 좌의정이 되었다. |
▲ 원두표선생 묘역 아래 위치한 원두표선생 손자인 대호군 원몽은(元夢殷) 묘역 전경 |
원몽은(元夢殷, 1656~1694)은 숙종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이필(而弼)이다. 좌의정 원두표의 손자이자 용인재 원만춘의 아들이나 백부(伯父)인 황해도관찰사 원만석에게 입후(入後)되었으며, 판서 이일상(李一相)의 사위이다. 관직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며, 사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여주군사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원몽은선생 묘역은 숙부인 연안이씨와 합장묘 |
효종대왕과 원두표의 밀접한 관계는 원두표의 신도비문에 잘 나타나있다. “상께서 모든 유생들이 항상 답답하여 정사를 논할 사람이 없어 하시더니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중 오직 공만이 큰일을 책임질 만하다 하시고 마침내 군사의 일을 공에게 맡기고 도성의 보루마저 겸하여 관장토록 하시고는 때때로 혼자서 밀실에 불러 들여서 더러는 술을 권하시며 후원에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시며 사관에게 명하사 이를 기록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표범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패도를 하사하시니…” 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묘는 장암리 아랫말에 위치한 원주원씨 세장지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문인석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망주석에는 운문(雲紋)과 연주(連珠)를 조각하였으며 상석의 앞면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해 놓았다. |
▲ 원몽은선생 묘역 하단에는 영릉참봉 원유증(元有曾) 묘가 있으며, 건너편 언덕으로 원유남선생 묘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봉분 앞에 세워진 묘표는 백대리석의 비신 앞면에 단정한 대자(大字)로 원두표의 관직과 부인의 성씨를 써 놓아 합장임을 밝히고 있다. 나머지 비신의 삼면에 묘표음기를 새겨 놓았으나 표제와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묘역 아래에 당당하게 세워진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는 대학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찬(撰)하고 외예손(外裔孫)인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최중(李最中)이 서(書)하였으며 판중추부사 민진원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은 오석(烏石)을 사용하였으며 상태는 완벽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을유(三乙酉, 1765, 영조 41) 십일월(十一月) 일립(日立)”이다. - 여주군사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원호·원두표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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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빨간선은 원유남선생 묘역입니다. 지도 우측 시작 부분에서 빨간선을 따라서 올라가면 원호장군 묘역이 있습니다. |
지도 중앙의 화살표 지점에 원호장군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 3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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