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지 맙시다. 열등감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빠다킹 신부
무슨 권한으로 이런을 하는 것이오?
-강영구 신부-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대에게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향해
“너는 무슨 권한으로 빛을 내느냐? 누가 너에게 빛날 권한을 주었느냐?”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보고
“너는 무슨 권한으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느냐? 누가 너에게 반짝일 권한을 주었느냐?”
하늘에 나는 새에게
“너는 무슨 권한으로 하늘을 나느냐? 누가 너에게 자유롭게 날라 하였느냐?”
눈이 시리도록 빨간 열매를 맺은 피라칸타를 보고
“너는 무슨 권한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 누가 너에게 열매 맺으라 하였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만물이 저 마다의 자리에서 제 노릇을 바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면, 달과 별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지 않는다면, 꽃들이 피지 않고, 새가 하늘을 날지 않는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소명(召命)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 소명에 충실하는 세례자 요한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백성들은 아름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전에서는 가르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이 내려주신 소명(召命)에 충실하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보게 되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감지합니다.
당신의 소명(召命)에 충실함으로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인정받는다는 것
-박동진 신부 -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앞선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스스로 그것을 부리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많은 신부님들이 성직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 강제노역을 떠났습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몇몇이서 몰래 화장실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도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게 된 몇몇 노동사제들은 노동 안에서 때로는 이념적으로 다르고 때로는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노동사제가 다른
노동자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그의 관이 성당 문밖을 나가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기 자신들의 깃발들을 들고
서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깃발을 숙임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신앙면에서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같은 노동자로서 아파하는 동료들 곁에서 늘 함께해 준 이를
진정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권위주의로 덧씌워진 이들이 ‘권위’와 ‘권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예수님의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임숙희-
◆오늘은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한다. 마태오복음뿐 아니라 공관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모두 예수께 주어졌으며, 예수께서는 그 권위로 말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을 외국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보다는 먼저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힘 자라는 데까지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와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마치 ‘영원한 타인’처럼 견고한 성벽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차츰 이 불편한 관계의 뿌리가 ‘나는 이미 알고 있지’를 덧붙이는 그녀의 습관적인 말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이 차츰 내면을 건드리지 않은 피상적인 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험과 지식으로 인간사와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느님 신비의 영역은 모습을 감춘다. 나이 칠십이 되어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는 인간의 신비는 빛이 바래고, 인간 사이의 만남은 내 지식과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기회로 그치고 만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일했던 대제관과 원로들이 가진 지식은 그들이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을 막고 예수께서 지닌 권위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들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였다. 진정한 권위는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 내면의 성소에서 뻗어나와 몸을 비추는 햇살과 같다.(칼릴 지브란) 그런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있기만 해도,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아름다운 권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권위를 지닌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불을 지피고, 우리도 모르게 인생이 조각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종류의 권위를 지녔을 것이다. 그분의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분의 몸을 찬란하게 비추어 사람들이 더이상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권위로 충만한 분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양승국신부-
<작은 시냇물을 버리고 큰 바다를>
예수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시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하루하루 증폭되어갔습니다.
저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에게 줄서도 되는지? 그에게 투자해도 되는지? 귀찮게 굴고 성가신 말들을 서슴없이 해대니 빨리 손봐버려야 될 존재인지?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볼 일이 있습니다.
당대 천대받고 괄시 당하던 사람들,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불행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예수님의 정체(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제대로 파악한 반면, 잘 나가던 사람들, 권력의 정점에 머물러있던 사람들은 전혀 감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들과 창녀들, 갖은 불치병 환자들, 정식교육이라곤 단 한 시간도 받지 못했던 ‘가방끈이 짧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히 알아차리고 있었고, 목숨 바쳐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계층구조 안에서 최고의 정점 가까이서 살았던 당대 최고학부 출신, 공부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엘리트 출신인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백성의 원로들은 또한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백성들,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고,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어른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이자 든든한 보루 역할을 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신앙과 정신자세는 그에 합당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인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위한 마음입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겸손의 덕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방향감각을 잡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백성들 앞에 그들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을 지니고 백성들을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나 자리에 연연하면서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결국 손해 보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원로로 존재한다는 것, 세월이 흐르고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도자로 산다는 것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연구를 거듭하고, 스스로를 쇄신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심을 버리고 대의(大義)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작은 시냇물을 버리고 큰 바다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부귀영화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의 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해야만 합니다.
확실하고 명료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가르치셨다. 그곳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떠한 지위를 갖지 못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 대단히 못마땅했으며, 백성을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복음을 전하는가 하고 물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이 보내신 백성들의 스승이나 예언자로 생각하여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한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그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는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받았는가 하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서 행하는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권한을 받아서 행하는가에 대해 먼저 답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되물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고자 하셨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백성으로부터 참된 예언자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가르쳤다(요한 1,29-37; 3,26-30).
예수님의 반문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딜레마(dilemma)에 빠졌다. 요한의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차적으로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 대해 질책을 받을 것이며,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의심한 것까지도 책망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백성이 자신들을 반대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모른다고 대답하며 발뺌을 했다.
종교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보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백성이 자신들을 반대하고, 혹시라도 소요를 일으킬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서지 않고 사람 앞에만 서 있었으며, 하느님을 믿고 두려워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더 의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고 모른다고 발뺌함으로써 진리를 외면하였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며 넘어가는 모호한 자세는 참으로 위선적이며 악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고 말씀하셨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하는 불확실한 태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취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15-16)는 말씀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언제나 확실하고 명료한 태도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라고 분명히 하는 신앙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만 바라보고 하느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김상호 신부-
우리들은 오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슨 전능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가”라는 백성들 원로들의 질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하늘이 주었는가, 사람들이 주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대답을 복음서는 들려줍니다.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믿지 않는냐고 할 것이고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군중이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복음서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파라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매우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32) 또 한번은 더러운 악령더러 명령하시니 악령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라 수군대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웬 말이냐, 이분이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떠나가는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을 알아 차렸는데 그 반대로 예수님을 시샘하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래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전능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권위가 있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나를 납득시키고 그래서 내가 동의하도록 만들며 감동을 자아냅니다. 권위가 있는 말에는 강제적인 윽박을 지르던지 나를 위협하던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가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부끄럽게도 만들지만 대개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가 있는 말을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반대로 권위가 없는 말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강제와 무력과 압력과 고함과 처벌을 동원하여 억지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자발적으로는 권위가 없는 말을 따라 가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말을 우리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잔소리를 사람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존경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마더 데레사의 말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비록 조용히 그리고 나긋나긋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을 그 말씀에 빠져들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권력자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력이지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악령도 그 명령을 받들고 또 가파라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러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또 삶의 힘이 되어 준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권위 잇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를 스쳐 지나는 잔소리로 들린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복음의 원로들처럼 저 가르침은 하늘에서 온 것일까 땅에서 온 것일까 하며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할 것입니다.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귓전을 지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모르겠소!
-이인옥-
종교지도자인 수석 사제들과 정치권력자들인 원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권위있는 신학 수업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평신도가,
명망있고 권세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닌 그가,
감히 백성들을 선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저자거리라면 모를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상살이라면 모를까?
하느님나라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쉽게 말해서 '왜? 누구 맘대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냐?'는 것이다.
평신도, 목수의 아들, 예수는 반문한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모르겠소.”그들의 대답이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르겠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진실이다.
요한의 권한에 관한 문제나
예수의 권한에 관한 문제나
대답을 듣고 증거를 찾고 납득을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양을 보고서는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이 하는 일,
한마디로 그 사람의 삶에서 됨됨이가 드러난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
그분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아보았던 사람들.
그분에게서 하느님性을 느꼈던 사람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의 그리스도임을 고백했던 사람들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믿어서 그분의 사랑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대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아는 것이 많아서,
너무나 높은 자리에 있어서,
요한에게도 예수에게도 한번도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실제로 '몰랐다'.
그렇다. 우리도 그들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아주 평범한 그분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그분을.
매양 놓쳐버리고 지나쳐 버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높은 자리에
너무 고상한 자리에서만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에
낮은 곳에 계시는 그분이 眼中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분을 찾기에는 너무 들은 것이 많아서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정작 그분을 만나서는 "모르겠소"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네가 뭔데, 내 마누라에게 큰 소리냐?
-이찬홍 신부-
엄마하고 딸이 심하게 말다툼 하고 있었습니다.
말다툼은 생각 외로 오래됐고, 딸이 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을 하자, 참다못한 아빠가 와서 딸에게 한마디 합니다.
‘야, 임마! 네가 뭔데, 나도 사랑스러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내 마누라에게 큰소리치면서 그렇게 대드냐?’ 라고 말하자, 아빠 말을 들은 딸이 엄마에게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하거나,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듣고는, 어릴 적에 부모님의 모습을 연상되며, ‘제주도에도 이런 아빠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놀랐습니다.^^)
복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 3년 이라는 공생활동안 하신일을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다니시며, 병자를 고쳐주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겉 모습을 보고 대하는 분이 아니라, 그 속마음을 보고 측은해 하시는 분이기에, 배고픈 군중들을...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처럼 대해 주시며, 빵의 기적을 베풀어 배불려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활동이 거의 대부분의 삶이요, 가끔 헤로데를 ‘여우같다’고 꾸짖고,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며, 그들의 위선과 잘못을 질책하셨습니다.
곧,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비난당할 만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대부분이, 아니 거의 모든 삶이 남을 도와주며 봉사하고, 위로하며 함께 울어주고, 측은해 하며 그 마음을 들어내셨습니다.
때문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질문을 뒤집어 본다면, 이는 이런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당신이 뭔데, 무슨 권한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위로해주고, 사람들을 측은히여기며 기적을 행사하고, 죄를 사해주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요?’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의 말과 삶이 큰 잘못이기 보다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백성을 선동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자신들의 그릇된 모습이, 삶이, 죄악하나하나가 다 환하게 드러나게 되자, 이를 감추기 위해, 더 이상 부끄러움과 죄를 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하며 반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상,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곧 사람들을 위로하고, 병자를 고쳐주며 죄를 사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기적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분명 하느님께 받은 권한이 있었음에도, 이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 권한을 더욱더 드려내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과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시기에, 부끄러움에 그리고 그 치부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반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로서의 권한과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레지오 단장으로서의 권한, 사목회 임원으로서의 권한, 구역장으로서의 권한,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한은 우리가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입니다.
이에 단순하게 자신이 지니고 있으라고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이 명예욕과 권력을, 잇속만을 채우기 위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주고, 치유해 주기 위해 받은 권한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해주며,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받은 권한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권한을 잘 사용했으면 합니다.
비록, 잘 사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잘못을... 직무유기를 보여 주기 위해 자신들의 권한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뭔데?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수석 사제나 백성의 원로들처럼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이미 행동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생각으로라도 예수님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아멘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박상대신부-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주요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 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되는 이사야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12월 16일까지)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 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인자(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反問)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마태 21,23-27)
--유 광수신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오늘 복음에서 "권한"이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셨을 때에 일반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라는 분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하고 물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신다. 권한이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도 어떤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고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다. 아무 힘이 없는 동네 사람들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과 학교 선생님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장관이 하는 일과 대통령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과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떤 권한으로 가르치시고 일을 하시는 것일까?
권한을 그리스어로 엑소우시아(exousia) 라고 한다. 엑소우시아란 이 말은 하느님께 사용하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다면 어떤 힘이 들어가 있는가? 하느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치유의 능력, 깨달음의 능력,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능력에는 평화를 주는 능력이 있고, 기쁨을 주는 능력이 있다. 회개의 능력이 있고, 용서의 능력이 있고, 사랑의 능력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고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것에는 모두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워진다. "빛아 생겨라"하면 빛이 생기고 "눈을 뜨라" 하면 눈을 뜬다. 죽었던 이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일어나 걸어간다. 왜 그런가? 하느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거센 돌풍이 일고 있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고 조용히 하여라"고 하면 잠잠해지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 "더러운 영아 나가거라" 하면 더러운 영이 나간다. 그리고 "너희 죄를 용서한다."하면 죄가 사해진다.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고 놀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 먼 이를 보고 "눈을 떠라"하고 말을 하면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말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듯이 오늘 이루시는 분이시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으면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내게 이루워 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자. 그러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당신 자신의 안일함과 행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권한은 군림하는 권한이 아니라 봉사하는 권한이다. 봉사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에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인간을 치유시키시는데, 인간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셨다.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봉사받으려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인간에게 봉사하셨고 봉사 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은 모두 선을 위해 사용하셨지 악을 위해 사용하신 적이 없다. 비록 당신 생명의 위험을 당시면서도 심지어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한번도 당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고 오직 봉사하시는데 사용하셨다.
권한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듯이 하느님께 속한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때 우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능력은 발휘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제가 죄를 사해주면 죄가 사해지고, 사제가 제병을 축복하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를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가 된다.
예수님의 이 능력이 없다면 교회는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2 천 년 동안 교회가 지탱되어왔고,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구원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하느님께 속한 이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이 그리고 가르침 속에 하느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권한을 믿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지만 "모르겠소."라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떤 일들이 이루워 지는가?
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하고 듣지 못했던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고 무기력해졌던 내 영혼에 생기가 돋아 주님께 기쁨과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리게 되고 온 세상이 다시 부활한 것과 같이 새 하늘 새 땅으로 보이고 느끼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성모님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이에게 일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일을 하시더라도 믿지 않고 "모르겠습니다."라고 불성실하고 책임회피나 하는 비겁한 이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러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군림하고 강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