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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를 출발해서 영월 방면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3월 중순의 차가운 날씨이다. 백목련 봉오리가 이제야 흰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은 아직도 깊은 묵언 중이다. 선잠이 든 채로 구부러진 도로를 돌다가 이필임 법우님의 탄성 소리에 화들짝 놀라 창밖을 보았다. 꽃망울을 활짝 연 연분홍 진달래가 돌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우리들 마음을 헤아려서 잠시 도로 밖에 주차했다. 나무 팻말에 <참꽃 동산>이라고 쓴 예쁜 글씨가 보이고 나지막한 계단을 오르니 연륜이 있어 보이는 진달래 즉 참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나무 중에 쓸모 많은 참나무같이 우리의 정서에 가장 잘 맞는 꽃이 참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백승환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금강회원들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스마트폰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권오웅 선생님은 4월 말경의 비슬산 참꽃축제에 꼭 한 번 가보라고 하신다.
영월 법흥사에 도착하니 참았던 하늘이 드디어 가는 빗방울을 분수처럼 흩뿌린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그 경치 뛰어난 사자산의 남쪽 기슭에 법흥사法興寺가 자리 잡고 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와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우산을 받쳐 들고 곧장 올라가니 왼쪽에 대웅전이 있고, 바로 앞에 징효대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징효대사 절중은 신라 말에 쌍봉사를 창건하여 선문을 크게 일으킨 철감선사 도윤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 절을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징효대사 부도와 부도비 사이에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우람한 고목이 멋있다. 수령 200년 된 밤나무이다. 밤나무에게도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금강회원님들 모두 세세생생 불국토에서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 불도를 이루게 해 달라고 빌었다.
쭉쭉 뻗은 키다리 붉은 소나무가 신령함을 뿌리는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적멸보궁이 나온다. 여기 법흥사 경내는 온통 멋진 소나무이다. 오솔길 양 쪽으로 도열한 소나무가 높은 공중에서 만나 정답게 포옹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적멸보궁 뒤 웅장한 사자산의 봉우리들이 서기를 머금고 그 아래 왕릉 같은 봉분과 자그마한 무덤 같은 토굴, 소박한 부도 1기가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이 부도는 사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부도이다. 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부도로 알려진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석가의 진신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한다. 사리탑 옆에 있는 토굴은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권오웅선생님은 왕릉같이 커다란 봉분 중앙에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차가운 가랑비가 흩뿌리고 소나무로 둘러싸인 성스런 곳을 보면서 합장을 했다. 적멸에 드신 석가모니를 생각하니 백수선생님의 “꽃보다 어여쁜 적막”이란 시가 떠올랐다. 갑자기 적멸보궁이 인산인해로 크게 시끄러웠다. 윤달을 맞이하여 삼사순례에 나선 신도들이 대형버스를 타고 속속 도착한 것이다. 신도들이 앞 다투어 먼저 적멸보궁에 들어가려고 하니 자연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기도는 무엇보다 하심으로 아상을 죽이고 나를 비우는 것이라고 한 스님의 말씀이 아프게 가슴을 때렸다.
오후 3시 45분경에 귀갓길에 올랐다. 10여분 정도 갔을 때, 좌중이 들썩거렸다. 김창순 보살님이 정암사 법당 참배하느라 가방을 두고 왔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카드가 걱정이라고 했다. 기사 아저씨는 재빨리 정암사 쪽으로 버스 방향을 돌렸다. 정암사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젊은 선영이와 김정희 선생님, 김창순 보살님이 뛰어나가고 남은 우리는 뾰족한 흰 천막 안쪽으로 들어가서 서각 전시회를 관람했다. 다행히 김창순 보살님의 가방은 멀지 않은 대웅전에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김정희선생님은 김창순 보살님께 손으로 직접 만든 예쁜 손지갑을 선물로 얻었다. 흐뭇한 광경이다!
순례날 비가 온다면 ‘우중의 여인’을 부르겠다고 약속한 대로 안호대 원장님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셨다. 봄비가 촉촉이 오시는 날 듣는 원장님의 구성진 노래는 너무나 감미롭다. 나는 스마트폰 메모에 안원장님의 애창곡명을 저장해두었다. 애창곡은 ’우중의 여인‘, ‘비 내리는 덕수궁’, ‘애정이 꽃피는 시절’, ‘두마음’, ‘외나무다리’이다. 선영이의 노래가 또 일품이었다. 얼마 전에 타계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비롯해서 부르는 노래마다 절창이다. 다른 회원님들도 노래를 멋지게 불러서 아주 흥겨운 시간이었다. 예천휴게소에서 청국장으로 저녁을 먹고 집에 오니 밤 8시가 넘었다.
첫댓글 법흥사와 상원사 적멸보궁은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진신사리의 장처를 알았다니 자장스님의 속내를 들켰군요.
우중의 여인은 이제 총기가 흐려져 가방을 흘리시고 다님니다.통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