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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종 표준 금강경은 다시 써야 합니다.
최근에 조계종 교육원 주관으로 금강경을 번역하고, ‘조계종 표준 금강경’이란 책을 출판 하였습니다. 제가 금강경을 번역한 경험이 있어서, 훌륭한 한글금강경이 나왔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대와는 달리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이상한 문장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어떻게 종단 교육원이 주관 하였는데 이런 번역이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글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일러두기, A. 금강경 요약, B. 번역대조, C. 맺음말 순서로 쓰겠습니다.
일러두기
ㄱ. 구본은 구마라집본 금강경, 현본은 현장본 금강경, 연제역은 수미등에서 출판한 한글 금강경, 표준본은 조계종 표준 금강경을 각각 가리킵니다.
ㄴ. 法은 法相(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생각) 과 法性(대상을 인식하는 우 리의 마음. 부처. 깨달음) 으로 문맥에 따라 옮김.
ㄷ. 선정(禪定) : 앞생각과 뒷생각이 끊어져서 한 생각도 없는 그 자리를 바 라 보는 상태.
ㄹ. 숫자는 연제역 한글금강경의 문장번호를 말함. 예, 1-1은 금강경 제1장 1번 문장을 나타냄.
A. 금강경 요약
1. 금강경을 설하실 당시 부처님의 모습
1-4
구본 敷座而坐
현본 敷如常座 結跏趺坐 端身 正願住 對面念
연제역 부처님 자리에 가셔서 결가부좌하시고 선정에 드셨다.
구본에서는 자리에 앉으셨다고만 되어 있지만, 현본을 보면 금강경을 설하실 당시 부처님께서는 ‘결가부좌하시고 선정에 드신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금강경을 설하셨는지를 알아야, 다음에 나오는 如是(이와 같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수행방법에 대한 문답
2-2
구본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 其心
현본 世尊 諸有發趣菩薩乘者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연제역 세존이시여! 깨달으려는 선남자선여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 고, 어떻게 수행하여, 어떻게 항복받아야 합니까?
2-4
구본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如是降伏其心
현본 諸有發趣菩薩乘者 應如是住 如是修行 如是攝伏其心
연제역 깨달으려는 선남자선여인은 그 마음을 ‘이와 같이’ 머무르고, ‘이 와 같이’ 수행하여, ‘이와 같이’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깨달으려는 사람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는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하라’고 설하셨습니다. 1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와 같이’는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하시고 선정에 드신 모습’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들어서 네 마음을 깨달으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如是는 화엄경에도 나타납니다.
화엄경 4권 25쪽, 세주묘엄품(80권 화엄경)
汝應觀法王 그대는 법왕을 보아라
法王法如是 법왕의 법이 이와 같으니
色相無有邊 모습이 끝이 없어서
普現於世間 세간에 널리 나타나네
화엄경 16권 9쪽, 수미정상게찬품
若有若無有 있다거나 있지 않다는
彼想皆除滅 그러한 생각 모두 소멸하면
如是能見佛 이와 같이 능히 부처를 보아서
安住於實際 실상에 편안히 머무르리라
화엄경 2권 10쪽, 세주묘엄품
佛身淸淨常寂滅 부처님 몸은 청정하고 항상 고요하게 그쳐서
光明照耀徧世間 광명으로 세간을 두루 비추되
無相無行無影像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고, 그림자도 없어서
譬如空雲如是見 마치 허공의 구름처럼 이와 같이 나타나시네
佛身如是定境界 부처님 몸의 이와 같은 선정경계는
一切衆生莫能測 모든 중생이 헤아릴 수 없거늘
示彼難思方便門 저 생각하기 어려운 방편문을 보이시니
此慧光王之所悟 이것은 혜광천왕의 깨달은 바로다
3. 如是(이와 같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가. 구본 10-3 應無所住,而生其心(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나. 구본 31-4 不生法相 (대상에 대한 생각을 내지말라)
현본 31-4 如是不住法想(이와 같이 대상에 대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
다. 구본 32-3 不取於相 如如不動(생각을 내지 말고 선정에 들어서 움직이 지 말라)
라. 구본 32-4 應作如是觀(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라)
여시관(如是觀)은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설법을 시작하실 때에도 ‘선정에 들어 계신 모습’을 보이시고, 제 2장에서는 ‘이와 같이 네 마음을 수행하여, 이와 같이 항복받으라’고 하시고, 제 31장에서는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하시고, 마지막 말씀도 ‘이와 같이 보아라’고 하심으로써 금강경에서 시종일관 ‘이와 같이 선정에 들어서 네 마음을 깨달으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가~라 에서 살펴보면 ‘이와 같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비춤을 돌이켜서 보는 상태로써, 일러두기에서 말한 禪定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깨달음에 대한 정의(구본)
가. 7-2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정해진 법상이 없는 것을 아뇩다 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즉 한 생각도 없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 다는 말입니다)
無有定法에 대해서는 더 말할 여지가 있지만, 제 경지가 아니면서 제 경지인 척하는 여우종자를 치기 위해서 남겨둡니다.
나. 7-3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여래가 설한 법은 가 질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다. 즉 여래가 설한 깨달음은 가질 수도 없고 바르게 설할 수도 없고, 대상도 아니고 대상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如來所說法 ~ 非法 非非法 금강경에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깨달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 즉 깨달음이란 것은 상(相)도 아니고 상(相)이 아닌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다. 14.4-5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여래가 얻은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17.4-2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여래가 얻은 깨달음, 이 가운데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無實은 非法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無虛는 非非法에 대 한 다른 표현입니다(위 나. 7-3 참조).
이 두 문장이 무슨 뜻입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참된 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텅빔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현장본 제 7장을 보면 바르게 설할 수 없다[不可善說]고 하였습니다. 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자리를 도대체 어떻게 바르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사람은 이 깨달음을 眞空妙有(참으로 비어 있으면서, 묘하게 있음)라고도 했습니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조계종 표준 금강경을 보면 뭐라 번역해 놓은 줄 아십니까? 제 7장에서는 ‘여래께서 설한 법은 ~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다(30쪽)’라고 하고, 제 14장, 제 17장에서는 ‘여래가 얻은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고 해 놓았습니다(53쪽, 64쪽). 無實無虛는 非法非非法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런 無實無虛를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고 번역하면 되겠습니까? 왜 똑 같은 깨달음에 대한 번역이 이렇게 다릅니까?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면 깨달으려는 수행은 진실게임입니까? 꼭 무슨 코메디 대사 같아요. 이런 엉터리 번역을 조계종 표준이라고 하다니... 그리고 이런 번역본을 가지고, 인도 영축산까지 가서 거창하게 고불식까지 했다고 하니 참으로 점입가경입니다. 누구 맘대로 조계종 표준이라고 붙입니까? 조계종이 다 눈이 먼 줄 아나 본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면 선원에 묻든지. 그리고 최종결정하기 전에 최소한 선원에 회람은 돌렸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당부하신대로 수행하고 있는 단체가 선원대중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물었어야죠. 그게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행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번역하면서 약간 틀려도 괜잖은 부분이 있고, 절대로 틀려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틀린단 말입니까? 우리 스님들이 다 깨닫기 위해서 출가 했을 텐데, 깨닫기 위해서 평생을 선원에서 정진하는데, 그 깨달음을 엉터리로 정의해 놓았으니, 그 과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글금강경을 출판한 것도 시중에 이런 부류의 번역본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름 없는 선원 납자라 누가 주목이나 했겠습니까? 이름 없는 납자라는 신분이 수행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전법(轉法)하는 데는 엄청난 장애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렇게 악쓰는 게 전부이니까요. 이 글도 어떻게 불자님들에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라. 14.2-4 離一切諸相 則名諸佛(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이름 한다. 즉 모든 생각을 떠난 것이 부처라는 말입니다)
21-3 無法可說 是名說法(무법을 설하므로 법을 설한다고 말한다.
無法이란 無有定法을 말합니다. 법(法相)이 없는 것은 곧 깨달음(가. 7-2 참조)이기 때문에, 무법을 설하는 것을 법 을 설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 까?)
9-8 實無有法 名阿羅漢(법상이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 한다)
17.5-2 實無有法 名爲菩薩(법상이 없는 것을 보살이라 한다)
가 ~ 라 를 살펴보면, 깨달음이란 어떤 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상이 없는 것이 부처, 아라한, 보살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을 위와 같이 번역하면 앞뒤 문장이 모순되지도 않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B. 번역대조
번역에 차이가 나는 부분에서 중요한 문장만 간추려서 대조 했습니다.
7-1
연제역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대상이 있어서,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느냐? 어떤 대상이 있어서, 이것을 여래가 말했느 냐? (현본 佛復告具壽善現言 善現 於汝意云何 頗有少法 如來應 正等覺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頗有少法 如來應正等覺 是所說耶) 표준본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을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30쪽) (구본 須菩提 於意 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7-2
연제역 수보리가 사뢰었다.“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어떤 대상도 없어서, 여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어떤 대상도 없 어서, 이것을 여래께서 설하셨습니다”(현본 善現答言 世尊 如我解 佛所說義者 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證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少 法 是如來應正等覺所說)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느냐?”는 부처님의 질문에 수보리가 “어떤 대상도 없어서, 여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대답 합니다.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셨지만 깨달음을 얻었다는 상도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상이 있으면 어떤 대상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我空, 法空, 俱空을 모두 설명하는 훌륭한 답변입니다.
표준본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 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 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30쪽) (구본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 可說)
14.4-5
연제역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이 깨달음에는, 어떤 대상이 있는 것도 아 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라.(구본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표준본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53쪽)(구 본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17.2-3
연제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진실로 어떤 대상도 없어서,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느니라”(구본 佛言 如是 如 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표준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여래가 가 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은 법이 실제로 없다(63쪽). (구본 佛言 如是 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9-8
연제역 왜냐하면 어떤 대상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 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구본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표준본 왜냐하면 실제 아라한이라 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37쪽) (구본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17.5-2
연제역 왜냐하면 수보리야! 진실로 어떤 대상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
표준본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이라 할만한 법이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64쪽).(구본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21-3
연제역 어떤 대상도 없는 것을 설하므로 깨달음을 설한다고 말하느니라.
(구본 無法可說 是名說法)
표준본 설할 만한 법이 없는 것이므로 설법이라고 말한다(72쪽).(구본 無 法可說 是名說法)
구본을 보면 문장 흐름이 끊어지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제26장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현본을 보면 게송이 두 개 나오는데 구본은 두 번째 게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하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길을 일러 줄때에도 “아가야!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이쪽으로 가야 된다”라고 옳은 길을 분명하게 일러 줍니다. 하물며 우리 범부도 그러는데 삼계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 ~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하고 끝내셨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여래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겠죠. 현본을 보면 두 번째 게송이 나옵니다. 표준본에서는 이 게송을 금강경 본문에는 넣지 못하고 참고사항으로 수록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적어 보겠습니다.(표준본 79쪽)
마땅히 부처님을 법성으로 보라[應觀佛法性]
부처님은 법신의 몸이다[卽導師法身]
법성은 앎의 대상이 아니니[法性非所識]
그것은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다[故彼不能了]
C. 맺음말
우리가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한 글을 읽을 때, 머리가 어지러운 데가 있으면 그 문장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제대로 번역 되었다면 정신이 더욱 또렷해질 텐데, 잘못 번역되어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뜻이 통하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한글 금강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어를 번역한 것이어서 잘못 번역되면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조계종 표준 금강경을 읽어 보시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인지, 깨닫지 못하신 것인지 정신이 몽롱합니다. 조계종 표준 금강경이 어떻게 써져야 할지 판단은 불자님들께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바르다고 생각되시면 널리 알리십시오. 그래서 조계종표준 금강경이 바르게 수정되어야 합니다. 불법을 바로 세우는데 승속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으로 이름 없는 선원납자의 고독한 외침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불자님 여러분!
부처를 알고 싶습니까?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보고 있는 모든 사물의 모습,
여러분이 듣고 있는 모든 소리가,
바로 그대로 부처의 몸입니다.
부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9년 봄 매화향기 가득한 날, 지리산 자락에서 연제 삼가씀.
글쓴이 연제스님은 1991년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현봉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993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서옹대종사를 모시고 첫 안거를 시작한 이래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범어사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고 있으며, 2007년 금강경을 번역하여 한글금강경을 출판하고, 광주 불교방송에서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제스님은 금강경이나 참선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kuru001@hanmail.net 입니다. 안거기간에는 인터넷 접근이 어려워 답신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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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표준금강경의 번역은, 저대로라면 대충 느낌이나 생각함이 없이 그저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으니(절대로 칭찬이 아님 ^^), 부처님 가르침을 빙자한 밥만 축내는 기생충들이 너무 크게 종단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나 봅니다. 애고 통탄 ! 통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