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雪山 사진만 봐도 가슴이 뛰었었다. 혹시 전생에 티벳의 중이었던
건 아닌가 몰라 하는 내 말에 친구는 아마 셰르파족이었나 보다 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지난해 7월 개통한 칭짱(靑臟)열차가 티벳 고원을 달리는 사진을 봤다.
그때의 설렘이라니…기다릴 수가 없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은 역시 멀었다. 상하이에서 청두(成都)까지는 비행기로 갔다.
청두에서 하룻밤을 자고 라싸(拉薩)까지 가는 48시간의 기차여행을 시작했다.
비수기라서 특실인 soft sleeper class 는 한산했다. 4인 1실의 침대칸
컴파트먼트를 남편과 둘이 전용으로 사용했다. 침구는 깨끗했고 개인 TV와
산소호흡기가 설치돼 있어 전혀 불편이 없었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식당차에서
사천요리를 팔아 식사도 그런대로 해결했다. 승무원이 큼지막한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한 병 담아다줘 서울서 가져간 컵라면으로 몇 끼를 때우기도 했다.
청두를 떠난 기차는 란저우(蘭州), 시닝(西寧)을 거쳐 한밤중에 거얼무(格爾木)
에 도착한다. 옆 칸의 일본 아저씨가 시닝을 지나며 곧 黃河를 보게 된다고
얘기해준다. 또 그 옆방의 미국인 가족은 베이징대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이 열차를 알게 돼 티벳으로 간다고 한다. 아시아에 생전 처음
왔다는데 티벳같은 오지에 간다니 놀랍다고 하자 그게 여행의 즐거움 아니냐고
되묻는다. 숙소도 라싸에 도착해서 알아볼 예정이라니 그 용기와 모험심이
감탄스럽고 부럽다.
한밤중 기차가 정거하는 기색에 눈을 떠보니 넓은 창에 별이 한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다. 세상에 저렇게 크고 많은 별을 본 게 언제던가. 별들 너머
흰눈을 머리에 인 산등성이들이 느리게 움직인다.
가도 가도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 간혹 야크와 양떼들이 황량한 들판에서 또
느리게 움직인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속도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느림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거얼무에 기차가 정거한 동안 산소통을 실은 트럭들이 줄줄이 달려와 각
칸에 쉭쉭 소리도 요란하게 산소를 공급한다. 생경한 이 모습이 이채롭다.
쿤룬(崑崙) 산맥을 통과하는 지점은 고도가 5,000m를 넘고 1,200km에 달하는
거얼무-라싸 구간의 평균고도도 4,500m나 되는데 별로 고산증세를 느끼지
못한 것은 다 이 산소 덕분이었다. 長江源이라는 역을 통과한다. 양자강의
원류라는데 광활한 평원에 늪처럼 사방에 물줄기가 펼쳐져 있다. 중국의
2대강인 황하와 양자강을 동시에 구경하다니…
출발할 때는 솔직히 48시간의 기차여행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러나 이틀 뒤 기차가 라싸로 접근하고 있을 때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기차여행은 평화롭고 즐거웠다. 오후 여섯시 반, 드디어 기차는
라싸 강을 건너고 멀리 포탈라 궁이 보이기 시작한다. 라싸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라싸 역은 무엇이든 크고 거창한 걸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취향대로
무식하게 거대했다. 티벳이라는 땅이 주는 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驛舍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마중 나온 조선족 처녀 가이드가 서너 시간 후부터 고산증세가 나타날 테니
될수록 적게 움직이고 잘 쉬라고 충고한다. 라싸의 유일한 한식당 ‘아리랑’
에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갔다. 고도 5,000m도 너끈히
넘어왔는데 별일 있을까 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웬걸 한밤중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서울서 가져간 산소가 농축돼 있는 물, 파워런 飮用酸素
(Power-Run Aqua Oxygen)을 마시니 두통이 좀 가신다.
다음 날 오전까지 쉬고 오후에 시내 구경을 한다. 포탈라 궁은 13층 높이(117m)
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해서 평지에 있는 조캉 사원부터 찾는다. 사원 앞
광장은 五體投地하는 순례자들로 가득하다. 라싸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포탈라 궁이 아니라 이 순례자들의 오체투지다. 평생 씻지 않아 냄새나는 몸과
땟국이 줄줄 흐르는 옷에 때로 수천 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 이곳에 도착한
이들의 열정과 信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영하를 넘나드는 추운
날씨에 얼음같이 찬 돌바닥에 온 몸을 던지며 행복해 하는 이 신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시내는 아침 이른 시간부터 휴대용 마니車를 돌리며
사원 주위의 바코르(Barkhor)라는 이름의 팔각거리를 순례하는 순례자들로
넘친다.
다음 날 오전 포탈라 궁을 둘러보았다. 역대 달라이라마들의 靈塔과 생전의
숙소 및 집무실 들이 있는 건물인데 1천년 이상을 버텨온 어두운 목조건물
내부를 가득 채운 온갖 신상과 불상들이 향내와 야크버터 태우는 냄새에 섞여
영혼을 짓누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나는 카일라스 산을 보러가고 싶었다. 티벳인 들이 성산으로 여기는 일명
수미산이란 곳이다. 라싸에서 며칠을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할 뿐 아니라
고도가 5천m를 넘는다 하니 고산증이 겁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 티벳 관광이
더 활성화하면 혹시 산소가 공급되는 랜드크루저가 나올지도 모르니 그 때를
기약하자.
몇 개의 사원과 노블링카(달라이라마의 여름궁전)를 더 보고 사흘 만에 라싸
를 떠나 상하이행 비행기에 오른다.
라싸로 일하러 간다 하니 산에 풀도 안 나는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 걱정했다는
우리 가이드 어머니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티벳고원은 풀도 없는 황갈색
산과 들판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곳이다. 누군가는 겨울 티벳의 풍경을
달 표면과 흡사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고원을 지나며 나는 행복했다. 마치
전생으로의 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존재의 始原으로의 회귀’--- 어디서 본 듯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이야말로
티벳고원을 지나는 동안 내내 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노순옥 기)
첫댓글 어느새 귀한 여행을 하셨군요. 둘째 사위님 보시기 직전에. 축하합니다.
쉽사리 넘볼 수 없는 하늘나라 오지 좋은데 다녀오셨습니다. 고산병에 잘도 버티시고 오셨으니 감축드립니다.
감동적입니다. 멋진두분께 새해인사드립니다
박 교수,좋은 여행했소.노기자님, 좋은 사진과 기행문 감사합니다.
좋은 글,내 블로그에 퍼 옮김니다.
두분의 여행이 부럽습니다. 앞으로 이런 여행 많이하시고, 좋은 기행문 부탁 드립니다. 기행문 읽으며, 않가보고 가 본 것으로 생각할테니까요. 두분 댁내의 경사도 멀리서 축하합니다.
티벳 여행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겨울 철에 기차로 라사까지 가서 티벳 여행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네요. 라사에서 사흘 동안 머물었던 여행담도 더 듣고 싶고 선명한 사진과 유려한 문장이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현장감을 더해줍니다. 후편을 기대합니다.
대단들하신 부부 여행기 잘읽었어요. 시간있으시면 좀 더 자세히 써주시면 즐겁게 읽을게요.
보잘것없는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티벳여행을 꿈꾸시는 분이 계시면 자세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만 라싸에서의 일정은 대부분 비슷한 사원구경이라 특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노순옥)
부부가 함께 할수 있는 것이 많을 수록 더욱 행복하다 하였는데 박교수 정말로 장가를 잘 가셨소이다. 축하하오
힘든 여행을 하셨군요.축하합니다.
박교수님이 왜 그동안 힘들여 배운 bridge를 다 잊어버리셨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요. 머리와 가슴을 원초의 상태로 돌려 놓았으니...지금부터 좋은 것만 다시 심으십시요. 여행의 마력!
한편의 서사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