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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오후 3시,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개최됩니다.
많이 참석하여 좋은 시간,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이덕일 강연 내용>
식민사관, 21세기 대한민국을 재점령하다.
-들어가는 글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식민사관이 이제는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자가발전한 논리에 불과하다. 식민사관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조선총독부 사관이다. 그런데 이런 식민사관은 해체되기는커녕 21세기 대한민국을 재점령했다. 21세기 식민사관의 주요 논리와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고대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라면서 중국 동북공정을 추종한다.
②독도는 한국 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③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4세기에도 신라와 백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논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일왕의 전쟁 책임 면책론도 살펴보겠다.
①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
동북아역사지도라는 것이 있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서강대 윤경남 교수팀에 의뢰해서 대한민국 국민세금 47억원을 들여서 만든 지도다. 그런데 이 지도는 중국 동북공정의 지리학적 기반이 되고 있는 담기양(譚其驤)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을 그대로 표절한 지도다.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동북공정을 담은 중국역사지도집을 추종하는 지도를 만든 것이다. 동북아역사지도에는 대한민국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을 그대로 추종했기 때문이다. 이 지도집에서 중국의 삼국시대, 즉 위·촉·오(魏蜀吳:221~265) 시대를 그린 도엽을 보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경기도까지 차지했다고 그려놓고 있다.
이 역시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 제3권 위(魏)나라 유주(幽州)편을 표절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지도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지금의 경기도 지역까지 중국사의 강역이 된다.
5세기 초 고구려의 팽창(391~474)
「5세기 초 고구려의 팽창」이란 이 도엽은 고구려의 전성기 때 강역을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는 ‘고구려 모본왕 2년(서기 49) 한(漢)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지금의 하북성 및 산서성 일대)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 태조대왕 3년(서기 55)에 “태조대왕이 요서(遼西)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나라 군사를 방비했다”는 기사도 있다. 이런 기사들에 따르면 고구려 강역은 당연히 지금의 요하 서쪽까지 확장되어야 하지만 이런 명백한 사료를 부인하면서 고구려 강역은 요하 동쪽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지도는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선을 요동반도 및 한반도 북부를 세로로 잘라서 형성된 것으로 그려놓았다. 고대 국가의 국경선은 산이나 강으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국경선은 강과 산을 잘라서 세로로 형성되었다. 이 경우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선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장백산맥과 천산산맥을 세로로 자르고, 북쪽의 혼하, 압록강, 청천강 들을 세로로 잘라 형성되어야 한다. 산맥과 강을 세로로 잘라서 국경이 형성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역사지도가 이런 ‘세로 국경선’을 그려놓은 것은 한반도 북부를 중국의 식민지로 두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다 장악했다면 식민사학에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한사군(漢四郡) 등의 중국 식민지들과 중국 사이의 교통로가 단절되므로 억지로 교통로를 만들기 위해서 두 나라의 국경선을 세로로 그린 것이다.
이는 만주를 영구히 차지하는 것은 물론 북한 유사시에 북한 강역까지 차지하려는 의도로 그린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가능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경선이다.
동북아역사지도의 문제점은 이뿐만 아니다.
②독도는 대한민국 강역이 아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6세기 신라의 팽창에서 독도를 누락시켰다. 울릉도만 표기하고 독도는 빼놓았다. 실수라고 변명하지만 실수가 아니다.
신라 이후 고려·조선·대한제국을 그린 도엽들에서는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의 지도를 그리면서 동해상에 검은 박스를 그리고 그 안에 울릉도를 표기했지만 독도는 일관되게 누락되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우산국이 통치한 범위에 대해서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기사를 인용하여 울릉도가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를 포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19세기 초의 인식을 끌고 온다는 점에서 잘못이다…그러나 문헌적 인식에 갇히면서 우산 명칭의 혼란과 죽도로의 이전과정에서 독도는 사라졌다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의 편입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영토로 불쑥 나타나게 된다(배 모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울릉도·독도 명칭 변화를 통해서 본 독도 인식의 변천」)”
Ⓑ“독도문제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모든 문제는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사같이 일목요연하고 간단명료해 보인다. 마치 신라의 우산국 정벌 이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말은 ‘주장’이 아니라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독도가 우리 것일까? 독도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은 명백한 ‘진실’을 왜곡하고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의 음흉한 음모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입관을 버리고 찬찬히 독도 자료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곧 독도에 대한 ‘진실’이 그렇게 명명백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독도에 대한 ‘진실’이 얼마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선입관에 결박되어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배 모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독도문제’를 보는 비판적 시각을 위하여」, 『문화과학』 42, 2005)”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소속 배모 연구위원이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위원은 바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동북아역사지도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를 일관되게 누락시킨 것은 실수가 아니다. 의도적이다.
삼국사기 지증왕 13년(512)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우산국 기사를 읽어보면 곧 신라의 우산국 정벌로 독도가 우리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출발점이 그리 명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은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이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는데, 여기에서 우산국은 울릉도일 뿐 어디에도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포괄했다는 이야기는 없다(배 모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독도문제’를 보는 비판적 시각을 위하여」, 『문화과학』 42, 2005)」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도서이다. 울릉도에서는 87.4km 떨어져 있는 반면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섬에서는 157.5km 떨어져 있다.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아니면 오키섬의 부속도서라는 말인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우산과 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서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울진현)”고 말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독도가 보이지만 오키섬에서는 아무리 날씨가 청명해도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 그 중에서도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이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공개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고 지금도 호시탐탐 한국을 노리고 있는 일본 극우파에서 한국 내부의 이런 상황을 모를 것 같은가? 그는 또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의 우산국 기사나 『고려사』 지리지 기사에서 미루어 보아 우산국은 울릉도만을 포괄하며, ‘우산’은 원래 울릉도의 명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배 모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울릉도·독도 명칭 변화를 통해서 본 독도 인식의 변천」)”
독도는 우산국의 강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독도는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만드는 동북아역사지도에서 사라졌다. 의도적으로. 그러나 다름 아닌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서 작성한 태정관 지령은 독도가 조선 강역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당시 총리실격인 태정관에 독도가 어느 나라 소유냐고 공식적으로 물었다. 「태정관 지령」은 “지령안: 질의한 죽도 및 일도(울릉도와 독도)건은 본방(일본)과 관계 없다는 뜻을 명심할 것”이라고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강역이 아니라고 내무성에 명확하게 지시했다. 「태정관 지령」은 1987년 쿄토대의 호리 가즈오 교수에 의해 최초로 공개되었다. 국내의 식민사학자들은 이 태정관 지령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③ 임나일본부 21세기 한반도 남부 전역을 재점령하다
광복 후에도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이 역사학계의 주류로 행세하다 보니 그간 금기로 여겨져 왔던 임나일본부까지 다시 등장했다. 그것도 더욱 악화된 상태로. 식민사학의 원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임나일본부의 강역을 경상남도 김해 일대로 한정하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가야’라는 논리로 임나를 가야로 등치시키고, 그 강역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시켰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의 극우파 역사학자 미즈노 유(水野祐)에게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현구 씨가 ‘가야=임나’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 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금기였던 임나일본부가 다시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임나=가야’의 강역을 전라도까지 확대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평생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싸웠던 최재석 교수는 김현구 씨에 대해, “그의 학위논문을 읽어보면 바로 알게 되겠지만 한 마디로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최재석, 역경의 행운, 244쪽)”라고 비판했다. 최재석 교수는 또 “김현구 교수의 역사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그의 역사의식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니 심히 염려스럽다(최재석, 역경의 행운, 249쪽)”라고 우려하면서, “(김현구 교수 때문에)한일 두 나라 관계에 대한 역사 인식이 왜곡되어 금후의 한일관계사 또는 한국의 연구 발전이 저해되지 않을까 염려된다(최재석, 역경의 행운, 248쪽)”라고 우려했는데,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김현구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자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국은 모두 일본에 대해서 군사원조를 요청하거나 적어도 상대국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삼국 중에서 어느 나라를 파트너로 삼을 것인가 하는 캐스팅 보드는 일본이 쥐고 있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9쪽)”
김현구 씨에 의하면 신라와 백제는 물론 대륙의 강국 고구려까지도 야마토 정권에 군사원조를 간청했다는 것이다. 야마토 정권은 슈퍼강대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지원을 간청한 세 나라 중에서 야마토 정권이 선택한 것은 백제라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또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또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것은 군사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42~143쪽)”
백제는 야마토 정권에 일관되게 군사원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할 뿐 삼국사기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今西龍), 스에마쓰 야스카즈처럼 만철(滿鐵:만주철도)이나 조선총독부에 소속되었던 학자들은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 삼국사기를 거짓으로 모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창했던 것이다. 김현구 씨는 더 나아가 백제에서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군사를 지원 받기 위해 왕자와 공주들을 상납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웅략기(일본서기)」 5년(461)조에 의하면 왕녀들 대신으로 파견되기 시작한 곤지도 도일 목적이 천황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의다랑(意多郞)이나 마나군(麻那君)·사아군(斯我君:모두 백제 왕자들임) 등은 곤지 파견의 연장선상에서 도일하고 있다. 따라서 의다랑이나 마나군·사아군 등의 파견도 천황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왕족들의 파견이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였다면 왕녀들의 파견 목적과 일치하게 된다(김현구,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왕실외교」, 『고대 한일관계사의 제문제』, 169쪽)”
백제에서 천황을 섬기기 위해 왕자와 공주들을 일본에 보냈다는 것이다. 백제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뜻이다. 김현구 씨는 당초 백제는 왕녀들만 보내서 천황을 섬기게 했는데, 그 왕녀가 일왕에게 무례해서 사과의 뜻으로 왕자들을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웅략기」 5년(461)조에는 옛날에는 여(女)를 보냈는데 무례하여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므로 동생인 곤지, 즉 남자를 보내서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직지왕이 누이동생인 신제도원을 파견한 이래 461년 곤지(昆支)를 파견할 때까지는 백제의 왕녀들이 왜에 파견되는 관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제도원·적계여랑·지진원 등이 그 왕녀들에 해당되는 것이다(김현구,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왕실외교」, 『고대 한일관계사의 제문제』, 167~168쪽)”
백제에서 여(女), 즉 여자왕녀를 보냈는데 무례하여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내용에 대해 김현구 씨는 「천황이 “(백제 왕녀)지진원을 취하려 했는데 이시까와노따떼(石川楯)와 관계를 맺었으므로 화형에 처하였다”」는 일본서기 「유우랴꾸천황 2년〔457〕 7월조)」를 인용했다. 일왕 웅략(雄略)이 백제에서 보낸 왕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불태워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백제에서 더욱 사죄하는 뜻에서 왕녀들은 물론 왕자들까지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진원사건이 발생하자 백제에서는 461년 왕녀 대신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필두로 의다랑, 마나군, 사아군 등 백제 왕족들을 보내기 시작한다……야마또정권은 직지가 귀국하기에 앞서 그를 일본 여인과 혼인을 맺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동성왕이나 무령왕의 부인도 일본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백제 왕가에도 일본 천황가의 피가 수혈되기 시작한 셈이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86~188쪽)」
야마토 정권이 백제 공주를 불에 태워죽였음에도 백제는 이에 항의하기는커녕 왕자를 보내는 것으로 백배사죄했다는 것이다. 김현구 씨의 논리에 따르면 백제는 야마토의 완전한 식민지였다. 백제는 야마토정권의 군사지원을 받기 위해서 그만큼 처절하게 노력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또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또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것은 군사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42~143쪽)”
그런데 허구에 가득 찬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도 야마토에서 백제에 보냈다는 군사의 숫자는 500명에서 1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신라, 백제 양국이 각각 수만 명씩의 군사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500~1000명은 아무 변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자 김현구 씨는 야마토에서 온 군사를 지금의 주한미군에 비교하고 있다.
「당시 백제는 야마또정권으로부터 지원받은 군사를 임나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휘관으로는 왜계 백제관료 등을 배치하고 있었다. 신라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마치 오늘날 미군을 남북이 대치하는 휴전선에 배치하고 있는 것처럼.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신라와의 접경인 임나지역에 야마또정권으로부터 제공받은 군대나 왜계 지휘관을 배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51쪽)」
야마토정권에서 온 왜군을 지금의 주한미군과 비교하는 것이다. 김현구 씨의 머릿속에서 야마토에서 온 왜군은 자체 화력이 막강할 뿐만 아니라 유사시 본국에서 막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현대의 슈퍼파워 미군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한미군을 미국 장성이 지휘하고 있듯이 야마토에서 온 왜군을 야마토에서 온 일본인들이 직접 지휘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임나지역에 배치된 왜계 백제관료들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대에 배치되어 지휘관으로서 본국(야마토정권)에서 보낸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라의 침입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명시한 대목이 있다. 『일본서기』 554년 12월 기록에서 “이에 천황께서 우찌노오미를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다.(…) 신라를 공격하러 보냈다…”라는 내용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일본에서 온 원군(援軍)을 동방령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가 지휘하고 있는 모습에서 왜의 역할이 좀 더 분명해짐을 알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50~151쪽)」
야마토에서 온 왜군을 야마토에서 온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가 직접 지휘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554년에 왜군이 신라를 공격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소설이다. 그러자 김현구 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적지 않은 야마또정권 호족의 자제들이 백제에 와서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백제는 남방에서는 가야지역을 둘러싸고 신라와 각축을 벌이고 있었지만 북방에서는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가야지역에서 신라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당시 백제의 관료로 일하고 있던 야마또정권 호족 자제들 중 일부를 임나지역에 배치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94쪽)”
당시 백제는 남방에서는 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적국이었지만 북방에서는 그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에 맞서는 동맹국이었다는 것이다. 한반도 남부라는 그리 크지 않은 지역에서 백제는 신라와 대치하는 적국이기도 하고, 그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와 대치하는 동맹국이었다는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라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왜군을 임나지역에 보냈다는 것이다. 고작 이런 역할을 위해서 왕녀를 불에 태워죽였는데도 백배사회하면서 왕자를 보내 일왕을 섬기게 했다는 논리다.
더 나아가서 야마토에서 온 일본인들이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직접 지배했다고 쓰고 있다. 임나가 전라도 지역까지 차지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가 임나의 범위를 전라도까지 확대하고,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이를 받아서 조금 더 확대시킨 것을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지방장관으로 있던 차리(영산강 유역)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과 중복된다. 다시 말하면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왜계 백제관료가 지방장관으로 배치된 지역 중에서 백제조정이 직접 장악하고 있던 지역이나 중앙에서 군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던 지역이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산강 동안 차리의 지방장관으로 있던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야말로 ‘백제중추의 왕통이 아니라 직접 왜와 교류 관계가 있던 지방수장’이라는 성격에 맞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92쪽)」
야마토에서 온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영산강 유역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즉 임나가 경상남도 일부만 아니라 전라도까지 걸쳐 있었다는 것이고, 왜인들이 영산강 유역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것이다. 김현구 씨는 야마토와 임나 중간에 백제를 끼워넣는 장난으로 면피하고 있다. 야마토는 백제의 왕녀를 불에 태워죽여도 찍소리 못하고 백배사죄하면서 왕자를 보내는 식민지 백제를 통해서 임나를 지배했다.
“임나문제에 대해서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하는 예는 4회나 확인된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문제』, 226쪽)”
김현구 씨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지 않고 백제를 통해서 임나에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야마토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야마토정권의 명령을 임나에 전달해야 했다.
김현구 씨가 그린 ‘가야=임나’는 일본 극우파 후쇼사 교과서의 ‘가라=임나’와 같다. 후쇼의 한자는 부상(扶桑)으로서 ‘동해의 해 뜨는 곳’을 뜻한다. 그 옆에 「광개토대왕비문」을 배치한 것도 같은 것은 김현구 씨의 역사관이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과 같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400년 광개토대왕이 그 배후를 급히 추격해서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까지 이르렀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그 다음 구절이 “성은 곧 귀순하고 복종했다”는 것이어서 이 비문에 따라도 임나는 서기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에 멸망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현구 씨는 그 이후에도 임나가 전라도까지 차지하면서 더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왕에 대한 찬양
야마토 정권은 가야계와 백제계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수립한 정권이다. 서기 4세기 무렵에는 가야계 유물이 주로 출토되고 5세기 무렵에는 백제계 유물이 주로 출토되는 사실로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김현구 씨는 거꾸로 백제 국왕들이 일왕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제왕이 비다쯔(민달)천황의 손자라면 백제왕들이 일본천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되지만 일본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면(文面)만으로는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이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들이었던 모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6쪽)”
김현구 씨는 시청자들이 일본 천황가를 백제인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일왕가에 대한 이런 맹목적 추종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간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 면죄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미국은 한 일본 연구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천황을 이용하여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공산혁명을 막고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極東)의 반공 보루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만들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127쪽)”
일왕 히로히도의 역할 때문에 700만 일본군이 저항 없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일본 본토까지 수시로 공습 당하는 일본은 이미 저항할 기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를 계기로 자신도 죽을 것이 두려워서 항복한 것을 가지고 마치 평화의 사도처럼 그려놓았다. 김현구 씨는 이봉창 의사라는 이름을 들어봤는지조차 궁금하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김현구가 평화의 사도처럼 묘사한 일왕 히로히도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탄을 던졌다가 히로히도가 다치지도 않았음에도 그해 10월 10일 사형당했다. 이봉창 의사는 상해의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인 이봉창”이라고 쓰고 일본으로 가서 적국의 수괴에게 폭탄을 던졌다가 사형당했다. 그런 히로히도가 김현구에게는 적국의 수괴가 아니라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하게 한 평화의 사도인양 그리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의 시각 그대로이다.
-서부지검과 서울 고검의 상반된 처사
김현구 씨는 필자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가지고 형법상 ‘출판문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에 대해 서울 서부지방검찰청(검사 이지윤)은 “피의자(이덕일)은 증거 불충분 하여 혐의 없다”고 불기소를 결정했다. 다음은 불기소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학자의 연구결과 및 견해를 다른 학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나름대로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함에 있어 학문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신중하여야 할 필요가 있고, 피의자(이덕일)의 주장은 고소인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분석 견해 및 재해석 결과를 표명한 것으로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여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불기소결정서」)”
서울서부지검의 불기소결정은 ‘학문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의 법 감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김현구 씨의 역사관은 유럽 같으면 형사 처벌당했을 일이다. 결국 히틀러는 스스로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독일군을 저항없이 항복하게 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김현구 씨가 서울 고검에 항고하자 서울 고검(부장 검사 임무영)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필자를 기소했다. 서울고검에서 필자를 불러 조사한 것은 7월 1일인데 그 이전인 6월 26일에 이미 기소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앞으로 필자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고검의 공소장에는 “(김현구 씨가)일본서기의 기술을 믿는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고”라고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를 부정했다고 적었다. 과연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를 부정했는지 김현구 씨의 글로 살펴보자.
“따라서 한국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보다는 한반도 남부지배라는 본질을 담고 있는 일본 학계의 이른바 ‘남선(南鮮)경영론’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남선경영론’은 ‘남조선경영론’을 줄인 말로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남조선경영론’을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한반도 남부경영론’ 정도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1~22쪽)”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보다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남선경영론’이 더 타당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남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경영론’으로 부르겠다는 것이 김현구 씨의 논리다. 그런데 고검의 공소장은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고’라고 주장했다면서 필자를 형사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고검에서 작성한 공소장에는 김현구 씨가 “백제의 왕자가 현 천황가의 시조가 되는 등”이라고 썼다고 했는데, 이는 김현구 씨의 논리와 정 반대의 이야기를 검사가 자의로 써 놓은 것이다. 김현구 씨는 “(백제의) 왕녀와 왕족 파견의 효시라고 할 있는 (백제) 왕자 전지의 파견(397)(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4쪽)”이라고 백제 왕족이 일본에 파견된 것은 서기 397년이라고 썼다. 김현구 씨는 그 후 “일본은 백제 왕족들을 귀국시키면서 일본의 황녀들과 결혼시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1쪽)”라면서 백제가 왕자와 왕녀들을 야마토에 인질로 보낸 것을 계기로 두 왕실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고 썼지 ‘백제의 왕자가 현 천황가의 시조가 된다’는 글은 전혀 쓰지 않았다. 김현구 씨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왕이 비다쯔(민달)천황의 손자라면 백제왕들이 일본천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되지만 일본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그 반대의 논리를 제기했다. 이는 고검 검사가 자의적으로 김현구 씨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창작한 내용이지 김현구 씨의 역사관이나 실제 서술과는 전혀 배치되는 내용이다.
민사도 아닌 형사사건의 공소장을 저렇게 써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검찰은 이런 논리로 김현구 씨 역사관이 정당한 것이고, 필자가 그런 역사관을 비판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재판에서 주장해야 한다. 필자는 20여년 가까이 수많은 시간과 사재를 털어가면서 일제 식민사관에 맞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도 아닌 대한민국 법정의 피고석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광복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는가?
평생을 일제 식민사관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맞서 싸웠던 구순의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 안의 식민사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견해」에서 “김현구의 학위논문은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핵심내용입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현구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인 미즈노는 실존인물도 아닌 일본의 신공황후가 한국을 점령했고, 서기 1세기부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역사왜곡을 한 인물입니다. 김현구의 논문은 이런 미즈노의 왜곡된 역사관을 옮긴데 불과합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예리한 비판이 제기되면 갖은 수단을 써서 이를 덮어왔습니다. 이는 김현구 개인의 문제이지만 황국사관의 속성에서 배태된 행태이기도 합니다(최재석, 「‘우리 안의 식민사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견해」)”
서울 고검 또한 대한민국의 국가기구이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의 법 감정에 충실했다면 김현구 씨의 역사관을 처벌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서부지검처럼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잣대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갈 길이 얼마나 멀며 얼마나 많은 개혁과제들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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