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용원동 망산도를 나와서 부친과 함께 근처 안골동 신도시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 같은 업을 하는 두사람이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더니 영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나오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이 업을 하면서 우리처럼 다니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기에 한편으로는 경쟁 위치에 있지만 마치 아군을 만난 것 같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홀로 외롭게 일을 해오다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안골동 인근 웅천해전을 앞두고 손꼽아 기다렸던 아군을 만나자 장병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맑다.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자고 한다. 나는 애써 말려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고 언약을 하였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다가오므로 모든 진중의 장병들이 바라보고는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후 네 시쯤에 출항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1593년 2월8일[계사/3월10일]
용원동에서 해변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안골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는지 왜적들이 성을 쌓고
항거한 안골동 왜성 아래 부두에서 제가 전방에서 1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상근예비역으로 김해 부대로 출퇴근
하던 대대 분대장 시절에 휘하 모든 부하 장병들을 데리고 회식하며 전우애를 다졌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안골동 정확히는 무궁화 공원이 있는 안골포에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침략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던 수군장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부대를 한산도에서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다시 공격을 하여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해전과 함께 왜 수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하여 우리나라를 풍전등화에서 구원하는 빛나는 해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군사된 자로서 힘을 합하여
이 민족과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골동 옆으로는 주기철 목사님의 고향인 웅천동이 나오는데 이곳에 주기철 목사님의 기념관이 최근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 장군이 아군과 힘을 합하여 싸웠던 웅천해전이 벌이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영업은 뒤로하고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며 부친과 함께 먼저 웅천동 웅천왜성으로 향했습니다.
웅천왜성은 웅천동 앞 해변가에 있는 해발 180미터 정도되는 산에 왜적들이 조선포로를 잡아다가 쌓은
왜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성으로 지금은 산 정상에 일부만 남아 있지만 지금도 그 당시에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금은 아무런 저항없이 홀로 이곳에 들어왔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곳에 왜적들이
득실거렸다는 사실에 조금 섬뜩하기도 하였습니다.
웅천왜성 정상은 산꼭대기라 남해안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앞에는 간척공사로 섬과 육지가 연결 되었고
저 멀리 거제도 거가대교가 보였는데 경치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성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렇게 크고 많은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이곳까지
운반하였냐는 것이였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그 당시에 성을 쌓는다고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났겠냐며
혀를 찼는데 왜놈들이 조선인을 포로를 잡아다가 성을 쌓다는데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성 정상에는 양봉으로 보이는 물건이 보여서 천을 들쳐보았더니 강대상 같은 물건이 산 정상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산 중턱까지 자동차를 타고 절반은 걸어서 올라왔는데 중턱에서 왜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웅천왜성 산상미사" 주최 천주교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에서 웅천왜성에서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에 카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웅천왜성에서 1년간 머물며 카톨릭 영세를 주며 왜적에게 선교활동을 하였던 세스페데스 카톨릭 예수회 신부와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왜성으로 가는 길목에 세스페네스 공원이 보여서 가봤더니 부족한 저도 오래전 스페인 유명도시를 다니며 복음의
옷으로 스페인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1593년 12월 27일 스페인 출신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헤멜보다 60년이나 앞서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불신자도 왜성에서 미사드리는 카톨릭에 작태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듯이 그 당시에 각 집마다 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조선인들이 살륙을 당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코를 베어가고 여자를 욕보이며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간 일본인들에게 회개를 외치기는 커녕 오히려 영세를 베풀며 조선침략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을
올린 곳을 성역화 하려고 하는 카톨릭의 작태에 나 또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듣기로는 그 신부가
조선 침략을 선동하였다는 자료도 보았었는데 그런 인물을 기념하는 공원까지 조성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서
망연자실하며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웅천왜성 정상에서 이 민족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더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송신탑이 눈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성 정상 바로 아래에 제법 큰 송신탑이 있었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서야 보게 되어서 조금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송신탑을 보게되어 마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감동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송신탑의 역할은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 즉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족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하게도 웅천왜성으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 주기철 목사님께서 어린시절부터 다녔던 웅천교회가 새 건축을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웅천교회는 웅천동 마을에 위치하였기에 산 정상에서 만난 웅천동에 사시는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웅천교회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다른 교회가 예전 웅천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금년초에 예전 웅천교회 자리에서 보았던 실로암 교회가 새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해가 군사 요충지로 우리나라 해군 기지가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진해 중심이였던 웅천동 앞
웅천왜성도 왜적들이 부산 다음으로 본부 같이 여겼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본인들이 종종 웅천왜성을 찾고 있는데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 즉 왜적이 이 나라를 침범하고
본부로 삼은 왜성 입구에 일제에 항거하며 순교하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웅천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세워주셨고 악의 세력에게서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감동을 크게
받았습니다.
또한 1593년 계사년에 웅천왜성에 성을 쌓고 항전하는 수많은 왜적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단독으로
웅천왜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전투로 왜적을 무찔렀던 이순신 장군도 왜적들이 겁을 먹고 왠만해서는
배를 타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형도 위태로와서 여러날 동안 공격을 감행한 쉽지 않은 전투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혜를 발휘하여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 서쪽과 동쪽으로
배를 보내어 수군이 상륙하는체 하여 예상하지 못한 전술에 왜적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모든 배들로 공격하여
왜적들을 거의 섬멸시킨 우리가 승리한 웅천해전 전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웅천해전을 위해서 이순신 장군은 수군 본영을 떠나 거제도 외로운 칠천도등을 전초기지를 삼았었는데
신형제도 고향을 떠나 거제도에 살고 있고 저도 고향을 떠나 경산에 살며 하나님의 일을 하듯이 우리가 현재
살고있는 곳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 살았고 부모 형제가 있는 김해를 경상남도와 부산 사역에 전초기지로 삼고 있으며 현재
살고있는 경북 경산은 영남 지역과 전국 전도의 전초기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김해는 경상남도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옆으로는 대도시 부산이 있어서 경남과 부산 전도하기가 아주 용이하고
경북 경산은 영남 중심에 위치하여 영남 전도하기에 좋을 뿐더러 옆으로는 전국에서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구광역시가
있으며 대구가 우리나라 중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구 경산은 전국 전도를 다니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라 김유신 장군도 현재 영남대학교가 있는 경산 압량면에 전초기지를 삼고 전국을 통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하여 이순신 장군처럼 전초기지를 자주 옮기거나 저처럼 순회 전도를 다니지 않더라도 자신의 지역과
자리에서 얼마든지 사역에 전초기지를 삼아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이나 미디어, 문서 사역만
보더라도 지역과 자신의 나이와 직위와 관계없이 전국과 세계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웅천왜성을 나와서 주기철 목사님 기념관에 잠시 들렀는데 개인 관람자들도 보이고 많은 학생들이 방문한 새빛교회
단체 관람자들도 보였는데 기념관에서는 나이가 지긋하신 남자 분께서 단체 관람자를 인솔하시며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것 같았고 그곳에 근무하는 분에게 듣기로는 통합교단에서 기념관을 세웠고 위탁받아서 운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대해서는 2014년 일기에 아주 상세하게 적었고 최근에도 언급을 하였었기에 여기에서는
따로 글을 적지 않겠습니다.
기념관을 나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진해 곳곳과 창원 번화가와 마산 번화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경화동 시장 인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경화동 불종을 보게 되었는데 1900년대 진해의 중심이였던
경화동에 불종을 매달아 화재 등의 위급사항을 알리고 구호와 부역시 주민들의 소집도구로 사용하여 오다가 1977년
경화파출소가 설치된 후 불종을 철거하였고 진해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불종을 복원하여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불종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신앙의 화재같이 위험한 상황이나 성도들의 협력과
동역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서로 하나의 불종이 되어 모든 사람이 듣도록 소리를 내야 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불종이 되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라든가 이슬람 확장 같은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여
이렇게 위급한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믿는 지체들과 연합하고 동역하여 초기에 진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정정합니다.
1593년 계사년 옥포해전에서는
조명연합 육군이 참전하지 않았고
명나라 수군도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정하였습니다.
1598년 왜교성 전투와 착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일기 첫부분 아군을 만나는 부분도 새롭게 수정 보안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