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방승환"
방승환(본명)은 1958년 1월 20일(음력) 충청남도 온양읍 염치면 석두리 1구에서 태어났다. 방승환 집안에는 국악인이 거의 없는데 외할아버지가 꽹과리를 잘 쳤다고 한다. 방승환은 보지는 못했지만 그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양평 창대리 사람이라 한다. 방승환 형제는 모두 비국악인이다.
방승환이 국악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많았으나 집도 장만하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는 걸 보고 이제는 안심하고 있다 한다. 방승환은 어려서 석두리 마을에서 친구의 부친 김순봉의 꽹과리 연주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김순봉은 경상도에서 온 상쇠로서 경상도 가락을 쳤다고 한다. 방승환은 명절 같은 때 김순봉 등 동네 어른들의 풍물 가락을 많이 듣다 보니 그런 소리가 좋아져서 국악을 하게 되었다 한다.
방승환은 온양중학교 때 풍물 서클 활동시 상쇠를 했는데 이때 이 서클에서 초빙한
스승 조강자가 어느날 어린 여학생을 데리고 왔는데 그 학생이 바로 박은하였다. 방승환과 박은하는 이때 처음 만난 것이고 박은하는 방승환보다 한 살 연하로서
송순갑과 양도일한테 풍물을 배운 사람이라 한다. 박은하는 서대전이 집인데 국악 세습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그 부친이 국악을 좋아해서 어려서 부터 풍물을 배운 것이라 한다. 김용배 역시 국악 세습 집안 출신은 아니라 한다. 방승환은 온양중학교를 마치고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강사준한테
해금산조와 정악을 사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3년간 해금 연주자로 있다가 해금이 적성에 맞지 않아 타악으로 변경하고 처음엔 무용 장고를, 나중엔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창단 일원이 되어
김용배 작고 6개월 전까지 함께 사물놀이 연주 활동을 하였다.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초기에 조금 하다가 다들 그만두려고 해서 김용배도 그만두려 했으나 방승환만은 늘 정확한 시간에 나와 연습하고 있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김용배가 “너 때문에 나도 이 단체를 계속한다”고 격려하고 고마워했다 한다.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초기에 대부분 의욕을 가지지 못하고 많이 그만두려고 한 까닭은 월급이 너무 적어서였는데 당시 월 보수가 7~10만원이었다 한다.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는 1993년경에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가졌다 한다.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첫 단원은 김용배(쇠), 남기문(장고), 남기수(북), 방승환(징)이고
그 다음에는 김용배(쇠), 전수덕(장고), 방승환(북), 박은하(징·짝쇠)가 이 단체에서 활동 하였으며 그후 방승환과 전수덕은 탈퇴, 김용배는 작고하고
지금의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로 이어졌다 한다. 지구레코드 사물놀이 음반(LP)에서 잠깐 최병삼이 참여하여 취입하였는데
방승환 생각으로는 방승환이 이 단체에서 탈퇴하면 김용배가 그 자리에 최병삼을
넣으려 했던 것 같다고 한다. 지구비디오에서 방승환이 김용배 등과 함께 사물놀이 비디오를 찍게 된 것은
김용배가 서한범 교수와 얘기가 돼서 성사된 것이라 한다. 이 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1년 정도 지나서 김용배가 세상을 떠났다 한다. 김용배는 이 사물놀이 비디오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그건 그 이전에 서로 자주 호흡이
맞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잘 됐다는 것이지 그렇게 썩 연주가 잘 되지는 못했다 한다. 방승환은 이같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느끼고 그후로 이 비디오를 보지도 않았다 한다.
방승환의 기억에 의하면 이 사물놀이 비디오는 연습, 준비도 별로 없이
단 한번 촬영으로 연주를 마쳤다고 한다. 이 비디오를 찍고 약 6개월 후 방승환은 김용배 등과 함께 지구레코드에서 사물놀이 장시간 음반(LP)을 취입했는데 이 음반은 김용배의 꽹과리 연주가 매우 부각되어 녹음되었다 한다. 방승환은 김용배 등과 함께 지구레코드에서 이 사물놀이 장시간음반을 취입하고 난 직후 김용배와 크게 다투고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를 탈퇴하였다 한다. 지구비디오에서 김용배, 방승환, 박은하와 함께 사물놀이 연주를 영상으로 남긴 전수덕은 전사섭의 아들로서 김용배와 비슷한 나이인데 2000년에 과음으로 작고하였다 한다. 전수덕은 슬하에 아들 하나가 있고 김용배는 자손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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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