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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食時에 飮啜에 不得作聲하고 재식 시 음 철 부득작성 |
⇒ “공양을 할 때는 마시고 씹는 소리를 내면 안 되고”
‘재식’은 음식을 먹을 때를 말합니다. 음(飮)은 먹는 것, 철(啜)은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계속 등장하는 ‘부득(不得)’은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풀이하면 밥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난히 쩝쩝거리는 사람이 있죠. 그것은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에 취해서 먹느냐, 혹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까닭 있게, 생각 있게 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먹을 때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곱게 먹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사실 그런 사람은 무시받기가 쉽습니다. 옷 하나도 분위기에 맞춰 입지 않으면 무시를 받는데, 먹는 것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먹는 예절이란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 이 교육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執放에 要須安詳하여 집방 요수안상 |
⇒ “발우나 저분, 숟가락을 집고 놓을 적에는 반드시 차분해야 하며”
‘집방(執放)’은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입니다. 반찬을 먹을 때 뒤적거리는 사람이 있죠. ‘요수안상’이란 조심해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너무 착하게 눈앞에 있는 것만을 먹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때 기쁘고 즐겁게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통 동양예절에서는 밥 먹을 때 말을 하면서 먹지 못하게 하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죠. 폴란드엘 가보니 세 시간을 밥을 먹더군요. 밥 먹다가 노래도 하고, 밥 먹다가 춤도 춥니다. 물론 그런 것도 지나치지만 이 본문에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출가자, 그것도 갓 불문에 들어온 사람이 그동안 반찬을 헤집고 무념으로 먹던 것보다는 챙기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행위 이전에 마음을 챙겨서, 방심하거나 습관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들여서 하라는 일심(一心)의 가르침입니다. 젓가락으로 헤집지 말라는 것보다는 마음을 챙기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외국에서는 국을 같이 먹지 않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사실 어떤 때는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죠. 상대방의 숟가락을 봤는데 비위가 상할 때도 있긴 합니다. 먹는 것 하나에도 도가 있고 공부가 있습니다. 먹으면서도 불공이 있고 수행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不得擧顔顧視하며 부득거안고시 |
⇒ “얼굴을 들고 둘러보아도 안 되며”
‘거안고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요. ‘거안’은 무엇이죠? 밥을 오롯이 먹으면 되지 이 사람 저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시’는 여기저기를 뚤레뚤레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집중하지 못하면 같이 먹는 사람이 무안해할 때도 있죠. 법회를 보거나 상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유념공부고, 생활 속에 부처님의 법이 있는 것이지 생활과 떨어져서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밥 먹을 때 - 禪 >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선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선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맛있게 주위 사람들과 상황을 고려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요. 윗사람이 오지도 않았는데 숟가락을 드는 것도 실례입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워낙에 바쁘고 급해서 미리 먹기도 하지만, 원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윗사람이 배려해서 빨리 자리에 앉아주어야 하겠죠.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일 그 일에 일심하라는 무시선 무처선의 가르침과 상통합니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 없이 마음을 챙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밥 하나를 먹어도 무시 받는 대상이 될 수도, 수행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받아들이면 경직되어 예에 얽매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일반교도 여러분들도 초반에 자녀나 손자들을 이렇게 가르치되 부드럽게 예의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不得欣厭精麤하며 부득 흔염정추 |
⇒ “맛있고 맛없는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해도 안 되며”
‘흔염’이라는데 음식이 잘 나올 때는 혼, 아닐 때는 연입니다. 대개 어떻죠? 잘 나오면 정신없이 먹고, 안 나오면 투정부리고 짜증을 냅니다.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세요? 음식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건강의 첫째는 마음이고 둘째는 음식인 것 같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양이나 질도 잘 고려해서 들어야 하는데요. 제가 엊그제 절에 갔더니 보살이 된장을 나물로 무쳐서 내놓았어요. 시금치도 참기름에 무쳐서 내놓았는데, 어려서 먹던 것이라 그런지 참 맛있더군요. 요즘 음식은 호텔에서조차도 모양은 예쁘지만 음식의 기운은 좀 약한 것 같습니다.
「예전(禮典)」에 보면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초대하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초대받는 사람의 예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어디서 지도자가 되거나 교화를 할 때 존경을 받기 어렵습니다. 음식을 드실 때에도 공부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사육(四肉)을 적게 먹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유념으로 드셔야 합니다. 이것도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같이 밥 먹기 싫고 밥 먹기 짜증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먹으면 행복하고 기운이 좋습니다.
須黙無言說하며 須防護雜念이어다. 수묵무언설 수방호잡념 |
⇒ “모름지기 말없이 잠잠해야 하며,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보호해야 한다.”
‘수묵무언설’이란 언설을 가능하면 수묵으로, 즉 묵언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수방호잡념’이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가에서는 몸을 가리켜 참 나가 아니라 썩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가 얽힌 것이며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대종사님은 ‘만사 만리의 근원’이라고도 했습니다. 석가모니가 고행할 당시 인도에서는 고행주의가 유행이었습니다. 가시 위를 걷거나 눕고, 뜨거운 데를 지나가며 몸을 학대하는 것을 통해 도를 깨닫고 자기 안의 욕심을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도를 깨닫고 중도를 강조합니다. 먹는 것은 도를 깨닫기 위함이 맞지, 그것을 고행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소식을 비롯해 단식, 과식 등 별거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때그때 중도를 적당히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특별히 구도심을 내서 밥을 안 먹는다든지, 단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 단식이니 하는 것이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맞겠나요? 현대인의 7명 가운데 한 명은 불임이라고 합니다. 오염이나 환경의 측면도 있지만 무리한 다이어트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먹는 것 하나하나를 방심했을 때 과체중이나 비만이 되고, 반대로 거식증으로 고생도 합니다. 몸을 통해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얘기로 돌아가서, 그분은 어떠셨나요. 고행을 하다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가, 불가촉천민에게 우유죽을 얻어먹었죠. 그것을 보고 같이 수행하던 사람들이 실망해서 부처님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그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그 사람들을 건지러 최초 설법을 하게 됩니다.
대종사님도 고창에서 수도하실 때는 별로 안 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으로 병이 생기셨습니다.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좌산상사님도 보면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시자에게 몸이 아프니 약을 지어오라고 했습니다. 생사 해탈한 사람이 무슨 몸에 연연해서 약을 지어오라 하느냐고 시자가 반문했습니다. 그 시자는 과연 도인인가요. 그 말에 스님은 해녀가 비가 오는 날 물질을 하러 가도 우산을 쓴다고 답했답니다. 아시겠나요? 공부를 잘못하면 몸을 쉽게 생각하고 우습게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몸은 만사 만리의 근원으로 잘 불공을 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마음은 더 대상이죠. 몸만 불공을 잘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須知受食이 但療形枯하며 爲成道業하며 수지수식 단료형고 위 성도 업 |
⇒ “밥을 받는 것은 다만 몸이 마르는 것을 면하고”
‘수지수식’, 즉 ‘모름지기 음식을 받을 때는’이라는 뜻입니다. 음식을 받을 때 그 음식을 먹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료형고’란 허기진 몸을 달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이 수행을 할 때 너무 적게 먹거나 많이 먹으면 수행하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기운이 없어도 수행이 안 되고 많이 먹어도 과식으로 호흡이 안 됩니다. 수행과 중생제도를 위해서 몸을 다스린다는 것이지 맛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위성도업’, 깨달아서 도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먹어야 하나요. 맛있게 드셔야 합니다. 도를 깨닫기 위함이니 대충 억지로 적당히 먹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맛있게 먹는 것이지 게걸스럽게는 아닙니다.
須念般若心經하되 觀三輪淸淨하야 不違道用이어다. 수념반야심경 관삼륜 청정 불위도용 |
⇒ “반야심경을 염(念)하되 삼륜(三輪)이 청정한 줄을 관하여 도의 근본작용[道用]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반야심경, 즉 경전의 말씀을 생각하되, ‘관삼륜청정’, 삼륜이 청정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불위도용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되 삼륜이 청정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는 보시바라밀입니다. 이때 삼륜이 있습니다. 보시하는 물건, 물건을 주는 자, 받는 자입니다. 김제 밭에서 수백억대의 돈이 나왔죠. 그걸 제가 받으면 어떨까요. 안 받아봐서 모르겠네요.
제가 부교무 처음에 나갔을 때 어떤 청년이 그러더군요. “교무님, 제가 인쇄업을 시작했는데 돈을 많이 벌 방법이 있어요. 미국의 플레이보이 잡지를 우리나라 사정에 맞춰서 출판하면 교무님께 교당을 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히야~ 돈을 그렇게 많이 벌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그 잡지를 만들면 남자들이 보고 사심이 일어나고 색심을 일으켜서, 거기서 번 돈으로 불사를 하겠다니. 청정한 마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색심을 일으켜서 번 돈이겠구나. 그걸 불사에 준다면 이치에 맞겠느냐. 나는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인천에서 영어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삼륜입니다. 세 가지가 서로 은혜가 되고 청정해야 합니다. 도의 쓰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길에서 주운 물건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찰서에 갖다 주거나 주인을 찾아줘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쩌시렵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다? 그렇죠. 내가 가지면 잘 살겠죠. (웃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을 찾을 노력을 최대한으로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당에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런 돈은 불사로 처리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져가다 쓰면 액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요.
천도재를 지낼 때 보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도의 원리를 모르고 신심이 없는 유족들은 그 보험금을 나눠 쓰고 맙니다. 그때 영가는 어떨까요. 자기에게 공을 빌어줄 줄 알았는데 공덕을 쌓아주지 않습니다. 영가는 어두운 미로에서 고통 받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상생상극의 인연이 생겨납니다. 몰라도 이러는 것입니다.
시주를 할 때도 조건적인 것은 곤란합니다. ‘사은님, 기도비를 얼마 낼 테니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하는 이런 기도 어떤가요. 기도라는 것은 축원, 즉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법신불전에 맡기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저를 다 바치겠습니다, 비우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에서 계교를 하거나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거래를 하는 기도발이 안 통하면 신앙을 떠나고 버립니다. 그런데 기도는 것은 반드시 위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진리불공이지만 실질적인 노력인 실지불공이 있어야 합니다. 실지불공을 안하면 그 둘을 합친 총점이 낮은 것입니다.
시주를 받는 자도 청정해야 합니다. 시주를 어디에다 할 것이냐. 이왕이면 공적인 것에다 해야 합니다. 지금 밥을 먹을 때 주의하라는 것이나 삼륜이 청정함을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할 때 일심을 챙기고 공적인 의식을 가질 것을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과의 관계성, 즉 공적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발심하기 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죠. 그러나 공적 집단에 들어오면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하는 것에서 주위를 위해야 하는 것, 세상을 위한 것까지 빨리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됩니다. 처음에는 괴로워서 몸부림칩니다. 이때 못 참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가해서 영산이나 익산에 한두 달 있다가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적 개념이 안생기면 구속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유를 찾으러 왔는데 이게 뭔가 싶을 것입니다. 사실 구속 속에서 자유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제재하면 자녀들은 반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반항합니다. 왜냐면 컸잖아요? 대산종사님께서 법타원님이 교화부장 시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유치원, 어린이집이 한두 개 있던 시절에 100개로 늘리라고 하셨습니다. 법타원님은 처음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싶었대요. 하지만 얼마 전에 법타원님과 통화를 했는데 이제 그 뜻을 알겠다고 하시더군요. 여러분들도 이해되시겠죠? 어린이 교육, 유아 교육에서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가정교육에서 인품과 성품 교육이 바로잡혀야지, 커서 고치려면 정말 잘 되지 않습니다.
‘민들레영토’를 만든 사람이 원래는 목사였죠. 왜 성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할까요. 봤더니 설교를 할 때 신도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잘 들을 줄만 알았지 실생활에서는 바뀌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아니 이럴 바에야 설교가 뭐 있느냐 싶어서 그만두었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책을 보고 차도 마시고 했던 것이 편했던 것이 떠올라 민들레영토가 만들어졌습니다.
교화와 교육의 대상은 젊은 층이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도 더 큽니다. 애를 낳기 전에 결혼을 막 한 사람들이 임신, 태교, 육아의 과정에서 어떻게 심법을 써야 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소홀히 하는 면이 있어요. 한 해에 21만 쌍이 결혼해서 12만 쌍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도 준비가 많이 부족해서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야 하지만 기본적인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는 청량리 588 여자를 데리고 살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저 여자도 변화시킬 자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실패하는데 하물며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결혼과 출산을 하는 경우, 잘못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 안의 진리를 착안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赴焚修하되 須早暮勤行하고 自責懈怠하며 부분수 수조모 근행 자책 해태 |
⇒ “예불하고 수행해 나아가되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행하여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꾸짖으며”
분(焚)은 ‘향사를 분’자입니다. 향을 사릴 때 조석으로 근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향을 사를 때 뿐 아니라 예불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합니다. 조석심고 등도 포함됩니다. 이때 근행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잖아요. 과거에는 저녁에 해가 지면 그냥 잤습니다. 지금은 전기를 과다하게 쓰고 원자력 때문에 난리죠. 새벽 3시까지 불 켜놓고 게임도 하고 그래요. 저녁에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음양의 기운이 저녁에는 참회반성을 하고 자라는 것입니다.
아침의 핵심은 수양정진, 낮에는 보은봉공, 그리고 저녁에는 참회반성입니다. 이게 참 아가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많이 있나요? 저녁에는 TV보고 게임하고 술 마셔야 합니다. 낮에는 돈 벌러 일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정신으로 깨어서 일을 합니까? 거의 없죠. 그럼 아침에는 어때요? 아침이 저녁이고, 저녁이 아침이죠. 밤을 늦게 자니 아침도 아침이 아닙니다. 건강과 일과가 깨지고 무시선의 수행도 깨지는 것입니다.
24시 영업 시스템이 우리나라가 최고 잘 되는 것 같아요. 미국에 있는 가게들도 한국인들이 다 하는 것 같더군요. 유럽에서는 해가 지면 손님들이 와도 문을 닫습니다. 그것이 유럽인들입니다. 그러면 그 장사꾼이 시간이 되어 셔터를 내리듯이, 나는 저녁에 셔터 내리듯이 자고 셔터 올리듯이 일어나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책해태’는 스스로 해태를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군대 가면 사고가 언제 가장 많이 나는지 아시나요. 통계에 따르면 한가한 부대가 가장 많아요. 한가할수록 망념이 많이 납니다. 처음 출가하면 행자 시절에 일을 가장 많이 시켜 돌립니다. 옛날 집 생각, 다른 생각들을 못하게 합니다. 바쁜 사람들은 남의 과실을 말할 시간이 없어요. 한가하니까 한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남을 씹어요. 중생들은 한가하면 수행을 안 하고 죄를 짓습니다. 한가하면 나태해서 번뇌망상이 많아집니다. 한가하면 수양을 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자거나 게임하거나 뻘생각을 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가관입니다.
정시일심(靜時一心) 동시보은(動時報恩)이라고 하거든요. 한가할 때는 일심공부가 핵심입니다. 번뇌가 아니라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수행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가하면 TV를 보거나 잡담을 하고 뻘짓을 합니다. 한가할 때는 일심으로 미래를 준비하든가 해야 합니다.
知衆行次하야 不得雜亂하라. 지중행차 부득잡란 |
⇒ “대중이 행하는 차례를 알아서 뒤섞여 어지럽지 않게 해야 한다.”
지중행차, 대중에게 나아갈 때는 차례를 지켜야 합니다. 스님들도 아침에 예불을 하면 앉는 순서가 있고, 나갈 때도 순서가 있어요. 그것이 차(次)입니다. 구산스님이 송광사에 있을 때 “너희 숟가락 잡을 힘과 제 발로 해우소 갈 힘이 있으면, 예불과 울력을 나오라” 하셨습니다. 울력은 공동작업을 뜻합니다.
이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주의, 자유방임주의, 이기주의가 들어가면서 요즘 사람들은 합력에 약합니다. 같이 일을 해도 한두 사람의 일보다 서너 명의 일이 재미납니다. 오늘도 교당에서 봉공회, 기총이 같이 일을 하더군요. 같이 하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동의 일을 보면 갑자기 내 일이 바빠지고 모르는 척 합니다. 나의 입장(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公)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미래사회에서는 공심 있는 사람, 배려하는 사람이 환영받습니다. 깨닫는 것도 같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방에 한 사람이 앉아있다면 공부가 될까요. 한분 한분이 모여서 지금 이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사적 개념이 있는 사람은 벌써 대중의 기운을 받지 못합니다.
부득잡란, 잡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같이 함께하면서도 나의 것을 챙기는 양쪽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같이 하면서도 실속이 있어야 해요. 대종사님이 미워한 사람은 공동작업할 때 혼자 선 한다, 공부한다 하면서 빠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면 많이 혼내셨습니다. 그것은 참 손해라는 것입니다.
제가 원불교학과 다닐 때 목요일 4시인가가 공동작업 날이었습니다. 배추씨나 상추도 심고, 그걸로 김장을 합니다. 풀도 매고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레포트를 쓴다, 책보겠다, 아프다, 선을 하겠다,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후 5시 30분은 식사 시간입니다. 뻔뻔한 사람들은 와서 먹고 낯짝이 있는 사람들은 빠지고 굶습니다. 이날이 일주일에 한번 고기가 나옵니다. 저녁 식사시간에는 작업 중 있었던 일을 재미나게 얘기하며 밥을 먹는데, 울력에 빠졌던 사람들은 누가 왕따시키지 않는데도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같이 하면 사반공배입니다. 나만 독자적으로 하려는 생각이 대중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힘을 못 받는 것입니다.
저랑 같이 간사하다가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간사시절에 그 사람이 종로에 수제비를 잘하는 곳이 있으니 밥을 사겠다고 합니다. 저는 별 생각이 없이 알겠다고 했습니다. 식당에 교무님께 오늘 저녁밥을 안 먹겠다고 했더니 교무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그때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그때 교무님이 화내신 이유를 압니다. 식사가 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기운을 통하면서 가족임을 확인하는 것인데, 누가 안 오면 식구에서 빠진 느낌입니다. 교당 아침좌선도 빠지면 따로 노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교무가 되어서도 아침 좌선은 집에서 안하고 꼭 교당에서 했습니다. 집에서 좌선을 해도 기운을 같이 타지 못하거든요. 저녁심고도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 기운을 타고 쉽게 힘을 얻는 것입니다. 같이 하는 것, 이것이 쉽게 힘을 얻는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같이 안하는 것이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생은 영리하게 자기 일만 하는 것 같아도 실은 손해라는 요훈품의 법문이 있죠. 설거지를 할 때 같이 하고, 공동작업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백수도 바쁘답니다. 개인 사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미리 조절해서 같이 해야 합니다. 교당에는 교화단도 있고, 부서도 있고, 봉공회 등의 소모임도 있습니다. 거기서 보면 마음을 잘 합력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만이 아니라 공부이기도 합니다.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대종사님도 대각 후, 은연 중 사은의 도움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업을 해도 혼자서는 독불장군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讚唄祝願하되 須誦文觀義언정 不得但隋音聲하며 찬 패 주원 수송 문관의 부득 단수 음성 |
⇒ “(불보살을) 찬탄하고 원을 빌 때는 모름지기 글을 외우면서 뜻을 관하며, 오로지 음성만 따라도 안 되고”
찬패는 범패입니다. 생일축원이나 천도재 등을 할 때를 얘기합니다. ‘수송문관의’, 그 문장을 외우고 뜻을 새기는 데 있어서 건성으로 하지 말고 정성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랑 좀 해도 될까요. 제가 천도재나 기도할 때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목소리가 좋고 해서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저는 정말 정성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피곤할 것 같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끝나면 힘을 얻습니다. 때로는 목도 아프고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정말 가득차고 좋습니다.
어떤 교무님은 혼자서 천일기도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것이 무시선인가 싶어도 아닙니다. 교도님들 생일기도에 함께 기도하고, 천도재도 같이 정성으로 합니다. 동시에 나의 수행과 축원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도들을 위한 일만 하지 않습니다. 애들을 가르치는 것,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정성으로 또 일심으로 하면 그것이 바로 선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독경할 때 일심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심으로 해서 그것이 수행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부득단수음성’입니다. 독경을 하는 사람은 3일간 입을 닫으라는 말도 있습니다. 망녕된 소리로 기운을 흩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받아들여서 그냥 입을 닫는 사람도 있어요. 함께 염불하는 것은 나의 뜻을 새기는 것도 있지만 기운을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나의 선정 진경이 좋다고 안하려 합니다. 사적인 생각이 강한 사람은 자꾸 따로 놀려고 합니다. 같이 독경을 하는 것은 동지들 간에 서로 기운을 타겠다는 것입니다. 영어 시간에 수학을 공부하면 되겠습니까. 입정할 때는 입정을 해야 합니다. 독경할 때는 독경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법회에서 설법을 듣는 것은 법회 공덕의 30% 정도라 생각합니다. 독경, 분향, 사배 등을 하면서 자기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례고 통과 의식이라고만 생각하고 대충 한다면 7,80프로의 재미와 공덕을 놓치는 것입니다. 늦게 온다거나 한다면요.
不得韻曲不調하며 瞻敬尊顔하되 不得攀緣異境이어다. 부득운곡부조 첨경존안 부득반연이경 |
⇒ “염불 가락을 고르지 않게 하지 말며, 존안을 공경히 뵙되, 다른 경계를 떠올리지 말 것이다.”
운곡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도 독특한데 다른 사람이 신경질까지 나게 합니다. 낮춰야 합니다. 자기 귀로 자기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입만 뻥긋거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도 울력입니다. 같이 부처님의 뜻을 새기고 부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참배하는 것입니다. 나만 마음으로 새기겠다? 벌써 공적 개념이 안 들어간 사람입니다.
‘첨경존안’, ‘첨’은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경’은 넓게 얼굴을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바라볼 때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고 부처님을 향한 마음으로 일심을 해야지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변을 기웃거리고 신문보고 핸드폰보고 이건 안됩니다.
‘부득반언이경’, 다른 경계에 얽히고설키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가한 사람이 머릿속으로 세속을 생각한다거나 하지 말고, 그 일 그 일 일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당에서도 뒤에 앉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가 완도에 근무할 때 일주일 내내 평균 서너 시간도 못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가기 전에는 토, 일요일 내내 직원들이 잠만 잤다더군요. 저는 교화에 꿈이 있어서 완도교당이나 불목교당을 가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정말 일어나기 싫을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제원아, 니가 이러면 나중에 현장교화에 가서 교도들에게 빨리 와라, 빠지지 마라 할 수 있겠느냐’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법회에 안 늦고 안 빠졌습니다. 잠은 오후에 잤습니다. 그때 재가교도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마음을 챙기고 돌리는 것이 공부입니다. 다른 경계에 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須知自身罪障이 猶如山海하고 수지자신죄장 유여산해 |
⇒ “모름지기 자신의 죄장이 마치 산과 바다와 같음을 알아서”
‘수지자심죄장’, 자기 자신의 죄장을 알라는 것입니다. 죄장이 얼마만큼 있나요. 마치 산과 바다같이 죄장이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 이런 생각 많이 하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주면 되지, 나쁜 짓 안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요. 그러나 세상의 가장 큰 죄업이 무엇인지 아세요? 잘못을,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정(定), 혜(慧), 계(戒) | |
내(內) |
탐심, 성냄, 어리석음 |
외(外) |
재, 색, 명리, 식욕, 수면욕 |
→ 신(身), 구(口), 의(意) |
저도 원불교를 만나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나도 이걸 몰랐다면 나 잘난 맛에 살겠구나, 나를 위해서만 살다가 죽을 뻔 했구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부모로부터의 은혜, 천지자연의 은혜, 주위 사회 국가 선진님들 조상들 등 많은 공도자들의 은혜, 질서를 지키는 법의 은혜- 즉, 천지 부모 동포 사은의 은혜v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은만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 이생에 부모은을 몇 프로나 갚을 것 같나요. 제가 볼 때 10%만 갚아도 효자, 효녀라는 말을 듣습니다. 즉 10분의 1도 못 갚는 것이 우리의 빚지는 생활입니다. 요즘 방사능 비 때문에 한 방울도 안 맞으려고 우산을 쓰고 난리죠. 해산물이 안 팔리구요. 그동안의 천지 자연의 은혜는 생각 안합니까.
더 구체적으로 나 혼자 엘리베이터 타는 것, 수돗물 타는 것을 거꾸로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방사능 오염의 주범입니다. 걸어도 되는데 탔고, 아껴야 하는데 무념하고 낭비했습니다. 그래서 전기 쓰고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를 초래했습니다. 알고 또 모르고 지은 업이 얼마나 많으냐는 것입니다.
외부세계는 재색명리식수의 경계입니다. 내 안의 탐심, 성냄, 어리석음이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업을 지었느냐 이것입니다. 어리석음 하나만 봅시다. 몰라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부모은을 얼마나 갚습니까. 엄마는 나를 야단치는 대상, 내가 뗑깡 놓는 대상인가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여러분이 인도나 나이지리아에 태어났다 생각해 보세요. 국가의 은혜, 유공자나 세금을 낸 공도자들에 대해 생각하며 살고 계십니까? 저 같은 성직자나 교무만 공도자가 아닙니다. 세금을 내서 학교를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인 효과를 가게 하는 사람들도 모두 공도자입니다.
이렇게 사은의 공물로서 사는 나인데 겨우 나 하나,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삶의 목표를 잡는다면 그 죄업은 산해의 몇 배는 될 것입니다. 몰라서도 많고, 알지만 욕심 때문에 많고, 이루고 싶을 것을 못 이뤄서 화가 나서도 많습니다. 그래서 정혜계입니다. 그것이 수행자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돈 많이 벌고 직장 잘 잡아서 좋은 배우자와 잘 사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탐진치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정혜와 배려, 봉공의 세계를 그런 사람이 알겠습니까. 인과에 따라 복을 지은 사람이 적으니 받는 사람도 적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결국 이것입니다.
須知理慘事慘으로 可以消除하라. 수지이참사참 가이소제 |
⇒ “모름지기 이참과 사참으로 가히 소제할 줄을 알며”
여러분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교당에 오셔서 웃고만 다니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주 간 ‘신구의’로 지은 삼업의 죄업을 참회하고, 다시 마음을 챙겨서 가겠다는 마음으로 와야 하지 사람들과 웃고 재미만을 찾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수행이 8,90프로가 되는 것이 법회입니다. 교무님이 잘 준비해서 설법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참회하고 염불하고 해야 합니다.
이참, 사참은 법당에서 법신불전에, 또 스승 앞에 허물을 말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후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라고 대종사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주에 4강으로 하겠습니다. 다음 발표자도 한자의 음과 순서를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석도 내용별로 끊어서 내 시간은 들더라도 최대한 대중에게 은혜가 되게 해주세요.
<질문과 답변>
* 질문 (서덕안 일반교도)
음식문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TV에 주로 나오는 얘기가 맛있는 음식,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한 것이 트렌드가 되는 것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급합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 맛있다, 몸에 좋다 하는 말만 나오지 정신이 들어있다는 느낌은 받기 힘듭니다. 그런데 제작진들이 그렇게 프로를 만드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정신을 맑히는 것이 대중에게 외면 받고 시청률이 안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이 일반인에게 관심을 끌지 못할까요.
* 답변
그것도 죄업으로 놓고 보면 죄업입니다. 대중의 관심이 기운, 정신을 보는 음식문화가 아니라 당장에 맛있고 당장 즐기는 것만 생각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보고, 영상 제작자는 시청률을 봅니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죠. 러시앤캐시 같은 광고에 많은 연예인들이 나왔다가 대중의 몰매를 맞았죠. 그래서 이제 인형이 합니다. 이것이 시민의식입니다.
그것에 따라 프랑스 시민혁명도 일어나듯 시민의식 수준에 따라 개혁이 일어납니다. 나의 무관심 때문에 우자가 큰소리치게 됩니다. 선거안하는 것, 물론 죄업입니다. 하고 안하는 것은 본인 자유이지만 우자가 지도자가 되게 만들었으니 죄업인 것입니다. 지자를 볼 수 있는 눈을 못 가진 것입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대중인데 이 대중의 의식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요. 끌려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선도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모든 분야가 각기 있습니다. 묘하게도 대중은 모이면 천박해집니다.
유명인이 죽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하지만, 수백 년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진짜 영향력 있는 사람은 별 볼일 없이 죽어가지만 대중의 의식에 영합하는 사람이 요란하게 떠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의식입니다.
나 하나는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불교를 다녀도 나 하나 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이나 대중 속에서 시민 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에게 오늘 여기서 배우신 하나를 해줘야 합니다. 혹은 집에서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군대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민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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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5월달 타이핑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