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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觀能禮所禮가 皆從眞性緣起하며 심관능례소례 개종진성연기 |
⇒ “능례와 소례가 다 진성을 좇아 연기한 줄을 깊이 관하며”
‘능례소례’라는데요, ‘소례’란 예를 받는 바 부처님입니다. ‘능례’는 예를 행하는 이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또 불전에 예를 행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나, 또 예를 받는 부처님이나 생각해 볼까요. ‘화신불’, ‘불법승’의 의미를 새겨보세요. 모두 상대자입니다. 저와 호겸교우가 인사를 하면 호겸교우는 능례자가 되고 제가 소례자가 됩니다. 제가 종법사님을 뵐 때는 제가 능례자, 종법사님이 소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능례와 소례 둘을 이야기하는데, 皆는 다(개), 전부(개)입니다. 다 진성을 좇아서 연기(緣起),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진성, 성품에 인연해서 일어난 것을 심관(深觀), 깊이 관해라 그것입니다.
여기서 진성(眞性)이라는 것은 진여진성(眞如眞性)이란 용어에서 진여(眞如)가 생략된 것입니다. 진여진성이라는 것은 참으로 같은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시지만 목소리를 듣는 주체가 있습니다. 저도 진성이 들어서 말하고 있고, 여러분도 진성이 있어서 듣고 있습니다. 능례자와 소례자가 있지만 그것은 진성이 인연해서, 진성을 여의지 않고 나온 것입니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입니다. 인연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뒤에 설명이 나오는데, 세상이 알고 보면 전부 인연관계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잘 모르면 안 됩니다. 인연관계라는 것은 너와 나, 주고받는 관계성 속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독불장군이 됩니다. 고이고 썩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이 세상은 역할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있고 주는 자가 있고 받는 것이 있습니다. 진성에 바탕한 인연생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또 평등을 말하기도 합니다.
진여진성(眞如眞性) = 평등 = 불이(不二) = 공(空) 인연생기(因緣生起) = 둘이면서 하나 |
주고받는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러면서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강자는 항상 약자와 함께 있고, 약자도 항상 강자와 함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있어서 부자가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구의 20%가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들도 80%의 나머지 사람들의 합력 속에서 가능합니다. 내가 잘나서 강자가 아니고 돌고 돕니다. 어떤 강자도 약자가 됩니다.
오는 자와 가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진성은 하나입니다. 진여 진성은 오고감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시 오는 자가 있고 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비어있습니다. ‘텅 빈 충만’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없는 가운데 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나’가 있어지든 없어지든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알아야 원망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바탕하여 있는 것입니다. 평등한 빈 자리에 바탕하여 차별세계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 차별이 아닙니다. 그 이면으로 들어가 봤더니 평등한 세계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죽어서 아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선 진성자리, 성품자리에는 노소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深信感應이 不虛하여 影響相從이니라. 심신감응 불허 영향상종 |
⇒ “감응이 헛되지 않고, 본래 바탕을 좇아 그림자처럼 생겨남을 깊이 믿을지니라.”
서로 인연생기한다고 말씀드렸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응이 헛되지 않는 그것이 영향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이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저 혼자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자에는 반드시 형체가 있습니다. 달이 강에 비칠 때, 달은 따로 있습니다.
響(향)은 소리 (향), 메아리 (향)입니다. 메아리도 처음 본래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메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울리는 소리, 나타난 그림자를 볼 것 같으면 반드시 본래의 소리가 있고, 그것을 따라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감응도 똑같습니다.
감(感) = ↑ |
응(應) = ↓ |
감(感)은 내가 부처님한테, 진리전에, 허공에 정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대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응(應)입니다. 올리면 응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감이 있으면 응이 있습니다. 응은 시기, 상황, 정성에 따라서 다릅니다.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습니다. 가피, 가호라고도 합니다. 세가지 감응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현전가피 (現前加被)
‘현전가피’라고도 하고 ‘현증가피(現證加被)’라고도 합니다.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증명한다,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전에 인천교의회 의장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전농교당에 있을 때 연천의 훈련원에 갔습니다. 그때 강연자로 모셨더니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수입 목재상이어서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도 하고 하셨습니다. 정산종사생가도 그분이 구입하셨고, 대구교당 건축자재도 대 주셨습니다. 그분은 중간에 신심이 나신 케이스입니다. 당시 빚도 있었고, 건축 경제도 죽어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정산종사 생가엘 가보았더니 다 쓰러져 가고, 주인도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속이 상해서 ‘내가 이걸 사야지’ 하고 발심을 하셨습니다. 대구교당도 보시면 내부가 좋은 나무로 잘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그 전에 장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그런 서원과, 어떤 스승님께 보은하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개인적인 빚이 많은데도, 교구장님께 가서 교당의 목재를 대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그 후에 다른 가게는 장사가 안 되는데, 그분의 가게만 성황이었습니다. 나중에 계산을 해봤더니 그분의 희사한 만큼 딱 떨어지게 수익이 났답니다. 그때 어려워서 사업을 접었다면 그 수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성과 마음으로 했더니 사업이 되었습니다. 희한하게 더는 안 주셨네요. 실화입니다. 이것이 현전가피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보은할 마음을 먹으면 가피가 옵니다. 그것이 감응입니다. 메아리는 보내는 원래 소리가 있고, 그림자는 본체가 있듯이 감응은 기도가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가 이것입니다.
2. 몽중가피 (夢中加被)
종교생활을 하면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신앙적 체험입니다. 꿈속에서 어떤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분이 돌아가셔서 천도재를 지내는데, 6재쯤 되자 자식들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너희의 정성으로 내가 곧 몸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런 것입니다. 중도훈련원이 20여 년 전에 당시 46억 원을 들여서 지었습니다. 이건희씨 부부가 지어준 것입니다. 원불교에 그런 돈이 없죠?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드릴게요. 호암 이병철씨가 돌아가신 후 그분들 꿈에 나타났습니다. ‘내가 돈은 많이 벌었는데 천도가 안 된다. 돈은 많이 벌었어도 베풀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내 이름으로 꼭 불사를 해달라’고, 아들과 며느리의 꿈에 똑같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했죠. 그래서 교무님들이 훈련을 나는 중도훈련원을 단독 불사로 한 것입니다. ‘중도훈련원’이란 이름은 중산, 도타원님의 법호를 따서 지어졌습니다. 지어지자 ‘고맙다, 덕분에 홀가분하다’고 다시 꿈에 나타났습니다. 참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죠.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제가 시험공부를 하는데 꿈에서 공부를 했다는 얘기요. 또 <대산종사 3집>을 읽을 때 먹고 싸는 시간 외에는 눈을 못 뗐습니다. 간사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법문이 좋아서 미치겠더라구요. 그때 꿈에 대산종사님께 인사갔더니 막 나타나서 저한테만 법문도 해주시고, 꿈에 같이 탁구도 쳤습니다. 꿈은 내 마음의 그림자이고 생활의 그림자입니다. 꿈은 마음이라는 본체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법강항마위 정도가 되시려면 대종사님부터 경산 종법사님까지는 다 꿈에 나타나야 합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여러분들 꿈에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열 둘 뿐인가요? 남의 나라 대통령보다 우리 아버지가 더 가까운 것입니다. 대종사님도 봐야 하지만, 해당 교무님도 꿈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몽중일여요 몽중가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운이 연해집니다. 그런 꿈도 마음의 그림자이고, 감응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대단히 많습니다. 꿈에서 스승님들을 못 뵌 분들은 다시 신심을 체크해 봅시다.
3. 명훈가피 (冥勳加被)
앞의 둘은 급하면 나타나지만, 이것은 자연스럽고 알게 모르게 나타납니다. 제가 옛날에 버스를 광주에서 타려고 했는데, 묘하게 못 타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가버렸더군요.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차를 탔는데 앞 차가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우연찮게 타지 않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티켓을 끊으러 가면 앞 사람들이 표가 없다고 빈손으로 돌아가는데 저는 중요한 때는 항상 표를 줍니다. 원남교당 시절에 정토회원이 녹용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녹용을 구할 방도는 없어서 아침에 그냥 들어 넘기고, 교당엘 갔습니다. 당시 경동보화당에서 건강원을 하시는 분이 교도로 계셨는데, 그날 느닷없이 녹용을 들고 왔습니다. 교무님 필요하시지 않느냐고 쓰라고 하더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많고 많은 물건 가운데 그걸 들고 오다니 희한해서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기도를 한다든가, 오롯하고 사심이 없으면 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천록’과 ‘감응’입니다. 그림자와 메아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 합일해 들어가면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경계 따라 마음을 잘 챙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인 체험이 있을 때 “아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로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나 염불 등을 함부로 알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체험이 있으면 잘 하게 됩니다. |
가피라는 것도 인연생기로 알게 됩니다. 감을 통해서 응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 드렸습니다. 진성은 법신불이고 내 마음입니다.
기도에 대해 보충해서 더 말씀을 드려볼게요. 기도가 욕심이 있으면 효용이 떨어집니다. 텅 빈 나의 본래 자리에 하나가 되고 보면 나에게 알아서 그런 천지 같은 위력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력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 감응에 대해 신심이 약한 사람은 이것이 무속 같다, 무슨 위력이 있는가 생각합니다. 나 혼자 기도보다 부처님의 위력과, 또는 대중과 다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삼천 배 하다가 장애인이 일어나고 하죠. 과거 현재 미래의 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이 삼천 배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위력이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응, 가피, 위력입니다.
그런 것을 마음 깊이 믿어야 합니다. 신심입니다. 사실 가정, 회사, 동업 관계에서도 믿지 않으면 깨지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무당에게 가서도 믿지 않으면 그 무당은 능력 발휘를 못합니다. 나의 정성은 반드시 부처님께 전해지고, 그 위력은 메아리와 그림자와 같이 내려올 것이라는 것을 깊이 믿으라는 것입니다.
居衆療하되 須相讓不爭하며 須互相扶護하며 거중료 수상양 부쟁 수호상부호 |
⇒ “대중처소에 거하되, 모름지기 서로 양보하여 다투지 말며, 모름지기 서로서로 도와 보호하며”
‘중료’는 대중방인데요, 큰방, 대중방, 선방 등입니다. 중료에 산다거나 머물 때는 모름지기 ‘상양부쟁’하며, 즉 서로 사양해서 부쟁,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처음에는 기운싸움, 마음싸움을 합니다. 내가 먹으려는데 집어버리네, 내가 하려는데 쟤가 먼저 하네, 하면서 기운이 뻗지르죠. 그러다가 말로 싸우고 몸으로까지 싸우게 됩니다. 싸우지 않는 것은 양보이고 배려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서로서로 돕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싸우고 계십니까? 집에서는 TV 채널로 싸우죠. 예전에 딸들이 방 하나로 쓰니까 하도 싸워 대길래 방 둘짜리로 옮겼습니다. 서로 양보해야 하는데 내 것으로 하려고 하니까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愼諍論勝負하며 신쟁론 승부 |
⇒ “승부를 다투어 논함을 삼가며”
‘신쟁론승부’라네요. 삼갈(신)인데 무엇을 삼가라고 하냐면 논쟁승부, 승부를 하고 논쟁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승부에는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긴 자도 반드시 지게 되어있습니다. 시비하지 말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자기의 저울이 틀렸거나, 자기의 안경이 색깔안경이면 어쩔 것입니까. 자기가 아직 알지도 못하면서 시비 논쟁을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화(和)해야 합니다. 먼저 심화(心化), 마음으로 화합니다. 그리고 기화(氣和), 기운으로 화합니다. 그리고 인화(人和)입니다.
마음으로 싸우고 기운으로 싸울 것입니까, 아니면 화할 것입니까. 화하는 것은 양보와 배려에서 오는 것입니다. 긴 숟가락을 만들어서 두 부류를 실험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로 웃었답니다. 서로 해주는 팀은 잘 먹지만, 각자 먹으려던 팀들은 엉망이었답니다. 누가 양보하면 타인도 양보합니다. 그러나 한 집단에 이기주의가 하나 들어오면 손해 보기 싫어해서 그 기운이 따라갑니다. 그러나 신앙인, 공부인이 들어가서 베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그것을 이용하고 바보 취급합니다. 하지만 하다 보면 바뀌게 됩니다.
그런 예가 많죠. 누가 동네를 쓸기 시작하자 “한가한갑네” 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같이 쓴다고 합니다. 저도 간사시절부터 교당 옆까지도 다 쓸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 안암교당도 그렇게 합니다. 사람들은 "네가 잘하면 나도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가 먼저 잘할 것입니까. 마음공부하는 사람이 먼저 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우리도 생각해봐요. 누가 나한테 잘해주면 나도 잘하고 싶지 않습니까. 배려와 양보라는 것은 내가 먼저 잘해주는 것입니다. 양보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승부를 논하지 말라는데 사실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보이는데 어떻게 하죠? 일단 멈춰야 합니다.
1. STOP 2. THINK 3. 말, 실행 |
집단의 수준이 낮을수록, 수행이 약할수록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라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멈추고, 이것이 은혜가 될지 안 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공부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니가 멈춰서 좀 해라" 이것이 아닙니다. 내가 멈춰서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양, 연구, 취사입니다.
논쟁이나 승부에서 내가 멈추려면 멈춰집니까.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기본이 좌선입니다. 좌선은 앉아서 호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생각을 계속 멈춰서 단전에 갖다놓는 연습을 수십 번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제 경계에서 내가 생각을 멈출 힘이 생깁니다.
수양으로 연습을 하지 않으니 경계에서 멈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골프선수, 야구선수들이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합니까? 생각 없이 한 한마디가 집단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싸움을 만듭니다. 그 속에서 상극의 인연이 생기기도 하고 합니다. 우리 원불교도 30개 계문 가운데 여섯 개가 말에 관계된 것입니다. 구업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미안해, 안들은 걸로 해.” 하고 맙니다. 하지만 상대는 맞은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상태입니다. 구체적인 예는 참 많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북돋우기는커녕 말을 해서 꺾어놓습니다. 초입 교도들이 와서 하는 얘기 중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은 얘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반성과 대조를 안 하니 가해자는 모르고 피해자만 속이 탑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마세요. 다 소중하고 자기가 믿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걸로 이겨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싫어하는 기독교인들, 여러분들보다 새벽에 기도도 더 잘 하고 예배도 안 빠져요. 그분들이 더 잘하는데 뭘 시비하고 논쟁합니까? 교당 내에서 물론 회화는 해야 합니다. 그때도 내 한마디는 허공 중천에 씨앗이 박힌다고 입 딱 닫고 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래도 안 돼죠. 본의 파악이 중요합니다.
말을 하면 행위를 보지 말고 본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행위를 하라는 본의가 뭐였는지 생각을 해야 나중에 다른 일에 응용할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행위만 보고 본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음에 또 와서 같은 얘기를 합니다. 안 가르쳐주는 것이 은혜라는 것은, 그 행위의 이면을 네가 알아서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더니 은혜가 안 되기도 하더군요. 저도 답답합니다.
愼聚頭閒話하며 愼誤着他鞋하며 愼坐臥越次니라. 신취두한화 신오착타혜 신좌와 월차 |
⇒ “머리를 모아 한가롭게 얘기하는 것을 삼가며, 남의 신발을 그릇 신음을 삼가며, 앉고 누움에 차례 어김을 삼갈지라.”
‘신취두한화’, 머리를 맞대고 한가하게 말하지 말랍니다. 중생들은 한가하면 머리 맞대고 뭐하죠? 상사 씹고 타인의 잘못을 말하고 연예인 누가 어쨌다더라 말합니다. 제가 왜 훈련 가면 강연 제목을 먼저 뽑게 하는지 아시나요? 결제식 때 뽑는 이유는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나서 연예인 얘기, 미용실 얘기, 세일 얘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뭐 하러 왔는지, 참 마음을 되돌아보러 훈련에 온 것을 돌아보라는 소리입니다.
휴식시간을 훈련시간에 많이 줘야 하느냐, 아니면 적게 주는 것이 좋은가 고민이 많습니다. 부교무님과 요즘 회의중인 성지순례도 그래요. 자력이 있으면 많이 주는 게 좋습니다. 성지순례 때도 스스로 느껴보고 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그러나 자력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이상한 소리만 계속 할테니까요. 법정스님이 “진정한 수행자는 대중방에서는 토굴처럼 하고, 토굴에서는 대중방에 있는 것처럼 한다”고 하셨답니다. 권투선수 알리도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대중방에서는 토굴에 있는 때처럼 조용해라 이것입니다. 떠들지 말라는 거죠. 토굴에서는 대중방에 있는 듯이 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혼자 있을 때는 대중 속에 부지런히 하는 것처럼 근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수행자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계속 챙기라는 얘기입니다. 내면, 자기 마음을 살펴서 진성을 여의지 말고 자기 마음을 부려 쓰라는 것입니다.
‘한화잡담’에는 쓸데없이 채팅하는 것도 마찬가지 해당됩니다. ‘네이트온’ 이런 거요.
‘신오착타혜’라는데 ‘오착타혜’는 다른 사람의 신을 잘못 신고 가는 것입니다. 오래 다니는 교도는 ‘내 신발을 누가 잘못 신고 갔구나’ 하고 알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온 교도가 어제 산 신발을 누가 신고 갔다면 그는 다시는 안 옵니다. 나의 잠깐의 방심이 한 사람의 인연을 끊어놓습니다.
대종사님이 영산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일하는 그에게 누가 말했습니다. 그 문답이 이렇습니다.
“넌 공부하다더니 일만 하냐?” / “아니에요. 이게 공부에요.” / “너희 원불교에서 누가 신발 잃어버렸다며? 신발 도둑이 마음공부하면 뭐 한다냐?”
심지어 친척 아저씨가 그랬다고 하죠. 대답이 이어집니다.
“아저씨, 서당 다녀 보셨죠? 서당 처음 가서 뭐 배우셨어요?” / “글세, <천자문>이랑 <소학>을 배웠던가?” / “그럼 그 다음에는요?” / “<명심보감>도 배우고 <대학>도 배웠지!” / “우와, 그럼 정말 잘 하시겠네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당 다닐 때요, 초입자가 <대학>을 읽으면 바로 알던가요? 그거랑 똑같아요. 원불교에는 처음 온 사람도 있고 한데, 그중 잘못 실수한 것일 수도 있고 견물생심으로 버릇을 못 뗀 사람도 있는데 그걸 뭐라고 하면 어떡해요?”
이랬답니다. 나중에 이 일을 대종사님께 보고드렸더니 “거 참 잘했다!” 하셨답니다.
전 초등학생일 때 항상 신발을 잘 잃어버려서 어머니께 많이 혼났습니다. 친구들이 고무신을 신을 때 저는 운동화를 신었는데요, 그게 꼭 없어져요. 전 맨발로 집에 갔습니다. 그럼 어머니가 “너는 남의 고무신이라도 신고 오지 그냥 왔냐!” 하셔서 저는 또 혼납니다. 그래도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많이 혼났습니다.
그때 공부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것을 훔쳐가는구나 했습니다. 이처럼 절이나 교당에서도 신발을 잘못 신고 가거나 가져가면 불신감이 조장되고 신심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핵심은 신발 문제가 아니라 ‘신심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수용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것이 없어졌는데 예민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왜 타인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고 에너지를 쓰게 만들고 신심 떨어지게 하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대중생활에서는 문제가 큽니다. “누가 잃어버렸다며?” 하면서 집단의 수준을 다운시키는 것입니다.
‘신좌와월차’는 서로 앉거나 누울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귀가 전 먼저 잔다거나 하는 것도 월차 즉 차례를 넘은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합시다. 고3 수험생이 늦게 들어왔는데 가족이 다 자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야근 열심히 하고 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전부 잡니다. “아빠, 내가 피곤하니 먼저 잘게.” 한다든지, 잠깐 졸다가 귀 쫑긋 세우고 얼른 나와본다든지 하는 것이 사람 사는 맛입니다. 문 쏙 닫고 들어가고 이런 건 안 됩니다.
對客言談에 不得揚於家醜하며 但讚院門佛事어다. 대객언담 부득양어가추 단찬원문 불사 |
⇒ “객을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집안의 추함을 드러내지 말고, 다만 원문의 불사를 찬탄할지라.”
손님을 대해서 말할 때는 ‘양어가추’ 즉 집안의 추한 것들이나 불미스러운 것들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죠?
어려서 똥 안 싸고, 싸움 안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요. 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건데 그런 것 왜 얘기합니까. 한번 이야기를 들으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선입견이 생깁니다. 심지어 초입자들은 더합니다.
교당도 안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은 신심 있는 교우들이 먼저 알고, 중간 신심들은 모르다가, 신심 없는 사람들이 쫙 압니다. 몇 년 만에 교당에 전화한 아웃사이더 교도와 통화하는데, 교당의 어두운 소리를 다 알고 있더군요. 기절할 뻔 했습니다. 안 좋은 얘기만을 온통 다 전한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누가 기분이 좋습니까.
옛말에 좋은 사람들 이야기는 선신(善神)이 와서 듣고 나쁜 사람들 이야기는 악신(惡神)이 와서 듣는다고 했습니다. 박토이던 땅도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하며 농사를 지으면 옥토가 된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도 나쁜 사람들이 와서 싸우고 욕하면 땅도 그렇게 된답니다. 땅 마저도 내 마음 쓰는 것에 따라서 박토도 되고 옥토도 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단찬원문불사’, 쓸데없는 소리 대신에 단지 절간의 불사를 찬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학사에 얼마 불사했다더라 이런 얘기요. “너만 알고 있어. 누가 어쩐다며?” 이건 아닙니다. 예전 불가에서는 불법승 삼보를 비방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럴 바에는 그런 사람들은 안 오는 것이 낫습니다. 본인이 악도에 떨어지고 집단에 그러면 더 큰 죄악이 되거든요.
여러분들 지금 무엇에 귀 기울이십니까. 그렇게 말도 해야 하겠지만 또한 그런 것들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안 들으시거나 “야, 우리 다른 소리 하자”하고 화제를 돌리셔야 합니다. 중생들은 영원한 보물인 도정, 즉 참 마음은 잃어버리고 찾지도 않으면서 남의 소리에는 ‘어쩌나 보자’하며 관심을 갖습니다.
不得詣庫房하여 見聞雜事하고 自生疑惑이어다. 부득예고방 견문잡사 자생의혹 |
⇒ “고방에 이르러 잡다한 일을 보고 들어, 스스로 의혹을 내지 말지어다.”
고방에 가서 쓸데없는 잡된 일을 견문해서 스스로 의혹심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 이상해. 요새 누가 어쩌는 것 같아.” 이런 거요. 질문을 해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정적인 것에 바탕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고 믿는 바탕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분,의죠. 신에 바탕한 의심인가 아니면 그것이 아닌 여우같은 의심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인이 될지 여우새끼가 될지 가름이 나는 것입니다.
“제가 이걸 해봤는데 이러저러 해요. 어쩌죠?”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신에 바탕한 의심입니다. 그러나 “아니 이러저러하다는데 정말이에요?” 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연마하지도 않고, 불신에 바탕해서 합니다. ‘호의불신증’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중근병입니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호의불신증인 경우도 있고 좀 알면 색안경대로 판단하고 불신하는 것입니다. 중근기의 중근병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이 나가 떨어집니다.
‘견문잡사’ 쓸데없이 잡스런 걸 보고 듣는 걸 말해요. 예를 들어볼까요.
교당 냉장고 일없이 열어보는 분들 있죠? 그거 우리 주무님이 정말 싫어합니다. 진타원님처럼 계란 같은 것이 떨어졌으면 사놓으려고, 확인하려 열어보는 것은 괜찮습니다. 무관사에 동하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어느 정도는요. 제가 익산에서 5년을 살아도 익산 시내를 잘 모릅니다. 제가 가장 잘 모를 거에요. 관심이 없었고 나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알 필요가 뭐 있나요? 제가 거기서 가게하나요? 여론조사 하나요?
非要事어든 不得遊州獵縣하고 與俗交通하여 令他憎嫉하며 失自道情이어다. 비요사 부득유주렵현 여속교통 영타 증질 실자 도정 |
⇒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시내를 돌아다니고 마을을 찾아 세속과 더불어 교통하여, 남으로 하여금 증질케 하거나 스스로 도정을 잃지 말지어다.”
‘비요사’,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주나 현, 즉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인과 더불어 교통해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초입 출가인이나 마음공부인, 사회로 치면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좀 공부한 사람들도 자기의 자력에 맞게 돌아다니란 것입니다.
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부족한데 나갔다가 오히려 수행력이 떨어지고 합니다. 지금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편입한 허석 교우가 교당에 아직 한 번도 안 왔죠? 그게 맞아요. 전화통화도 거의 못합니다. 일단 출가를 했으면 다른 곳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교나 교화하는 것도 자기의 수행력에 맞춰 난이도를 조절해 나가야 합니다.
‘증질’은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욕먹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효과입니다. 자기가 수행력이 딸리고 하는데 돌아다니면서 오히려 신심을 떨어뜨립니다. 본인도 본인대로 수행력이 물러납니다.
‘실자도정’, 스스로 도정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정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마음을 돌아다니면서 타인, 번잡함으로 내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때 아무리 박수를 받고 명예가 있어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합니다.
최치원이 “스님들은 산이 좋다면서 왜 그렇게 밖에서 싸우고 다니는가? 나는 산에 들어가면 안 나올 것이다” 그랬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요. 가야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래도 원만하지는 않아요. 수행을 했으면 나와서 중생제도를 해야죠. 자기 마음을 지켰다는 정도로 해석합시다.
儻有要事出行이어든 告住持人과 及管衆者하여 令知去處니라. 당유요사출행 고주지인 급관중자 영지거처 |
⇒ “혹시 중요한 일이 있어 출행하거든 주지인과 대중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알려 가는 곳을 알게 하며”
만약에 요긴한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거든, 주지스님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 총림에서는 방장, 아닌 곳에서는 주지입니다. 우리는 주임교무입니다. 주지랑 똑같죠. 회주라고도 하지요. 집으로 말하면 부모님입니다.
‘급관중자’는 소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꼭 해야 합니다. 기숙사 살 때 외출하려면 꼭 양식을 써서 방장 사인 받고, 사생장 사인, 사감님 사인을 받아야 외출이나 외박을 나올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나가지 말고, 정당하거든 허락을 받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싹 빠져나가고 하는 것은 마음을 지키고 진짜 도인이 되는 데는 마이너스입니다. 정산종사님도 웬만한 것은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기운이 통하거든요. 저도 간사나 성현교우에게 “나 뭐 한다, 어디어디 간다”하는 말을 합니다. 그래야 기운이 통하고 일이 생겨도 대체가 되는 것입니다.
단장, 중앙에게도 늦거나 불참할 때는 사유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미리 출석해야겠지만요. 그럼 단장은 또 보고해야 하는 것이고요. 저번에 학타원님이 안 나오셨습니다. 그런 일이 없는 분인데, ‘일이 났네’ 싶었습니다. 단장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단장님이 저한테 오셔서 말씀하시더군요. “교무님, 저희 단 학타원님이 안 나오셔서 궁금하셨죠? 입원하셨대요. 손이 갑자기 마비되서 성바오로 병원에 계시대요.” 그래서 제가 바로 “그럼 얼른 갑시다.” 하고 병원엘 갔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필요할 때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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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너무 꼼꼼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