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대신 얻어맞은 스님 아주비구(鵝珠비구)
옛날에 한 스님이 보석을 다듬는 집에 탁발을 갔습니다.
마침 주인은 나라의 부탁으로 값진 보석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스님께 보시를 하려고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집에서 기르는 거위가 돌아다니다 보석을 꿀꺽 삼켜 버렸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니 보석이 있을 턱이 있습니까.
주인은 당연히 스님이 가져 갔으리라, 의심할 밖에..
스님을 기둥에 묶고 배은 망덕한 스님을 문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내일 아침이면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몽둥이 찜질을 하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내놓으라 닥달을 당하였습니다.
당연히 스님은 하룻밤을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거위가 배설을 하니 찾던 보석이 나왔습니다.
그때 주인은 몹시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어 보았습니다.
"왜 진작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거위가 삼켰다고 하면 급한 마음에 당장 거위를 죽일 것 아닌가?"
주인은 스님의 자비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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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성공을 부르는 ‘승자의 언어’
일본의 고승 백은선사가 사는 집 근처에 한 부부가 두부 가게를 열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점점 배가 불러왔다.
부부가 딸을 다그치자 얼떨결에 ‘백은’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백은선사를 찾아가 따졌다.
그들의 욕설까지 참고 듣고 있던 백은선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단 한 마디뿐이었다.
부부는 고승으로 알려져 있는 백은선사가 선선히 이렇게 대답하자 아기를 데려다 주었다.
선사는 성심성의껏 아기를 돌봤다.
“불가에 입적한 스님이 처녀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낳았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백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태연히 이웃집으로 아기에게 먹일 젖을 얻으러 다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선사는 태연하기만 했다.
1년 뒤 아기 엄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아기의 아버지는 어시장에서 일하는 청년”이라고 고백했다.
백은선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가볍게 한 마디만 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아이를 돌려줬다.
백은선사는 18세기 당대 일본의 최고 고승으로 마음의 안정이 최고의 건강 비법이라는 ‘내관법’으로도 유명하다.
마음을 고요하고 올바르고 안정되게 유지하면 병도 쉽게 치유할 수 있는 반면
가벼운 병도 중병으로 생각하면 치유할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가 파계승의 처지에 내몰렸을 때도 “아, 그렇습니까”라는 한 마디로 가볍게 대응한 것도
어쩌면 ‘내관법’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어렵게 생각하면 더 어려워지고
쉽게 생각하면 더 쉽게 풀린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해를 사거나 질책을 당할 때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거나 반격을 가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더 확대되기 십상이다.
이때 백은선사처럼 마음의 도량을 넓혀 그러한 오해나 질책을 아예 거들떠보지 말고
보고도 못 본 체 그냥 넘기는 것도 때로는 상책이 될 수 있다.
“갈등상황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계획을 즉시 포기하라.” 이게 승자의 길이라는 것이다.
미국에 아자로프라는 작가가 있었다. 부지런히 노력해 젊은 시절에 화려한 성과를 거뒀다.
그의 말년은 순탄하지 못했다. 마틴이라는 보잘것없는 문인이 아자로프에게 의도적으로 맞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자로프가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대응하면서부터 후반부 인생이 전혀 딴판으로 변하게 됐다.
마틴은 자신의 몸값을 부풀려 명예와 이익을 한꺼번에 얻으려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했다.
마틴은 신문에 저급한 수준의 토막 기사를 지속적으로 실으면서 아자로프에게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었다.
이른바 ‘큰 상대와 싸움을 걸어라’는 전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얻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틴 같은 소인배에 아자로프는 이성을 잃은 채 신문 지상에서 마틴과 수년간 흙탕물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마틴은 유명 인사인 아자로프와의 논쟁 덕분에 명성과 이득을 얻었다. 반면 아자로프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인생을 낭비했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좌절감 속에서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백은선사와 아자로프의 에피소드는 즈카오가 쓴 ‘인생지략’에 소개된 내용이다.
아자로프는 백은선사처럼 “아,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대응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때로는 오해나 질책을 아예 거들떠보지 말고 보고도 못 본 체 그냥 넘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사소한 시비 논쟁에는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으며
시간이 우리를 대신해 증명해 줄 것이라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더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사람들은 남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꾸준한 욕구,
다시 말해 우리는 하고많은 소통 유형 중에서도 유독 남의 험담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험담꾼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로 정정당당하고 옳고 그름이 명확하며
남이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백은선사는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기에 두려울 게 없었고
그런 당당한 심적 태도가 언어로 발현됐던 것이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http://magazine.hankyung.com 발췌)>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
☞ [선우회 법문] 보왕삼매론의 메시지 → 참으시와요 ~ http://cafe.daum.net/santam/Lq9Q/15
첫댓글 가르침 받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 보약으로 잘 쓰세요.. 그리고 늘 평안하시고요.. 옴 산띠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옴 샨띠 - 마음공부를 하는 구도자들 사이에서 많이 하는 축복의 인사. '옴 샨띠'(Om, S'aanti)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이고, '옴 산띠'(Om, Santi)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시던 빠알리어. '옴'은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단어인데, 대승불교, 그 가운데서도 티벳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고, '우주의 어머니의 소리'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라고 함. "옴 산띠'는 '평화와 함께' 또는 '평화를 기원합니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옴 산띠 _()_
어느 정치인 애를 낳았다는 루머가 있읍니다. 이때에도 사소한 풍문에 윗글처럼 함이 ( 혹시 노파심에 ) 옳을까요 ?
얼마후 만약 악영향이 있다면 그때도 백은선사처럼 내관법으로 될수 있을까요 ? 현실과 괴리감의 느낌이 큽니다.
예,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함구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 상황을 볼 때, 만약 사실대로 바로 말했다면 거위의 생명이 위험했거나 처녀와 남자의 안위가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상황을 감안할 때, 무조건적인 함구보다는 '지혜로운 대응'이라는 메시지가 강한 거 같구요, 반면에 아자로프 경우엔 지나치다고 할까요, 어리석다고 할까요.. 하여간에 본문에서, '수년간 흙탕물 논쟁'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어리석고 지나친 대응이 문제였다고 이해됩니다. 또 앞의 두 스님의 경우엔 자신의 이익을 생각지 않고 오직 상대방, 그것이 동물일지라도 다른 존재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불리는 고사하고...
자신의 수모와 고통과 위험까지 감수하는 이타적(利他的)인 마음이 크게 빛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은, 우리는 늘 판단의 기준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익과 안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이타와 이기(利己).. 그 방향이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성인들 가르침은 한결같이, 진정한 행복은 이기적인 길에 있지 아니하고, 이타적인 길에 있다는 것이며 그런 길을 실천하신 분들을 우리는 '거룩하다, 성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모든 이익과 명예, 권력을 초월하여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였으며, 이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임을 보이십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초연한 입장이 아닌 현실에서 굳이 이익과 명예 권력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아자로프처럼 어리석은 처신은 하지 않는게 좋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로 들어주신 상황에서는.. 그 상황에 적절한 '지혜로운 선택'이 있을 수 있겠지요. 어차피 자기의 명예를 도모하는 길이므로 수행자같은 선택은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진흙탕 논쟁'으로 표현될 정도는 아닌, 보다 대승적인 견지에서 보다 대인(大人)다운 큰 그릇임을 보여주는 지혜로운 처신을 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참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