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자 / 양호진
짙 푸른 산 속, 푸서릿길을 지나는 꿈을 꾸었네
생각의 칼날은 예리하여 방심하는 찰나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검붉은 선혈이 하루의 테두리 속 지런지런 넘칠듯
온종일 에움길을 걸어온 심신이 지쳐버렸다
심호흡 한껏 낡은 의자 깊숙하게 몸을 기댄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에서 고고한 향기가 그윽하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느 산맥의 실오라기 보다 좁은 물줄기 협곡을 지나
산을 몇 굽이 넘고 나뭇가지를 휘돌아
계곡의 바위틈으로 흐르고 또 흘렀네
시나브로 강에 도달하고 바다로 흘러간다
늘 바다에는 산맥의 초록 이끼 냄새가 난다
내가 기댄 저 낡은 의자 어디에서 왔을까
파리한 무늿결 깊숙한 산 속 우뚝 서 있었을까
산사의 눈 내리는 날,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곤줄박이 새소리에 흥겨워하지 않았을까
굴참나무에 떨어지는 이슬 방울의 청아한 공명 느꼈을까
하! 궁금도 하다 저 낡은 의자의 영혼이 궁금도 하다
이제 지나온 질곡의 세월 낡은 의자의 魂(혼)으로 남아
처연하게 숲 속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 당선소감
“당선 소식에 순간적으로 전율”
가끔씩 시구에 `간극’이라는 말을 써 왔다.
그 만큼 내게는 상(賞)이란 글자와는 간극이 있었다. 암울한 그림자와 맞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수없이 걸었다.
비사칠 것 없이 태양의 저켠에 서 있는 굴참나무의 삶이었다. 표변할 것 같은 시간의 알갱이들을 촘촘한 그물망에 증류를 시켰다. 아울러 가을의 색감을 눈과 귀와 코에 집중시켰다.
서늘하면서 쏴 한 느낌의 추상(秋霜)을 꾀꾀로 즐기곤 했다.
오래간만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여명(黎明)의 시간이 여울처럼 흐를 것이다. 이따금 좋아하는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생에 있어 축복이리라.
시(詩)를 쓴다는 것은 여싯여싯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침묵이리라.
오늘은 감청 빛 밤하늘을 보며 늑골(肋骨)을 켜켜이 치유하던 감성의 자락을 흔들고 싶다. 자연의 소담스러운 느낌을 바람에 흩날리며 다가설 것이다.
오전에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전화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내 몸에서 전율 같은 것들이 흐르며, 귓속을 스치는 찰나에 나의 평형감각을 지배하던 달팽이관이 팽이처럼 돌며 어지럼증을 선사했다.
천공해활의 풍광이 절취선을 넘어 내게로 왔다. 기쁨이 배가되어 누구에게 서분서분하는 마음, 이제 겨울의 초입이다. 최근에는 거의 여행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겨울 춘천의 소양호를 휘감던 물안개가 무척이나 그립다.
아울러 당선의 영예를 준 심사위원에게 감사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틀수한 심성의 아내와 내년 고3, 고1이 될 창수와 수영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양호진 시인
△1962년 부산 출생
△영남 문인회 회원
△‘공저’ 칼과 풀의 조화
△현 (주)ACTS 근무
■ 심사평
의자와 나를 동일시 ‘풍부한 상상력’
예년에 비하여 많은 응모작(453편)이 쇄도하여 시문학의 열기가 뜨거움을 느꼈다. 시대가 어렵고 힘들수록 치열한 시문학으로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아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은 김봉래의 ‘빨래가 있는 풍경’과 문지수의 ‘영흥도’, 그리고 박종인의 ‘장롱을 열어 놓고’와 양호진의 ‘낡은 의자’란 작품이다.
김봉래의 ‘빨래가 있는 풍경’이란 작품은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생명의 가치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시의 종결어미가 단조로웠다. 문지수의 ‘영흥도’란 작품은 일관성 있게 끌어내고 있으나 의지력이 선명하고 밀도 있게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박종인의 ‘장롱을 열어 놓고’는 한편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를 읽는 것처럼 느꼈다. 역동적인 기운이 엿보여야 할 신인들에게 또한 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양호진의 ‘낡은 의자’란 작품은 왼 종일 걸어온 심신이 지쳐버렸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에서 또 하나의 자기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낡은 의자처럼 다 늙고 퇴색될지도 모른다. ‘내가 기댄 저 낡은 의자 어디서 왔을까/ 파리한 무늬결 어느 깊숙한 산 속 우뚝 서 있었을까 / 산사의 눈 내리는 날,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 곤줄박이 새소리에 흥겨워하지 않았을까 / 굴참나무 떨어지는 이슬방울의 청아한 공명 느꼈을까.’ 질곡의 세월 속에서 낡은 의자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동일시하고 사물의 매개를 통해 삶을 재음미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등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제부터 절제된 자신의 목소리 찾기에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고, 낙선자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문학이란 어쩌면 좌절이란 거친 토양에서 탄탄히 뿌리내려야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정연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