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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 신소고 - 서철원
돈의 위력에 대한 예찬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농경에만 부착해서 자급자족을 생활방식의 대본으로 삼고 살아온 일부 제한된 족속들을 제외하면, 문화적 생활이 영위된 모든 지역에서 돈은 모든 유통의 기본이어서, 더 높은 문화적 향유의 추구욕은 돈의 구매력의 묘미를 더하게 하였다.
돈에 대한 예찬은 이런 문화적 생활의 향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락과 저주로 인한 지구의 생산능력의 저하는 부의 편재를 유발하여 빈부의 과도한 대립을 이루어왔다. 이런 빈부의 대립은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으로 시발된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관계는 항상 주종관계였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은 부자나 부농의 농노 형태로 생을 영위해 왔다. 농경사회에서 가진 자는 왕처럼 행사하였고 수 천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이와 같은 호족에게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봉사를 바쳐드렸다. 부한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마찬가지 형태로 사람들을 거느렸다.
이처럼 돈은 사람들 위에 권력 행사로 그 위력을 발휘해 왔다. 혹 돈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면 현대는 돈에 대한 강한 열망이 대중화하였으나 옛날에는 없는 자들의 돈에 대한 열망은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돈에 대한 강한 열망은 천하가 통일된 대제국에서 교역이 왕성해짐으로 그 열도를 더해갔다. 그것이 중국의 당, 원, 청 등의 대 제국 안에서나,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이나 바로들의 애굽에서나 로마 제국 안에서든 간에 거의 유사하였다.
이 통일 천하를 이룩한 영웅들을 충동한 것은 물론 저들의 권력욕이었지만, 또 부의 축적을 위한 욕구가 크게 역사해 왔다. 실상 많은 전쟁들은 왕실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지전쟁들은 거의 강대국 재벌들의 사주가 그들의 정부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할 것이다.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돈의 위력을 잘 알고 또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황금의 위력을 잘 안 족속이 있다면 아마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라고 할 것이다. 주전 8세기 말엽 앗수르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한 후 중동제국의 세계로 흩어져 들어간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때에 귀환의 기회를 지나가게 하고서 이방 세계에서 부의 축적에로 힘있게 행진하였다.
그들이 이방 세계에서 이룩한 돈의 위력은 저들로 또한 제국의 권력에의 접근을 열었다. 이 일은 계속되어 로마 천지에로 흩어져 들어간 유대인들이 더욱 돈의 축적을 위해 진력하였고, 저들이 로마 황실에 들이민 황금붙이는 저들의 위경을 종종 도와주게 하였다.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안 돈의 위력은 예루살렘 정통 유대인들도 익히 알게 되어 그리스도 재세(在世) 당시 그들의 과도한 돈 사랑을 책망받아 하나님과 돈 곧 맘몬(mammon)은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은 돈으로 로마 제국 내의 교역을 크게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돈은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위력을 나타내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평화를 이루는데 공헌하므로 시민권을 선사받기도 하였지만 저들의 금력은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특별히 나라없이 로마 천지와 구라파에서 유랑하면서 살아온 유대인들이 돈의 위력을 절감하고 또 그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껏 돈에 대한 예찬 중에 칼 마르크스가 한 돈의 위력에 대한 묘사가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한 예를 들어 돈의 전능성을 풍자하였다. 한 젊은이가 돈은 많으나 참으로 추남이어서 결혼하는 것이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돈은 어느 처녀고 두번 쳐다보지 못하게 할 그 남자의 추함을 덮고 고상하게 하였다.
그 남자를 본 여인들은 그가 가진 돈 때문에 그를 추남이라하여 돌아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부자는 절세미인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돈은 추남을 미남이 되게 하고 호남이 되게 하였다. 돈은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다. 돈이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였다. 마르크스의 견해를 넘어서서 돈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불의를 의로 만드는 전능한 마성이 있다. 하나님도 못하는 일을 돈은 그렇게 한다.
근세까지 왕실과 귀족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호사의 생활을 다 해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귀족생활의 호사를 영위하기 위해 백성들을 압제하고 수탈함으로, 백성들의 가난과 희생 위에 저들은 안락을 다하였다. 그러기에 이 귀족들은 어떤 형태로든 기존체제가 혼란되거나 무너지는 것을 극력막았다. 가난한 백성들은 내세에서나 저들의 욕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고, 또 귀족들도 백성들의 욕구를 저편에서 충족시키도록 유도하였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 기술과학 문명이 이룩한 큰 공헌은 이전에 귀족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쾌락과 향락을 대중화하였다. 이제는 누구나 자기의 돈의 양에 따라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쾌락을 추구함에 죄의식을 느끼던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어 더 많은 쾌락의 추구를 위해 노력한다. 귀족들이 누리던 쾌락과 호사를 돈만 가지면 다 누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즐기던 쾌락이 싫증나면 다음 단계나 혹은 다른 쾌락에로 향하게 되었고, 기존 쾌락이 싫증나면 새로운 쾌락을 창안해낸다. 그래서 블로흐의 말대로 사람은 쾌락에 끝없이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 것이다. 현대 기술과학은 쾌락을 대중화하였을 뿐 아니라 그 종류와 질을 확대함을 무한 대까지로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돈만 있으면 쾌락을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돈의 양에 따라 그 가지수와 질을 달리하여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쾌락의 충족 후에 으례 허무감이 따라 오지만, 그 허무감은 다른 쾌락을 추구하여 누림으로 해소시키려고 한다. 그 옛날 왕족들과 귀족들의 특권을 이처럼 현대 기술과학 문명은 대중화하였고, 그 종류와 질은 오직 돈의 양에 의해서만 한정되게 하였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향락의 극치를 여인의 몸의 향유에 둔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여인을 향락하는 것이 현대인의 주관심사이고 또 그들 생의 목표이다. 그러나 이 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큰 특권은 돈이다. 돈의 양만 확실해서 지속적으로 그 권세를 활용할 수 있다면 여인은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으로 안다.
현대인은 누구나 하워드 휴즈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기에 전 지구를 돌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달라스( Dallas)와 다이내스티(Dynasty, 왕조)가 별 거부반응없이 가족이 함께 즐기게 되어 시청자들의 가정 파괴의 암시를 상호 묵인하게 하였다. 현 추세대로라면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출산은 모두 부화공장에서 이루어지고 성은 쾌락을 위해서만 있으므로 가정생활을 통한 출산은 불결과 미개로 조소를 받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인의 향락, 그것도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에서의 향유는 돈의 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바로 이 돈의 법칙에 따라 현대인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더 많은 돈의 추구를 위해 목과 허리를 꺽는다. 그런데 대부분은 돈을 버는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불의와 악한 방법으로 돈을 얻었어도 쓸 때는 선량한 방식으로 번 것처럼 성스럽게 쓴다고 할 것이다.거대 규모로 돈을 얻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거대 규모로 조직적으로 불의와 악한 방법을 확대한다. 전쟁과 내분, 정권탈취등의 방법으로 돈을 크게 버는 것을 정당화한다. 정치와 경제가 통합된 현대 상황에서는 일단 정권을 장악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든간에 동원할 수 있는 돈의 위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국가적 재정의 배분과 사용을 전결함으로 그 장악방법을 정당화해 주고 오히려 신성시해 주어 한 왕조의 창업의 공에 비겨진다.
어떤 불의와 악으로 정권을 잡았든간에 정권의 장악은 국가 경제를 전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결정하는 일이므로 정권 쟁취를 정당화해 줄 뿐 아니라 필연적이었다는 논리에 이르게 한다. 불의한 재물획득도 국가 권력이 어찌할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거나 또 국가적 규모로 확대되면 오히려 그 방법이 찬양받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백성들의 이 재물에 대한 욕구를 위해 크게 일한다. 전통적으로 백성이 개명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종교는 거의 예외없이 민중들의 부요의 욕구에 부응하여 저들의 축복기관으로 역사해 왔고, 그 방식으로 또 종교가 부요를 그 도를 넘게 축적해 왔다.
종교가 민중들의 부요 욕구에 부응하여 저들의 소원에 봉사할 때 종교는 백성들의 과도한 욕구를 합리화해 주고 정당화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저들에게 축복을 선사하였다. 비록 돈을 크게 번 사람이 불의하고 악하게 벌었어도 종교는 그 많은 돈 때문에 그 사람과 그 불의한 방법을 정당화해 주고 또 사면해 주며 위로해 준다. 복을 빌어주는 기관으로서 종교는 백성들의 위로와 소망이었다. 종교가 이런 임무를 담당하는 사회에서는 백성들은 이기적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축복 전달 내지 선사 기관인 종교는 그런 축복을 무상으로 베풀지 않는다. 종교가 베푸는 축복은 항상 유상으로 되어 진다. 그 축복은 항상 제출된 돈에 대한 갚음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축복은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축복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고, 또 그 대가는 사전에 지불되어야 한다.
종교가 선사하는 축복도 반드시 복채처럼 먼저 바쳐야 시행된다. 항상 드려진 돈에 대한 갚음의 형식으로 축복은 베풀어진다. 더욱이 축복종교는 바침으로 축복이 온다고 가르쳐, 더 많은 축복에 대한 열망을 백성들의 마음에 채우고 또 그렇게 충동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연보한 사람을 축복종교는 항상 우대하고 더 축복해 준다. 그러니 백성들이 더 복받으려고 재산을 많이 바치게 되고, 또 더 많은 수배의 재산이 축복의 형태로 되돌아올 것을 예산하고 재산 전부까지 바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불교가 2천 여년 동안 백성들의 기복욕구를 충족시키는 축복종교로 둔갑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재산을 수탈하여 부요 위에 부요를 더해갔으나, 백성들은 가난에서 가난으로 행진하였다. 서양에서는 로마 교회가 사후 축복을 보장해 줌으로 인민을 수탈해 왔고, 무지한 백성들이 죽은 자의 안녕을 위해 거지가 되는 신세로 전락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제는 두드러지게는 70년대부터 한국의 개신교회가 축복종교로 완전히 탈바꿈하여 이전 불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도 신령한 은혜를 정통교회보다 더 넘치게 한다고 하는 순복음 계통이 성령충만의 표와 현세적 축복과를 연관시킴으로 그렇게 하여, 지금은 어느 교파의 교회를 막론하고 앞을 다투어 축복선사에 열중한다.
우리 한국 백성은 본래가 현세 지향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전체 사회가 잘되도록 개선되고 조직되는 데는 관심이 없는 데다가 자기 노력을 정당한 대가로 지불하고 빵을 버는 것 보다는 흥부식으로 요행히 잘되기를 바라는 타인 의타 성향이 깊어서 기적적 요행심이 늘 지배적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좀 개명되니 불교나 무당종교는 참복을 줄 수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또 기독교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구속주로서 창조 후 구속까지 해주시는 분이시니 그 분이 바로 만복의 근원임을 바로 깨닫게 되었으니, 복의 원천을 바로 만났을 뿐 아니라, 구속해 주신 분이 현세적 복까지 주실 것이라는 자명한 공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 한국 전래의 종교관을 깨달은 목사가 난세에서의 도피길 대신 현세에서 번영과 축복의 약속을 위해 새로운 성령 시대의 도입을 개진하였다.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 성령충만으로 설파되었고, 그 성령충만은 오직 오순절 성령 충만시에 나타난 방언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언이 그렇게도 강조되는 이유는 방언은 성령충만의 표로서 곧 하나님이 그 방언자와 늘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니 하나님의 축복의 변개될 수 없는 통로가 된다는 생각이 그 근저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70년대의 그 강렬한 방언강조는 이제 거의 다 사라지고 삼박자 축복이 그렇게 강조되어, 예수 믿는 자가 세상에서 잘못될 수 없고 잘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적극적 심리 자세를 백성들에게 심기 시작하였다. 그 돈을 버는 법 중의 하나를 배움받은 자들이 실생활에서 그 돈버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하니 자연히 그 백성들의 생은 물질적으로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부요의 비법을 배운 자들 중에는 더욱 진보하여 목사의 계속적인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재산의 월등한 증가 후 교회를 등져도 되었다. 그들은 목사보다 진보하여 부요의 원리를 쉽게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부요의 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백성들이 벌떼처럼 구름떼처럼 모여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5만의 교인이란 소리를 듣고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런 교회의 교세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20만, 25만... 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몰려오니 그 수는 곧 돈으로 환산되었고 그렇게 들어오는 수입은 재벌의 순 이익금을 몇 곱절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 교회의 재정이 경이적으로 증가할 때 그 교회가 대외적으로 갖는 세력은 이전에 미처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강대해질 뿐 아니라, 선교와 순복음의 전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량 정보매체를 탈 수 있어서 그 교회의 위명은 전국적으로 산골 깊은 곳까지 퍼지고 굶주리지는 않으나, 더 재정적으로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한국 백성들이 있는 곳이면 국경을 가릴 것 없고, 원근을 가릴 것도 없이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한 교회의 재정이 경탄스럽게 확대되어 갈 때 그 교회의 담임목사의 행동반경은 그 지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그 교단, 나아가서 전국 교회 위에 위세를 낼 만큼 되고, 정부 기관에도 매우 위대한 인물로 존중을 받는다. 더욱이 친백성들에게는 이중으로 경탄과 숭경을 유발하게 된다.
첫째로는 자기들의 생을 윤택하게 해주고 다른 교회에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었던 황홀한 신비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생각할수록 망극한 일이요, 또 이런 초대형 교회, 20세기 기독교회사 중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도 바울도 이룩하지 못한 큰 교회, 가히 신적 능력이라 할 일을 이루었으니 그는 백성들의 우상이요, 신화적 존재가 된다. 게다가 신유의 은사와 독심술을 소유하여 사람들을 그냥 이름만 불러 세우며 암이 나았다고 선언하여 낫게하니 어찌 이런 위대한 인물이 우리 중에 있을 수 있단 말인고? 내가 어찌 감히 이런 분 밑에서 가르침 받을 수 있단 말인고? 주일마다 백성들의 입에서는 찬사와 경탄이 쉬지를 않는다.
주일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권세있는 말씀, 하나님은 나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 손을 벌리고 서 계시니 하나님이 어떻게 더 좋으실수가 있을까?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그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흘러넘치는 축복을 하신 그 하나님,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축복한 자를 축복한 그 하나님이 이제 내 하나님이 되셔서 나를 축복하시니, 아브라함이 누린 그 수많은 은금과 나귀와 약대와 소와 양과 염소가 내 것이 될 것이다.
또 아브라함을 318명의 무사가 옹위하여 보호하였듯, 하나님이 내게 그처럼 옹호자가 되시니 내가 세상에서 누구를 두려워하며 실패하리요? 설교를 듣고 나오는 백성들의 가슴이 뿌듯하여 하늘을 날고, 그 발이 화란의 속담처럼 구름 위를 밟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이 축복목사와 축복백성들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예수 믿고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는데,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내리시고 약속하신 축복이 내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미심을 해결할 기발한 영감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방에 내린 하나님의 저주를 해결함으로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 우리에게로 오는 통로가 되었다. 십자가가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의 통로가 되다니! 이런 진리를 미처 몰랐다.
이런 설교에는 십자가도 있고, 축복도 있으며, 축복과 십자가가 나란히 설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가 축복을 위해 서 있다. 이런 복된 복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니 순복음이지!
뿐만 아니라 축복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바침이 있어야 한다.
보라 구약의 십일조에 창고가 넘치는 축복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하나님께 축복받으려면 바쳐야 한다. 그러니 예배마다 헌금을 한다.
철야기도회는 물론 새벽 예배시도 헌금을 한다. 바침에 따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결국 바친 헌금의 액수에 축복은 비례한다는 공리가 암암리에 세워졌다.
그러기에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더 많은 헌금을 하기에 계산이 빠르고, 더 나아가서 집과 전답을 팔아 바쳐도 억울한 생각이 적은 것은 이런 충정어린 헌금에는 목사가 힘을 다해 축복을 위해 간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칠배나 십배 정도가 아니고 천배 만배 천만배 억만배축복을 해주시라고 목사가 비니 만원만 헌금해 목사가 만배의 축복을 빌고 그대로 믿으면 1억이 되니 이런 기이한 영리적 계산이 또 어디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런 특이한 헌금을 하게 되면 온 교회에 광고되어 매우 높이 칭송되고, 교회에서의 발언권은 크게 확대되고 확고히 될 뿐 아니라 그 보상이 거의 예외없이 장로직의 형태로 이루어지니, 이런 자아만족을 위해서는 논밭을 팔아도 할만 하다. 그러니 교회는 돈많은 사람을 더 축복해 주고 우대해 준다. 돈과 부요는 교회에서도 이렇게 영광된다. 이렇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고 또 축복해 주고 들어온 고액의 헌금은 교회의 운영을 황홀하리 만큼 빛을 내준다. 동시에 그 돈을 사용하는 자의 생을 윤택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 목사의 위광을 누가 당하리요.
삼박자 축복으로 한 교회가 이렇게 초음 속으로 성장하니, 장로교회가 눈을 번쩍뜨게 되었다. 그래 우리는 말라기의 십일조 약속을 글자대로 믿는다. 왜 우리라고 축복을 베풀 수 없다는 말인고? 우리는 이제껏 뭘하고 있다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는고?
너나 없이 눈은 여의도로 향해졌고 수십만 교세는 안되더라도 천 명이상 만명 선의 대형교회화하기에 총력을 다하게 되었다. 우선 대형 교회화라는 첩경은 교회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이다. 외상으로라도 잘지어 놓으면 사람들은 큰 교회에 모이기 마련이니 은행돈을 빚내서라도 기어이 교회당을 수 십억에서 수백억에 이르게 짓는다. 그러면 어디서인지 사람들은 가득 모여와서 자리를 메우고 또 큰 교회에 속했다는 긍지 때문에 큰 헌금과 건축헌금을 종종 한다. 그 큰 교회당을 짓기까지 목사와 측근들은 철야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산상집회를 갖고, 온갖 힘을 다 경주하여 일을 이루면 그 다음은 자연히 수지가 맞게 일이 진행된다.
대 교회당만을 지어놓으면 기업가적 타산이 다 맞아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모아오고 그들을 붙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부교역자들을 10여명 이상 채용하여 다리가 부러지도록 심방하며 교인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저들의 축복을 위해 기도해 준다. 이렇게 하기를 쉬지 않을 뿐더러, 그래도 교회출석을 소홀히 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총동원주일을 자주 설정하여 강제로라도 출석케 한다.
문지방이 닳도록 출입하는 교역자들의 낯을 봐서라도 너무 출석을 게을리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그물을 벗어날 수 없도록 구역, 국, 소교구, 대교구, 등으로 구분하여 피라밋 형의 조직을 한다.
여의도에서 하는 교회조직과 행정을 장로교회 어디에서 시행하지 않는 곳이 있는가?
이렇게 하여 대형 교회를 이룩하니 그 목사들 위광이 찬연하지 않겠는가? 그런 성공의 형장을 가슴에 단 목사들의 목소리가 그 교단의 향방을 결정하고, 그 교단 밖에까지 그 위명이 들날리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구라파 등지로 나들이함이 이웃집 돌 듯 하니, 이 자아만족의 기쁨을 어디다 비기리요?
교회에서 축복설교를 하면 이렇게 잘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백성들의 시선을 미래의 하늘로만 향하게하고 괴로운 십자가와 회개를 외치며 구속과 고난의 길을 강조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는 주일마다 축복설교요, 그 외 다른 설교를 할 때는 무슨 소리인지 해득하기가 힘들다. 기껏 목사들이 배운 것이 "예수믿고 구원받고 복받읍시다" 정도인데 이 이상을 넘어가는 신약의 복음을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축복설교와 축복기도에 열렬한 목사들이 주일마다 헌금통계 보고에 관심이 경주되어, 나온 액수는 자기 설교의 성공도로 본다. 그러기에 헌금 보따리 위에 손을 얹고 크게 축복하고, 특별헌금자들의 명단을 광고하기에 열심한다. 이런 광고행위는 이렇게 많은 헌금을 한 자들은 광고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 사회적으로도 그만큼 성공을 유지한 사람이니 이래야 합당하고 그러니 이들은 우대한다는 선포이며, 동시에 여러분들도 헌금을 많이 해서 이런 우대를 받으라고 시사하고 종용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헌금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아니고, 사람 앞에 한 것이 된다. 그 광고 후 특별헌금자를 위해 조조히 축복기도를 한다.
예배가 이렇게 진행되면 예배의 중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에 있다.
중이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는 속담대로 헌금에만 치심한다. 결국 한국교회는 다는 아니나 돈을 제일로 하여 돈을 위해 예배하고, 결국은 돈을 숭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처럼 도시교회들이 돈을 제일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맘몬을 숭배하고 황금의 송아지를 경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한국 백성들은 재주가 능하여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맘몬을 위해서 일하시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평에 반대할지 모르나 백성들도 기도에서는 현세적 축복만을 빈다.
어찌하여 한국에서는 예수가 복덕방망이가 되었는가?
그렇게도 많은 생명을 살리고 세계를 변화시킨 분이 한국에서는 복덕방망이로 둔갑하여, 이전 부처의 자리를 차지했단 말인고?
지금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백성들도 복받기 위해 교회에 나아오고 그 백성들을 위해 목사들도 축복설교와 축복기도를 저들의 주업으로 삼으니 기독교가 한국을 구원하고 개조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만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절에 시주하여 결국 절들만을 부하게 하고 강성하게 한 백성이 이제 동일한 시행을 교회에 대해 계속한다.
그러니 교회에 구원의 기쁨이 없고 영을 여는 설교가 아니라 오히려 영을 닫고 어둡게만 하기 때문에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보내야 할 피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 교회는 이렇게 경이적으로 부흥하여도 기실 대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기껏 해외에 있는 자기 교인관리를 위한 방편이어서 결국 교세확장의 도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래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이렇게 돈에만 열중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줄로 아니...
이 민족을 구원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래도 될 것인가?
교회가 이렇게 술에 취해 혼미해 가면 이 민족과 국가가 어찌 될 것인가?
교회가 이렇게 병들면 사회는 나병에 걸렸다고 하지 않겠는가?
한번 더 징계를 받아야 깨어날 것인가? 그때는 아마도 너무 늦을 것이다.
이 지구 상에 한국만큼 위험한 지역이 또 있는가? 그래도 교회는 언제까지 황금 송아지 앞에 술취한 춤만을 출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는 이제 교회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여 생명을 구원하고 이 사회를 개조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헌금제도를 개선하여 헌금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헌금이 되도록 하고, 헌금자와 그 액수가 엄격히 비밀 보장되도록 하여 자의에 의한 헌금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손의 수고를 통해 자기의 빵을 벌고 부해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노동법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이 법이 가르쳐지기 전에는 우리 사회에 사회정의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