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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천국으로 부르신 하나님
심장이 멎으신 아버지
3월 23일(목) 12시 안팎, 나는 미아사거리 현대백화점에서 식사중이었다.
그 자리에는 이사장님과 사무국장, 그리고 교장, 교감, 교무, 그리고 내가 함께 자리했다.
12시 25분쯤 전화벨이 울렸다.
남동생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하다가 식사하며 대화하는 중이라 받지 않았다. 이어서 남동생의 아내인 제수씨가 전화를 해왔다. 순간 직감적으로 드는 생각.
‘아,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터져나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주버님, 아버님이 심장이 멎으신 것 같대요.”
희한하게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마음은 더욱 차분해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네, 제수씨, 제가 전화 바로 드릴게요.”
나는 옆에 식사하고 계신 이사장님께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이사장님, 제가 급히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장님의 눈빛은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급하신 일이라면 그렇게 하셔야죠.”
이어서 김교장님이 말씀하셨다.
“최선생님, 조금 있다가 같이 일어나죠. 식사도 거의 다 했는데~.”
교감, 교무부장 선생님도 같은 뜻의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이 금방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학교로 가는 길에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119를 급히 불러 아산병원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병하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아버지 상황은 어떠니?”
“응, 심장은 멈춘 것 같다는데, 계속 119대원들이 조치하고 있어. 금방 병원에 도착할 것 같아.”
나는 교직원공제회에서 운영하는 ‘예다함’ 상조회에 전화를 걸어 준비를 부탁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 내 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마음을 나에게 부어주고 계셨다.
먼저 몇 군데 전화를 했다. 다음 날, 24일 금요일 저녁에 예정되어 있는 광주새순교회의 저녁집회를 취소해야 했다. 25일 토요일 낮 신혼부부학교와, 저녁에 부천 아버지학교 강의도 취소해야 했다. 내 가정의 일로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빨리 연락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그분들께 어려움을 드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모두 이해해주시고,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셔서 감사했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기도하고
조문객들에게 드릴 글을 써서 복사를 한 후,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서울아산병원, 안치실 옆 대기실에 아버지는 하얀 가운으로 덮여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남동생이 울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그리고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걷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그동안 이 땅에서 정말 애쓰시고, 우리 4남매 키우느라 수고하셨어요. 이제 천국에 들어가신 아버지, 다음에 천국에서 뵐게요~~. 제가 기도할게요.”
가족들이 나와 아버지의 시신 곁으로 모였다. 나는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버지 최원근을 1941년 4월 6일 이 땅에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2017년 3월 23일 오후 1시 3분 천국으로 입성하게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가 이 땅에 살아가시며 어려움과 힘겨움도 있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에 만나주시고, 구원의 은혜주셔서 평안한 가운데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제 아버지는 예수님 곁에 계심을 믿고, 이 땅에서의 모든 천국 환송 순서를 가족들이 진행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위로와 평강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모든 순서가 은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가족 친지들이 목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영광 받으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와 나 그 영향력
나의 아버지는 5형제였던 할아버지의 네 번째 할아버지로부터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극히 내성적이었고, 고집이 무척 세고, 따뜻함이나 자상한 면이 없는 분이었다.
19살에 아버지를 장가 보내신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어머니가 시집을 온 이후 할머니가 질투하셔서 우리 가족은 두 동강이 났다. 나와 누나는 조부모께서 성북구 길음동에서 키웠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부모님이 키웠다.
내가 5학년 때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나는 아버지가 무척 미웠다. 술에 취하면 가끔씩 할머니 집에 오는 아버지를 보며 그리고 한 번 안아주거나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주지 못한 아버지를 보며, 나는 가장 분노의 대상으로 아버지를 정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커 가며 싫어하는 그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더욱 괴로워했다. 극히 내성적, 비판적, 염세적, 그리고 아버지보다 술을 더 잘 먹었고, 술에 취하면 차도에 뛰어들어 춤을 추거나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는 돌발적인 성향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췌장암에서 완치되고
내가 5대 째 믿음의 집안의 딸인 크리스천 아내와 결혼을 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만져가고 계셨다. 결국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우리 부부가 아버지를 놓고 기도한지 11년만에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그 때 나는 서부2기 아버지학교를 수료했는데, 그 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아들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학교의 숙제인 ‘아버지에게 편지 쓰기’ 과제를 해드리며 나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했다.
그 후 나의 아버지도 강동8기 아버지학교(현재 동부아버지학교)를 수료하셨다. 그리고 한동안 좋은 아버지로 변화되는 듯 했었는데, 급기야 아버지는 췌장암에 걸리게 되었다.
생존율 15%, 강남성모병원 병원장께서 직접 집도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8시간 대수술 끝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췌장암에서 완치토록 하셨다. 할렐루야. 이 과정을 통해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 18년만에 집의 제사상이 예배상이 되었고, 20년만에 교회에 나가시는 아버지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
췌장암에서 해방된 아버지는 그 후 15년간을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사셨다. 증손자를 보기까지 축복을 받으며, 그리고 4남매의 자녀 손주들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살아오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것을 원하셨다. 그래서 장남인 나보다 남동생이 그리고 제수씨가 더 많은 수고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식사량이 줄고
2016년 말, 아버지의 다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부종이라는 병, 그것뿐만이 아니라, 당뇨와 비뇨기 등 모든 장기의 기능이 약화된 듯 보였다. 급기야 성모병원에 2주일간 입원했다. 퇴원할 무렵 다리의 붓기가 빠져 괜찮을 듯 했는데, 금년 2017년이 되며 아버지의 기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병원에서 처방된 약도 하루 수십 알 씩 드셔야 했다. 아버지는 30년 이상 평생 은행원으로 살아오셨다. 그래서인지 깨끗하고 고집이 세고 자존심도 강한 분이었다.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하셨다.
급기야 식사량이 급격히 줄었다.
“아무리 먹으려 해도 맛이 없어.”
힘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드는 순간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몸에 좋다는 음식과 맛있는 것을 갖다드려도 아버지는 같은 반응이었다.
밥 한 그릇 드시던 양이 반 그릇으로 줄었다. 그리고 세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사흘에 한 숟가락 그리고 국물만 드시더니 나중에는 아예 아무 것도 드시질 못했다. 점차로 말라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갈 때마다 아버지의 팔과 손을 붙잡거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아버지는 육신이 연약해져 있었지만, 정신은 맑은 그 상태였다. 노인들에게 오는 치매라든가 하는 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병환 가운데서도 항상 대화가 가능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주무셔서 조용히 그냥 나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려온 아버지의 소리가 있었다.
“오늘은 관하가 왜 기도도 안해주고 갔어.”
그후 나는 아버지가 주무시는 순간에도 꼭 기도하고, 부모님 댁을 나서는 습관이 생겼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돌아가시기 보름 전 3월 첫주부터 아버지는 아예 자리에 누우셨다. 그리고 누워서 모든 생활을 하셔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기력은 약화되고 있었고, 열흘 전부터는 눈을 뜨기도 힘든 듯 싶었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집으로 와서 수액을 공급하고, 동생이 병원에 가 담당 의사를 만나 상담을 하며 오가던 중이었다.
나는 3월 20일 월요일 밤 형제 자매들을 부모님 댁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아버지 얼굴을 뵙도록 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내 마음속에는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회의를 했다.
돌아가실 경우 병원은 1순위로 아산병원, 2순위로 성모병원으로 하기로 했다. 기독교식 장례로 하기로 했고, 장지는 파주에 준비된 납골당 서현추모공원으로 하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형제들도 내 뜻에 잘 따라주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3월 23일 아침 학교에 출근했다. 교실 텅 빈 공간에서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제 아버지의 회복에 있다면 건강하게 속히 일어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아버지를 하나님 곁으로 부르실 계획이라면, 우리 아버지가 항상 주님과 같이 있으며,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천국으로 들어가시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학신의 눈물이었다.
감사하고 반가운 만남
아산병원에 아버지의 빈소가 차려졌다. 첫날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지하 1층 3호실에서, 다음날 지하 1층 2호실 더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예다함 교직원 상조회에서 나와 모든 진행을 세밀하고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장례를 집례할 목사님은 목포남부교회 오성준 목사님에게 부탁했다. 오목사님은 나의 둘째 처남이다.
아버지가 예수님은 영접하셨지만, 교회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 어떤 교회에 장례를 부탁드리기도 어려웠고, 처남 목사가 수고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빈소는 오후 5시경 차려졌는데 그 후 조문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섬기는 물댄동산수림교회와 학교 안 교회인 영훈오륜교회의 교역자들과 성도님들이 오셔서 위로 예배를 드렸다. 동부아버지학교와 북부아버지학교 등 여러 지역의 아버지학교 형제님들과 부부학교 사역자들, 그리고 아버지학교 이사장이신 김성묵 장로님, 안재국 사무국장 형제님도 찾아오셨다. 코스타의 이동원 목사님의 위로와 안요한 목사님,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의 방문 위로도 있었다.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큰 행사에는 생각지 못한 분들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진 사람들이나,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은사와 동료 교사들, 지인들 등 많은 분들이 방문해주었다. 모든 순서가 은혜와 평안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다.
내 딸들과 조카들이 서빙과 안내를 맡아주고, 접수처까지 담당해주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시는 분들이 모두 이상하리만치 평안함을 느꼈다고 고백해왔다. 우리 스스로도 ‘행복한 장례 절차’라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같지만, 그렇게 표현이 가능한 시간들이었다.
너무 평안헤요
서울시립승화원(벽제)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 하고, 경기도 파주의 서현추모공원의 납골당에 모셨다. 이 과정에는 장인 어른의 도움이 또한 컸다. 사촌 형수가 나에게 다가왔다.
“서방님, 세상에 이렇게 평안한 장례식은 처음예요.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몰라요. 장례는 슬픔과 아픔과 서운함이 가득하지만, 이번 삼촌 장례는 우리 모두 마음이 너무 평안해서 이상할 정도예요.”
그랬다. 날씨도, 진행 과정도, 모든 절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은혜 가운데 진행토록 해주시며, 영광 받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저의 아버지 소천에 기도와 물질로 섬겨주시고, 위로와 격려하여주신 모든 분들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버지
하늘 아래 산은 위엄이 있어 아름답고
뭍 위에 바다는 청초함이 있어 싱그럽고
하늘과 땅 사이에 나무로 사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이름을 부르오니
그분은 당신 그저 아버지 아버지라 할 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매서운 칼바람 속에
인내의 연단을 가지고 울타리가 되어주시며
아버지 당신은 따사로운 인자함으로
훈훈한 미풍처럼 마음을 녹이시는 분
그저 불러만 보아도 든든하신 그 이름 아버지
우리들의 지팡이가 되고 버팀목이 되시니
세파에 쫓기다가 당신의 그늘에 숨어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우리는 약하디 약한 눈 큰 사슴입니다
아버지 어느 날 불 꺼진 창으로
당신의 눈물이 비치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당신은 자식이라는 기쁜 멍에를 지고
가슴 깊은 설움을 인내하며 살아오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높은 산이 되며
아버지 아버지는 그 모습만으로도 푸른 바다가 되어
어리석은 우리를 감싸 안는 무지개사랑이 되며
온누리 펼치도록 아름다운 기쁨이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시인 최관하)
첫댓글 최관하선생님 위에 사진이 아버님 사진인가요?
그렇게 볼 소지가 있어 삭제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