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요.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누었거든요.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누운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싸워서 힘들게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법칙인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신부님의 영성지도 방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성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세요.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합니다. 당시 저는 신부님의 이 모습을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말로 지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들어만 주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을 계속 낮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말하기보다는 들어주세요.
빠다킹신부
운전을 하면서
-조명연 신부-
운전을 하며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그래서 속도를 내는 차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규정 속도로만
운전했지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속도위반 딱지를 하나 받았거든요.
저를 추월하는 수많은 차들…. 괜히 저만 어리석게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 같았고,
다른 차들이 저를 초보로 보지는 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듭니다.
사실 규정 속도로 운전을 하는 것과 과속을 하면서 운전하는 것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단지 몇 분의 차이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남이 자기보다 앞에 있는 것을 못 참는
이기심으로 인해서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또한 남들에게 앞자리를 포기하면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깨달았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이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칠 만도 할 텐데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구원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목격자
-허영엽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한테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콜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한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콜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콜베 신부는 스스로 희생과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었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성령이 그의 입을 움직였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저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시므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다. 믿음이 충만한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서 본 아기가 구세주임을 알아보았다. 성령의 비추임을 받았기에 시므온은 구원의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 곧 적극적인 수동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적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충만히 살아가는 시므온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식별하고 볼 수 있는 은총, 그리고 그 뜻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일정기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정결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더불어 아이는 할례를 받습니다.
또한 첫아들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다시 주님께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주님께 봉헌토록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의롭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 표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이 말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께서 시메온의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점입니다. ‘과연 죽기 전에 꿈(메시아를 직접 뵙는 일)을 이루기나 할 것인가?’ 의심하던 시메온에게 성령께서는 '꼭 그렇게 될 것이다’고 확증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성령께서 시메온을 성전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인간’ 시메온이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시메온은 드디어 그가 평생에 걸쳐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아를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평생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인생의 최종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감격의 정도, 감개무량의 정도가 지나치면 할 말을 잃습니다. 메시아를 자신의 품에 안은 시메온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겨우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시메온은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기쁨,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지요. 그저 그렇게, 물에 물 탄 듯이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은총입니다.
시메온이 어떤 연유로 이런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웠습니다. 한 평생 성전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열렬히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또한 메시아 오심을 늘 깨어 기다렸습니다. 이런 시메온이었기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령께서 시메온과 늘 함께 하셨기에 그는 독실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의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한 평생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직접 뵙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소원의 성취는 꽤 늦게야 이뤄졌습니다. 거의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뜻은 끝까지 기다려봐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상당히 더디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회개합니다. 임종직전에 이르러야 하느님께 돌아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이 너무나 미미한 듯 보일지라도 인내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답답할지라도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간 그 이후에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할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그 시점에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성령 안의 삶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전 안으로 발길을 옮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시메온처럼 가까이 느끼게 되길 간구합니다.
아기를 주님께 바치다.
-강영구 신부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그대에게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규정(탈출13,11-12)에 따라서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奉獻)합니다.
봉헌(奉獻)이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명(生命)마저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몸, 소유물과 지식, 지위와 명예 따위는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봉헌(奉獻)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되돌려드린 봉헌물은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나는 거룩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 하느님께 봉헌된 요셉과 마리아,
하느님께 봉헌된 돈과 재물, 하느님께 봉헌된 시간,
하느님께 봉헌된 지식과 능력,
하느님께 봉헌된 사제,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자,
하느님께 봉헌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합니다.
그 거룩한 봉헌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납니다.
한편, 자기 것인 양 혼자 움켜쥐고 누리려는 사람들의 탐욕과 인색(吝嗇)함을 통해서 온갖 부정과 악취가 풍겨 나와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 봉헌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인류는 봉헌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당신의 오늘도 하느님께 봉헌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김정용 신부 -
◆”제 아들은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은 초등학생 자폐아를 둔 어느 어머니의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얼마 동안은 그 사실을 모르다가 나중에야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마다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통해 삶을 배우고 인생을 알게 됐다고 할 정도로 예전의 시각과는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이제 마음의 그늘이 아니라 삶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선물은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삶의 축복과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고통이 따르게 되면 그것을 선물로 여기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기 꺼려합니다. 그러나 세상엔 고통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치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듯이 말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사랑(구원)과 고통, 생명(아기)과 죽음(십자가)을 동시에 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난까지도 함께 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므온의 심안을 꼭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적지 않은 본당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상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어둡고 우울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이미지가 신자들이 누려야 할 부활의 기쁨을 감소시킨다는 이유에서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의 원천이 바로 십자가로부터였다는 것을 영영 보지 못할까 봐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온 생애 동안 메시아의 강생을 기다린 시메온
-경규봉신부-
율법에 의하면 자녀를 낳은 산모는 일정한 기일(레위 12,1-5 : 남아 40일, 여아 80일)이 지난 후 사제에게 가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렸고, 출산으로 인한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로 바쳤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번제로 바쳐야 하는 양 대신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레위 12,1-8). 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부유한 자나 〕??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하느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율법에는 가축의 수컷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는데(탈출 34,19; 신명 15,19), 사람의 경우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레위 지파를 성별하심으로써 대신하도록 하셨다. 이때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수보다 많을 때에는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민수 3,11-13.40-51; 8:16-18).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장자이시므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열심히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하여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 그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어 위로를 받을 때가 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의 강림을 위해 기도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성령을 통해 메시아를 보게 되리라고 계시하셨다. 성령께서는 시메온을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시메온은 성전에 온 많은 아이들 - 그 중에는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뜨기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미리 보았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에 구원은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세상 끝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총을 찬양한다.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만방으로 확장될 것을 미리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조그마한 어둠도 없으신 참 빛으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예수님님을 찬양한다.
시메온은 온 삶을 바쳐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 사랑과 공경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 5,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3,24)는 말씀처럼 계명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우리 눈앞에 빚어지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말고, 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까지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도 시메온처럼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면서, 온 삶을 바쳐 주님을 기다리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 정성훈신부-
제가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셨는데 유독히 응답을 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하루 빨리 주님의 은총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지금까지도 계속 기도를 하고 있지만 쉽게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저의 기도가 꼭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북한 주민들에게 주님의 구원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사제나 수도자로서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가장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바람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분의 현존을 뚜렷하게 한번 체험한다든지,
그분의 음성을 확실하게 한번 듣는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은총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바람이나 심정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시메온은 성경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충실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마침내 시메온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께서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 인도되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이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시메온의 기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메시아를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너무나 기쁘고 감격했던 나머지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메시아 오시길 고대하며
성전에서 기도하며 의로운 삶으로 기다려왔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애청자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하느님 나라를 찾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자세, 생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요셉과 목동들, 그리고 박사들과 시메온처럼 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세주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옆에 두고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2천 년 전에 보았던 아기의 모습으로 구세주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이웃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나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과 만날 수 없고, 사랑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웃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이정표와도 같습니다.
그 표시를 잘 따라간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느님께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있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선물인지요!
이 은총의 선물을 못 보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이웃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이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던 삶의 자세처럼
우리도 이제는 이웃이라고 하는 너무나 좋은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뵈올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의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침내는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하시길 바랍니다.
겨울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그 첫 자리는 ‘눈’(雪, snow)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눈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다시 질문을 던지면 눈의 원료는 과연 무엇일까요? 높은 하늘에서 수증기가 얼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니까 당연히 물이 눈의 원료라고 생각하시겠지요? 더군다나 눈을 녹으면 물이 되니까 당연히 눈의 원료는 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분이 계실까요?
그런데 10Cm의 눈을 녹이면 물은 1Cm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9Cm는 무엇일까요? 바로 공기입니다. 따라서 눈의 원료의 90%는 공기이고 나머지 10%만이 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눈의 원료가 공기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눈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이렇게 사실이 다를 수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 사람은 이런 저런 사람이야.’라고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지만, 그렇게 규정한 것이 그 사람 전부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판단은 어떨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판단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그래서 타협의 말을 종종 하지요.
‘주님, 제 소원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열심히 성당 나가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계시기는 한 겁니까? 왜 저의 소원을 늘 무시하십니까? 주님, 당신의 사랑을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의롭고 독실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는 항상 성령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는 아주 연약한 갓난아이인 예수님을 보고서 곧바로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시메온과 같은 의롭고 독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섣부른 판단과 불안전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진실을 우선할 것인지, 말것인지 여부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존 몰리)
기다림의 미학
-심종민 신부-
오랜 기간 시험을 준비한 사람들은 마음 고생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합격이라는 선물은 그 고생의 세월을 오히려 축복의 시간으로 돌려놓습니다.
심마니가 온갖 고생 속에서도 산을 떠나지 못함은 산삼이 주는 기쁨이
그 고생보다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듯이, 밤의 끝자락에 서광의 빛이 있듯이,
준비 없는 참기쁨은 없어 보입니다. 시메온은 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 기다림이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고생 끝에 오는 기쁨이 더 값지듯이, 갑자기 그리고 무상으로 찾아온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무작정 서두르고 재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얻게 될 은총을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닌 은총의 시간을 위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서 우리는 은총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 황지원 신부-
요즘 세상을 보면 마치 육상 선수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듯이 빠른 것이 미덕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디지털 기계는 물론이고 일상 전반의 문화가 ‘빨리 더 빨리’라는 구호 아래 숨을 헐떡이며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빠른 성장과 발전 아래에 더 풍요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습은 예전보다 더 행복하고 편안한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 역시 휴대전화가 생기고부터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더 조급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집니다. 약속시간이 되면 바로 휴대전화를 보고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걸어 조급증을 드러내는 제 모습을 봅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약속 장소를 서점이나 한적한 곳으로 정해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명의 좋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춰 살기에 급급한 현대인의 모습이 조금씩 제 몸과 마음에도 배어 있는 것을 봅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기약 없는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그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한 해 두 해, 아니 십 년, 이십 년이 흐르면서 그 약속을 의심하기보다 더 큰 희망과 기대로 오히려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빨리빨리 우리를 채워주시기보다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순간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무르익을 무렵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대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시메온의 인내와 믿음은 조급하고 의심 많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두 팔에 받아 안고
-장재봉신부-
성탄의 축복을 거듭 전합니다.
생각하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던
어릴 적 성탄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귀한 기다림의 자세이며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꼽아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께 무엇을 얻으셨는지 여쭙겠습니다.
어떤 선물을 받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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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평생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 시메온을 만납니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특별한 대림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조건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기다려야 했던
시메온의 평생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해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초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자꾸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연로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더 깊고
멀게 여겨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직 믿고
기다리는 자세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렸던
시메온을 통해서
진지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배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의로움은
끝없이 기다리는 자세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르시는
독실함이란
흔들림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새깁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시메온에게 머무르시며
힘을 돋워 주신 이유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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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오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이 갖고 오신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림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할 까닭입니다.
우리 품에 안긴 그분이
곧 구원이시니
그분을 안은 두 팔에 힘을 돋웁니다. 아멘
-박태정신부-
한 신비가가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주님은 문을 열지 않고 닫힌 문 안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네, 제게는 저의 덕행이 한 자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그는 또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네, 주님 저의 좋은 행실과 거룩한 공적이 한 자루 있습니다.” “아주 고무적이야.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네.” 다음에 그 신비가가 또 주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의 명상과 간절한 기도가 한 숟가락 있습니다.” “너 참, 생각이 깊어졌구나.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구나.” 신비가는 며칠을 지나 다시 주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발 들여보내주십시오.” 주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그러자 신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주님 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오너라.”
나의 덕, 나의 선행, 나의 기도 이 모든 것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교훈을 알려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고 일치하는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십니다. 나의 뜻, 나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첫째 독서도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 5.)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랑을 완성시켜가야 하겠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내세우기 보다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멘.
자신의 눈으로 구원을 보다.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명명, 그리고 아버지 즈가리야의 노래를 끝으로 선구자의 삶을 절대 침묵과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의 선구자적 역할이 부각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후 세 가지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예수의 성장과정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안배와 손길에 묶어두고 있다. 그 세 가지 사건은 첫째로 단 한 구절로 요약된 예수의 생후 팔일 째 거행된 할례예식와 명명(2,21), 둘째로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2,22-3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12살 소년시절의 에피소드(2,41-52)이다. 오늘 복음은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과 함께 어머니 마리아의 해산으로 인한 부정을 벗는 정결예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은 경우 80일 동안 불경하다. 해서 그 불경을 벗는 정결례(레위 12,1-8)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야 하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예식(출애 13,1-16; 민수 18,15-16)을 출생 30일 안에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을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가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인데,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가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즉, 루가의 관건은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이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顯顯, Epiphania)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같은 의도를 동방박사들의 예방사건(마태 2,1-12) 안에서 다루고 있다. 루가는 이러한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을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신 것이다. 그러나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구세주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렸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