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겁인(空劫人) 백봉 김기추 거사 행장(行狀)
1908년 2월 2일(음)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난 백봉 거사는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끊이질 않자 만주로 망명, 동만산업개발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됐다.
당시 만주는 일제의 잔학이 극에 이른 곳이었다. 백봉 거사가 살아생전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과 폭력으로 반죽음을 만들거나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잔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 전력이 있던 백봉 거사가 만주의 감옥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당시 불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방의 벽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쓰고 염송했다. 그 때문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불자였던 일본 간수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맞이한 해방.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사장을 맡았던 그는 극빈자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다 또다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백봉거사가 수행에 힘 쓴 것은 1963년 6월, 그의 나이 56세 때다. 백봉 거사는 충남 심우사 주지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스님으로부터 ‘무자(無字)’ 화두를 받고 용맹정진을 하던 그는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이때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 거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 거사는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그 순간 백봉 거사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그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텅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忽聞鐘聲何處來
廖廖長天是吾家
一口呑盡三千界
水水山山各自明
백봉 거사는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57세에 화두를 잡은 이래로 1년도 되지 않아 ‘확철대오’를 함으로서 거사는 육조혜능 선사처럼 돈오(頓悟)를 체현한 것이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 거사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 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 거사는 <금강경> 한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혜능 대사가 행자인 거사의 신분으로 깨달았듯이 백봉 거사 역시 재가자의 신분으로 선종(禪宗)의 맥을 충실히 잇는 전승자가 된 셈이다.
백봉 거사가 대오(大悟)했다는 소식은 승가에까지 전해졌다. ‘욕쟁이 도인’으로 유명한 춘성 선사는 백봉을 가리켜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 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 거사’라고 불렀고, 탄허 스님은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 거사를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앞장섰다. 이때 거사에게 출가를 권유한 청담 등의 스님과 재가 설법을 권유한 혜암 등의 스님으로 갈렸는데, 백봉 거사는 “불법(佛法)이 머리를 깎고 안 깎고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재가에서 법을 펴기로 하고, 이후 재가수행단체인 보림회를 결성해 85년 열반에 들 때까지 쉼 없는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함으로써 거사로서 한국불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그는 1985년 8월 2일 지리산 산청 보림선원에서 여름 철야정진 해제 법어를 마치고 당신의 방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모습놀이’를 거두고 적멸에 들었다. 백봉 거사가 하얀 천 위에 써서 선원 입구 대나무 장대 위에 걸어둔 당신의 게송 ‘최초구(最初句)’가 열반송이 된 셈이다.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구절이 이에 오니
허수아비 땅 밟을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無邊虛空一句來
案山踏地大圓鏡
於此莫問知見解
二三六而三三九
첫댓글 백봉거사님의 극락왕생과 성불을 축원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