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 일대에 세거하는 光山 金氏는 派祖를 달리하는 두 집안이 지척의 거리에서 세거하고 있다. 金孝盧(1454-1534)를 입향조로 하는 ‘외내 마을’과 惟一齋로 대표되는 와룡 ‘가야 마을’이 그렇다.
외내 마을은 광산 김씨 예안파가 600년을 세거해 온 마을이고, 와룡 가야 마을은 풍천 구담 거주 광산 김씨 潭庵 金用石(1453-?)의 제4자이자 惟一齋 金彦璣(1520-1588) 의 부친인 金籌가 와룡 거주 順興 安氏 安處貞의 사위가 되어 구담에서 이거하여 500년을 세거해 온 마을인데 서로 이웃하여 살지만 입향조가 다른 먼 집안이다.
광산김씨 예안파는 고려 충숙왕때 밀직부사 金天利의 아들 濟用少監 金務가 경기 高陽에서 安東으로 落南(묘:남선면 노림)하면서 시작되었다. 金務는 3남(坦之, 崇之, 孝之) 2녀(사위 淸州 鄭氏 鄭普文, 義城 金氏 金永命)를 두었다. 둘째 아들 金崇之와 그 손자 음성현감 金淮는 풍천 도양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예안 입향조 金孝盧는 음성현감 金淮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金務의 셋째 아들 金孝之가 黃載의 사위가 되어 외내에서 살게 되었는데 金孝之에게는 아들이 없어 조카인 金澗을 입양하였다. 그러나 金澗 역시 아들이 없어서 형 金淮의 아들인 조카 金孝盧가 풍천 도양에서 이거하여 金澗을 侍養하게 됨으로써 외내 입향조가 되었다. 김효로는 안동 입향조 金務의 증손자가 된다.
이때 문절공 차자 萬勻 선조는 金澗의 사위가 되어 외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효로는 萬勻 선조의 사촌 처남이다. 만균 선조는 145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遺逸로 천거되어 1513년 通禮院引儀를 거쳐 丹城縣監을 역임했는데 집안이 매우 富饒하였다. 그러나 萬勻 선조 역시 무남하여 김효로의 차남 金緌(1491-1555)를 일찌기 시양자로 삼았는데 탁청정 김유는 만균 선조 사후 재산을 물려 받아 萬勻 선조의 정자 枕流亭을 修築하는 한편, 자신의 정자 濯淸亭을 짓는 등 유유자적하면서 호방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상당히 의문이 간다. 왜 만균 선조는 동생의 아들을 양자하지 않고 처종질을 시양자로 삼았을까?
외내 마을은 입향조 김효로의 손자 후조당 金富弼, 읍청정 金富儀, 산남 金富仁, 양정당 金富信, 설월당 金富倫 5종형제가 퇴계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과 행의가 사류의 추앙을 받게 되었고, 고종인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 등과 같은 동리에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니 안동부사 寒岡 鄭逑가 외내 마을에 와서 보고 ‘외내에는 7군자가 있다’하여 유명하여 졌다. 그 외에도 김효로의 증손항렬에는 近始齋 金垓, 九峰 金전, 北崖 金圻 溪巖 金坽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가야 마을 광산김씨의 입향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풍천 구담 마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구담 마을은 고려말 상주목사 權執經이 강산의 경치가 아름다움에 반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권집경은 고려 충선왕때 都僉議政丞을 지낸 權漢功(?-1349)의 증손자가 된다. 권집경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順天 金氏 예조참의 金有溫(1367-1437)이 권집경의 사위가 되어 계유정난을 피하여 입향하게 되고(순천김씨 구담 입향조) 김유온의 孫婿인 광산 김씨 潭庵 金用石이 무오사화를 피하여 처향으로 입향(광산김씨 구담 입향조)하게 됨으로써 구담 마을에는 順天 金氏와 光山 金氏 후손들이 함께 세거하게 되었다.
潭庵 金用石은 아들 여러 형제를 두었는데 簧과 箎의 후손들은 구담에 계거하고, 筠은 봉화 거촌에(쌍벽당), 성주 목사 시는 성주 초전에, 진사 籌는 와룡 가야로 이거하여 갔다. 따라서 구담, 봉화 거촌, 성주 초전, 와룡 일대에 거주하는 광산 김씨는 모두 담암을 파조로하는 같은 집안이다.
와룡 가야에 정착한 진사 籌는 8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惟一齋 金彦璣는 퇴계 문인으로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후손 중에는 유일재의 아들 葛峰 金得硏(1555-1637), 晩翠軒 金得肅(1561~1649), 현손 肯構堂 金世煥이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1940년 진성 이씨 주촌파 이한걸 가문의 세전가보로 발견되었다고하는 국보 제70호 ꡔ훈민정음 해례본ꡕ(간송미술관 소장)은 세간의 얘기와는 달리 광산 김씨 긍구당 가문의 장서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글자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이 배우고자 해도, 제대로 뜻을 담아
이루지 못하니 ,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믈 여덟자
를 만들어 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익혀 씀에 나날이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우리가 교과서를 통하여 익히 배운 바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김언기의 차남 만취헌 김득숙의 종가인 긍구당 종손들이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寶冊인데 이 댁의 사위 주촌 진성 이씨 이용준이 처가에 드나들며 매월당집과 함께 가져간 책 중의 하나라는 것이 이 집안의 주장이다. 갈봉 김득연은 당대 필명이 있던 문인으로 국문 가사 「지수정가」 1편과 시조 63수를 남겼다. 본디 한글에 대한 애착과 문학적 소질을 겸비한 선비며 그의 생존시에 이 ꡔ해례본ꡕ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외내 마을로 대표되는 후조당 김부필과 가야 마을 대표인 유일재 김언기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안동 일대에 계거하는 광산 김씨는 모두 남인 계열로 조선 후기 영남 남인들과 함께 중앙 정계에서 철저하게 소외 받아 왔는데 비해, 충청도 논산의 沙溪 金長生 집안은 노론의 핵심 가문으로 조선 후기를 주름잡은 10대 國班 중의 한 가문이 되었다. 사계집안은 5대조 金國光이 좌의정을 지냈고, 사계는 조선 중기 예학의 태두요, 성리학의 대가로서 광산 김씨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그의 아들 신독재 金潗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金長生과 함께 부자가 동국(東國) 18현(賢)에 배향되었다. 沙溪 金長生은 惟一齋 金彦璣의 12촌의 손자뻘이 된다.
김효로(金孝盧) 1455(세조 1, 을해) ~ 1534(중종 1, 계유)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광산(光山).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叟) 또는 춘포(春圃). 음성현감(陰城縣監) 회(淮)의 자.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출세에 뜻이 없어 과거를 폐하고 독서로 임천(林泉)에서 자적(自適)했다. 풍천 도양동(道陽洞)에 살다가 성종(成宗) 년간에 예안현(禮安縣) 오천리(烏川里 : 現 臥龍面 所在)로 이거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공은 그의 결백한 절개를 스스로 지키신 분”이라고 칭찬했으며, 사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향리의 낙천정사(洛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宣城誌․安東市史․安東鄕土誌(宋志香) ․烏川君子里(烏川文化財移建紀念事業會)
김부필(金富弼) 1516(중종 11, 병자) ~ 1577(선조 10, 정축)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관찰사(觀察使) 연(緣)의 장자. 예안현(禮安) 오천(烏川)에서 출생했다. 이항(李滉)의 문인으로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의 강변에 정자를 짓고 시문(詩文)을 즐기며 학문에 전심하였다. 을사(乙巳)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레 불렀으나 나가지 안았다. 사후에 학행(學行)이 높이 평가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예안(禮安) 오천(烏川)의 낙천정사(洛川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후조당유고(後彫堂遺稿)』가 전한다. ■참고문헌 : 安東市史․宣城誌․陶山及門諸賢錄
내 어릴때 큰집 종 숙부께서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이 우리 문절공 선조가 소장 하시다가 아드님이신 萬균 선조께서 외내 처가(탁천정)에 가져간 것이 회수되지 않아서 ....라고 하셨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규명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석규할배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첫댓글 우리 문중도 아닌 타 문중의 자료를 이토록 자세하게 올려주신 석규 할배는 보학 공부를 별도로 하신거죠?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이 광산김씨 긍구당 소장본 이라는 것은 근거가 무었인가요? 사실은 우리 예안김문의 소장품 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잘 보았습니다.
모두 예안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얘기입니다. 근거는 긍구당이 외가인 내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때 사실로 판단이 됩니다.
내 어릴때 큰집 종 숙부께서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이 우리 문절공 선조가 소장 하시다가 아드님이신 萬균 선조께서 외내 처가(탁천정)에 가져간 것이 회수되지 않아서 ....라고 하셨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규명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석규할배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새로운 잇슈네요, 위 두 집안의 장서 얘기는 1940년대 얘기이고....만균 선조가 소장하였을 개연성은 있으나... 모든 재물이 외내 탁청정으로 넘어간지 500년이 지났는데 ...
이제와서 소유권에 관심이 있는것이 아니라 역사적 史實을 살펴 보자는 것이지요. 개연성이 크고 근거도 상당하다고 보여 집니다.
약간이라도 밝혀질수만 있다면(어떤 객관적사료에 몇줄이라도 나와만 있다면)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크나큰 자긍심을 줄법도한데요
글쎄요,....위에서 얘기 했듯이 탁청정과 긍구당은 전혀 다른 집안이라....탁청정집안이 끼어들어야 하고 다시 우리가...4파전으로...
외내의 광산김씨는 우리 예안파 세거지에서 강(낙동강) 을 마주하고 건너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 선조가 그 집안에 큰 영향(재물, 명성)을 주었다는 어른들의 구전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할배.
자세한 집안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담암공 1子 篁 7子시(옆으로부는피리.시)자입니다. 저는 봉화 쌍벽당후손입니다. 감사드려요. 현재 유일재종손은 북에 계시고 긍구당 주손 김대중님은 안동에 계십니다.
깊이 모르면서 남의 문중 얘기를 함부로 한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훈민정음 해례본 얘기는 김대중님이 주장하시는 내용임을 밝혀드리고요. 우리 문중만 보는 줄 알고 .....주관적인 내용도 넣었는데 ... 쓱스럽습니다.
英利-鼎-若采-閱-達孫-洙 - 用石-籌 -彦璣 問-鐵山-國光-克杻-宗胤-鎬 - 繼輝-長生-集 :극뉴(마음심변입니다) 問-闡-閑(총제공)-閱(퇴촌공)이므로 약채-문-철산--- 위로 가야합니다. 문 할아버지 배위가 유명한 양천허씨할머니입니다.
죄송합니다 수정을 했습니다. 양천허씨가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의 맏동서되시는분도 광산김문의 예안파라 관심있게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