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오 5,38-42)
I say to you,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정을 허락하신 것은 당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충실한 일꾼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합 임금은 선량한 나봇의 포도밭을 폭력으로 빼앗는 폭군이 되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동태 복수법을 폐기하시면서, 악한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제시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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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사람마다 소유하고 있는 땅은 그가 백성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였다. 땅을 팔아 치우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았다. 나봇은 아합의 탐욕과 이제벨의 불의로 살해된다. 그는 포도원을 빼앗으려는 임금과 그 아내가 꾸민 음모에 희생되었다(제1독서). 복음 말씀은 여섯 가지의 대당 명제(對當 命題: 율법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개념)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이다. 복수나 정당한 처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주님께서는 지옥과도 같은 폭력의 악순환을 뿌리 뽑으시고자 새로운 삶의 태도를 제안하신다. 이해관계를 떠나 악을 선으로 바꾸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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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의 탈출기에서는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21,23-24) 갚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피해를 가해자에게 주는 법을 동태 복수(同態復讐法)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논리는 오랫동안 삶의 윤리로 지켜졌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명제를 폐기하시며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십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린다는 것은 심한 모욕과 멸시까지 담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마저 대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행동은 상대방의 노예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평화롭게 살자는 초대의 몸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택해서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손해를 손해로 갚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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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악의를 품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말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오로지 사랑으로 악을 이겨 내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산된 생활이 아니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온갖 모욕과 멸시를 참아 내시면서 당신께 다가오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신 주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아, 그리스도께서 가신 인생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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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디입니까? 저에게는 12처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한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는 장면과 ‘용감한 여인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1처’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죄한 분께서 죄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의롭고 선량하신 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분께서는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담담히 판결을 받아들이십니다.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제1처의 예수님’께서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합니다. 때로는 모함도 받고 때로는 이용도 당합니다. 오해 때문에 멍들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면 악쓰며 반항하였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남은 것은 상처입니다. 이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총이 함께합니다. 누군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참아 내게 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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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태 복수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입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주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상대편은 자기가 준 상처보다 더 큰 보복을 당했다고 여겨 또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고자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친절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지름길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결책입니다.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감정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
- 한창현 신부-
이곳 울릉도를 ‘신비의 섬’ 이라고 합니다.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많은 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여행하는 우리 교우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을 더 깊이 체험하리라 봅니다.
제가 이곳에 사는 분들을 보고 느낀 점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그래서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창조주를 알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날씨가 좋지 않아 바다에 풍랑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못한다면 주민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도 군말 없이 돌아옵니다. 앞바다는 잔잔하더라도 먼바다의 파도가 험해서 출항할 수 없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받아들입니다. 자연의 뜻, 창조주의 뜻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마구 항의를 합니다. ‘지금 바다가 이렇게 잔잔한데 왜 배가 안 뜨냐고,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 하지만 아무리 항의를 해도 자연의 질서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경우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림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자연스레 터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합니다. 부족하기에 창조주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면 어찌될까요 ? 부족함을 채워 달라고 청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되면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마치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사람과 같다고나 할까요. 사람은 서로가 함께 살아갈 때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육신이 함께 있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할 때 채워지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
어떤 외과의사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안전띠 착용을 권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강연회에서 강의를 하시게 되었는데, 이때도 이렇게 안전띠 착용을 강조했지요.
“여러분, 안전띠를 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50%의 목숨을 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외상을 입한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즉시 물었지요.
“안전띠를 착용했었나요?”
“아니요.”
환자를 자세히 본 의사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환자는 얼마 전 자신의 강연회를 듣고 갔던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말했어요.
“안전띠만 착용했으면 이렇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이 환자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자전거를 타다가 다쳤어요.”
안전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전거에 안전띠는 없거든요. 따라서 의사 선생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이러한 성급함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보다는 나의 말을 먼저 해 버리고, 나의 행동을 성급하게 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결과 우리들은 많은 후회를 하고 계속된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난 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후회를 하기 전 먼저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여러분은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보로 살아가라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마 무조건 화부터 내고,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우리들의 성급함을 고치려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화내기 보다는 기다림의 시간으로 다른 뺨을 돌려 대고, 겉옷을 내주고, 또 함께 더 걸어가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흐름이 엄청나게 빠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도 세상에 흐름에 맞춰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한 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어쩌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닐까요?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5,42)
용서의 삶
-김훈일 신부-
인간은 세 가지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이웃과의 싸움,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성찰과 회개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웃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희생과 용서의 삶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찬양과 기도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 중에서 제일 쉬운 승리는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승리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웃과의 싸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싸움에서 악을 악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충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을 때 그 속에서 더 큰 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희망이 있고,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상처 주는 사람이 시련에 당했을 때 내가 도움을 주어 그가 감사를 표현한다면 참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면 나도 승리하고 그도 승리하고 하느님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싸움에서 희생과 용서로 승리할 때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완전한 사랑
-김찬선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주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비굴하게 악인에게 꼬리를 내리라는 말씀입니까? 악인의 잘못을 묵인 또는 방조하라는 것입니까?
지난 주 저는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여기저기를 방문하는 동안 저를 안내하신 분과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용서 문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누가 불의와 악을 저지르는데 그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고쳐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선,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용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 아닙니다.
두 번째, 그러나 죄나 잘못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나 잘못에 대해 분노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그것을 내가 초월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매이거나 얽혀있다는 표십니다. 나 자신 그 죄나 잘못을 넘어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제시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죄인이나 잘못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납하지도, 그렇다고 죄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을 때 우리는 자신도 그 죄에 얽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게 되며 그 죄로부터 그를 해방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하심은 악을 선의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말고 월등한 선으로, 아니 오롯한 선으로 악을 초월하라는 말씀입니다. 선만 오롯하지 악은 그림자도 없을 때, 선에 기대어있는 악도 없고 악에 기대어있는 선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자리하듯이 오직 선만 인정하고 선만 있을 때 선 아닌 악이 도저히 같이 자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그것은 죄인의 그 수없는 악을 보면서도 죄인에 집착하지 않고 그 악에 머물지 않으며 지상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만을 보는 것입니다.
하여 그로 하여금 악업을 더 쌓게 하는 것이 아닌 한,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같이 가자면 십리까지 같이 가주는 선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렇게 거듭된 선행을 통하여 선업이 쌓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공명 또는 메아리가 아닐까요?
자아를 버린 사람이 진정한 고수
-전삼용신부-
저는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을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돈을 밝히고 학생을 삽이나 혁대, 신발 등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고 가난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는 등의 지금 생각해도 완전 정이 안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담임선생님이었기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미워할 뿐이었고 학생인 저는 피해만 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도 그 사람이 생각나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더 강해져서 그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무협 만화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최고의 무도 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오랜 수련 끝에 몸을 강철처럼 만들었습니다. 누가 때려도 끄떡없었고 또 다른 사람을 한 대만 때리면 어딘가 부러져버렸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저 멀리 산 속에 혼자 살고 있는 분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은 사람들이 말하는 고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고수를 보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매우 약해보이는 할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번 꺾어 보이겠다고 하며 대련을 신청합니다. 대련을 원치 않았던 고수 할아버지는 그 젊은이의 고집에 이기지 못하고 대련을 받아줍니다.
젊은 주인공은 처음엔 할아버지가 다칠까봐 주먹을 천천히 휘두릅니다. 그러나 그 주먹은 할아버지를 스칠 뿐이지 할아버지를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손과 몸의 움직임은 마치 공기와 같았습니다. 더욱 강렬히 손과 발을 움직였지만 마치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끝까지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나중에 대련이 끝나고 젊은이는 마지막 가르침을 받습니다. 즉, 강철은 더 강한 것에는 녹고 깨질 수 있지만 공기는 약해보이지만 어떤 상처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그 공기가 허리케인이 되면 그것 또한 멈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강해지려고만 하는 것이 정말 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비워 형체를 없이하는 것이 최고의 경지임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만화이지만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자아를 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상처받는 인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유학 와서도 교수 신부님과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은 논문 발표 때 보자며 화를 내셨고 실제로 논문 발표 때 당신이 교정해 주셔서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도한 이 논문은 학생이 다른 책들을 다 베껴 쓴 것이라고 다른 교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통과 점수만 받고 그 과목으로는 박사를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종합 시험을 볼 때도 들어와서는 “한국에 가서 살아남기 바래!”하며 자신이 그 정도로 점수를 안 주었기 때문에 사제가 되기 힘들 것 같다는 투로 마지막 인사를 하였습니다.
사제가 되어 유학을 나와서 학교에서 보아도 그 분은 저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내려놓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더 안 좋은 일까지 해 놓고도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 분이 해결해야 할 몫이지만 당신이 자아를 버리지 못하므로 스스로 얼마나 힘들어하며 살아야 하는지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아주 바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먼저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위의 말씀이 바로 자신을 버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수많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당신께 고통을 주는 이들의 용서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처럼, 어떠한 것에도 상처받을 수 없도록 공기와 같은 물과 같은 또 불과 같은 진정한 고수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짧은 묵상>>
며칠 동안 함께 공부하는 신부님들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그래서 주님께서 함께해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이 그리스를 이겼고 그것을 여행 중에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오늘은 돌아오는 날인데 함께 간 한 분의 신부님이 시에나에 가보지 못하셨다고 해서 그 곳을 들렸다 오기로 하였습니다. 차 운전은 거의 제가 했습니다. 두세 시간을 운전하여 시에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주소가 도시 중심으로 차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시내 중심으로 허가받지 못한 차를 몰고 들어가면 우리나라 돈으로 십오만 원 정도의 벌금을 내야합니다.
저는 함께 간 신부님이 세 분 계셨는데 함께 신경써주지도 않았고, 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을 목적지로 불러주었고, 운전할 때는 잠만 자고 하는 모습에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물론 무심코 시내 중심으로 진입한 것은 나의 실수지만 혼자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잘못이 운전자에게 있다는 느낌을 주는 말을 들을 때는 뭐 큰 것을 바라고 운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헛고생만 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어보니, 예수님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식으로 살지 말고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눈에는 눈으로란 식으로 제가 해 주는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직도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게 합당한 대가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손해 보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맞았을 때 되받아치지 말고 다른 뺨마저 돌려대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다 내 탓’이라고 다른 뺨까지 돌려 대었다면 함께 간 신부님들도 미안함을 느꼈을 텐데 다른 신부님들도 제가 의연 중에 그들을 탓하는 것을 느끼고 서로 상대의 잘못을 더 크게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결정적으로 핸들을 잡은 사람은 나였고 그 곳으로 들어간 것도 나였기 때문에 가장 큰 잘못은 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자아가 너무 크고 교만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된다면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질 때도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모든 구절이 참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양승국신부-
<우리가 불행한 이유>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맨발의 기봉이’ 기억나시나요?
호수처럼 잔잔한 남쪽바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기봉이란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실제 나이는 마흔이지만, 어려서 얻은 열병으로 인해 정신연령은 8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봉이는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기봉이는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면서 동네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일당으로 양식거리를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던 기봉이었기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맨발의 기봉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기봉이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사는 기봉이의 얼굴은 항상 밝고 환합니다. 동네사람들이 굳은 일을 시켜도 늘 싱글벙글합니다. 일한 대가가 소홀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 기봉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한편으로 속이 무척 상합니다.
어느 저녁, 뭐가 그리도 좋은지 뭔가를 만들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기봉이를 향해 어머니가 묻습니다.
“아그야, 너는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냐?”
그 순간 기봉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크게 대답합니다. 환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응, 행복해. 엄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행복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기봉이었는데, 지체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할까 생각해봤습니다. 하루 온 종일.
결론은 이랬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 이웃에 대한 기대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대방 위에 놓기보다 상대방 밑으로 두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가질 것 안 가질 것 다 가진 우리들이건만 이토록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기봉이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큰 것만 바랐기 때문에, 삶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웃들과 너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워왔기 때문에, 남과 싸워 늘 이기려고만 했기에 그토록 불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행복해지는 비결은 내려가는 데 있습니다. 비우는데 있습니다. 지는 데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바보가 되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바보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보십시오. 바보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결국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산다는 것, 엄청 억울하고, 엄청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바보 중의 바보’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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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모 신문에, 아버지를 판다는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현재 노령이고 몸이 편치 않아서 일금 10만 원이면 아버지를 팔겠다는 것이었지요. 그 광고를 본 사람들은 혀를 차며 ‘세상 말세다’라고 말하면서도, 다 늙은 할아버지를 누가 사겠냐면서 쑥덕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를 접한 어떤 부부가 만사를 제쳐놓고 광고가 난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고, 할아버지 혼자 이 저택을 지키고 있었지요. 이 부부에게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내가 잘 아는 할아버지가 부탁해서 광고에 낸 건데, 그 영감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 노인네를 왜 사려고 그러나?”
이에 부부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다가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부모 없는 설움이 늘 가슴에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몸이 아프거나 집안이 어렵지 않은 가정이라면 누가 자기 부모를 팔겠다는 광고를 내겠느냐고 말하면서,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화목하고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부부에게도 부모를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준비한 돈 10만원을 정성스럽게 할아버지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광고를 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물려 줄 양자가 필요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대부분 돈만 밝혀서 사람 됨됨이를 떠보기 위해 이러한 테스트를 했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 할아버지가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데, 지금 양자를 두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을까요? 그러나 노령에 힘도 없는 아버지를 판다는 광고를 보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요. 단지 그런 광고를 낸 사람의 도덕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에만 급급할 뿐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몸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말만으로 멈출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예수님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그대로 본받고 따르라고 말씀하시지요.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는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바로 말만 하는 사랑이 아닌, 행동으로써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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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투자
-김선오 신부-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소위 나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희생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 잘 사는 스타일입니다. 어떻습니까? 두 번째 부류의 삶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은 ‘무관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주고 또 주고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바보’같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삶을 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늘 내어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상 무언가를 내어놓으면 어떤 것을 채워 넣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내어놓으면 그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에게 또 내어놓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주고 또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의 뒷말씀은 “내가 채워주리라”입니다. 그것을 믿고 체험하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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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 박혜원-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으로, 딸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내 잔혹하게 살해하는 영화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자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삶의 곳곳에서 복수를 꿈꿀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인간의 내재된 복수 심리를 고발하고 있다. 영화뿐 아니라 무협지를 보면 온통 복수에 대한 복수로 이야기가 얼룩진다. 대를 이어 처절하게 보복하고 응징한다. 이에 비해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으로’는 오히려 자비롭다. 복수의 한계를 설정해 동일한 대가로 보복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그 제한된 복수마저 폐지하신다. 원한도 보복도 없는 새로운 정신을 제시하신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오른쪽 뺨을 때렸을 때 다른쪽 뺨을 돌려대면 손바닥으로 치던 것을 손등으로 치게 된다. 유다인에게 손등으로 치는 것은 두 배의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분개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라고 하신다. 그 어떤 권리도 내세우지 말고 도리어 그를 도우라고 하신다. 그러나 뺨을 돌려 맞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한 나의 에고(ego)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씩씩거리며 앙갚음을 하려 든다. 야만적인 본능은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보복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나 자신의 의지로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할 수가 없다. 이는 하느님 은총으로만 실현 가능한 일이다. 명상가 스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즈는 말한다. “죄인과 성자는 서로 자리를 교환하고 있을 따름이다. 성자는 지난날 죄인이었던 사람이고, 죄인은 장차 성자가 될 사람이다.” 우리 모두 죄를 지었고 성자 역시 죄인이었다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 예수님이 제시하는 삶의 자세는,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죄인인데, 무엇을 변명하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화낼 일도 없고 모욕받을 일도 없다. 내가 어둡고 추한 죄인이었을 때 하느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자비를 베푸셨는지 돌이켜 보면, 그 누구도 단죄하거나 응징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할 때만, 우리는 내 마음속에서 들끓는 이기심과 복수심을 극복할 수 있으며 마침내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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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단상 -김찬선신부-
권투에서 매집이 좋은 사람은 절대로 K.O 당하지 않는다. 웬만한 가격은 충격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안마와 지압이다. 그러니 한 대 맞고 나가떵그러지면 때린 사람을 탓하지 말라! 자기 매집이 약함을 탓해야 하나니.
큰 사람은 매집이 좋다. 웬만한 모욕에 상처를 받지 않고 웬만한 반대에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상처를 받았다고 누구를 탓하지 말라! 말 한 마디에 쉽게 상처 받는 허약한 영혼을 탓해야 하나니. 사랑하기를 그만 둔 탓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거부한다고 사랑을 냉큼 거두는 내 사랑의지의 박약을 탓해야 하나니.
북한에 퍼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퍼주기만 하지 말고 받아야 한다고 한다. 얻어먹으면서 오히려 배짱을 부리는 북한에게 줘서는 안 되고 고마워 할 줄 모르는 놈들에게 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주더라도 애걸복걸하면 그때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식에게 퍼주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 없다. 고마워하기를 기대하는 어머니는 계모 수준이다. 그러니 북한 정권의 몽니를 탓해서는 안 된다. 북한동포의 그 불쌍함을 보고도 몽니 탓하며 냉큼 돕는 손길을 거두는 야박한 사랑을 탓해야 하나니.
오늘 주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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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이기적 욕심으로 인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는 아합 왕 -경규봉 신부-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겨울에 거처하는 이즈르엘에 있는 별궁 근처에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있었다. 왕은 이 포도원을 정원으로 만들고자 나봇에게 유리한 제안을 하지만 나봇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나봇이 왕의 제안을 거절한 까닭은 조상에 대한 공경심 이외에도 율법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은 팔아넘길 수 없기 때문이며(레위 25,8-28), 그 땅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한 몫씩 나누어 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임금도 자유민의 소유물을 제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봇의 거절은 자유민의 자존심을 대놓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봇이 왕의 제안을 거절하자 왕비 이세벨은 나봇을 모략하여 죽인다. 즉 나봇이 하느님과 왕을 욕하였다고 거짓 증언하게 함으로써 나봇을 죽인다(하느님과 왕을 모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 출애 22,28; 레위 24,14). 그리고 왕은 그 포도원을 차지한다.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 1,14-15)는 성서 말씀처럼 대부분의 문제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욕심은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과도하고 무리한 욕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욕심,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욕심은 여러 가지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된다. 욕심으로 인하여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심한 경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곧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하느님을 향하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채울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여 세상 것으로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많이 가짐으로써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리하여 유혹을 빠지고 죄를 짓게 된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다는 것이 율법을 거스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별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싶는 욕심에 눈이 멀었고, 그리하여 왕비 이세벨의 모략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그리하여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죽게 된다(1열왕 22,34-38; 2열왕 9,33-37). 아담과 하와의 욕심이 죽음을 가져왔듯이 그들의 욕심이 스스로를 죽음에 빠지게 했다.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고, 이세벨을 찢고 뜯어먹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도 무감각해지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법과 인간의 도리마저 쉽게 저버린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합리화시키면서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진다. 욕심에 눈이 멀면 가족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 뿐이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죄와 악이 넘쳐나게 된다. 그 결과 욕심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이기적인 욕심이 사람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한다(1디모 6,9)는 점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디도 2,12-13)는 말씀을 믿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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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사랑의 실천가인 신앙인 -주영돈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습니다. 혹 이 무더위 때문에 불쾌감이 쌓여서 옆 사람에게 괜한 짜증을 내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하네요.
오늘 복음에선,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 말의 어원은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다치게 하면 똑같이 가해자의 눈을 다치게 하고, 이를 부러뜨렸다면 이를 똑같이 부러뜨리는 형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동태복수법이라고 하며, 공정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법칙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적용해서 이야기하면, “내가 이 정도 좋아했으니, 너도 나를 이 정도는 사랑해야 한다.”는 법칙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심의 발로인 복수의 세계에선 이런 동태복수법이 통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이런 거래가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도 나에게 주어야 하고, 내가 널 사랑한 만큼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기로 했으면 전부를 사랑하던지, 사랑하지 않기로 했으면 사랑하지 않던지 해야지, 사랑받은 만큼만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좀 더 적극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자신이 먼저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로, 이 말씀은 황금처럼 고귀한 윤리의 지침을 일컫는 말입니다.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델이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황금률”이라는 유래가 생겼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황금율의 정신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단순히 내가 다른 이에게 받고 싶은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이 원하는 차원까지 확대하여 요구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신앙인의 삶은 단순히 주고받는 원리가 공평하게 거래되는 일상의 삶이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먼저 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노력의 삶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행위는 단순히, 자신이 받은 만큼만 주고, 주고 싶은 만큼만 주는 행위를 넘어서서, 전인격적인 나눔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좋은 점만 사랑하고, 약점이나 나쁜 점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전인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그 자식의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모든 것을 사랑하듯이, 우리는 그 사람의 전인격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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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래 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도 공정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른바 ‘동태복수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이가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거나 그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이 ‘동태복수법’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이 ‘동태복수법’은 기원전 450년경의 로마법의 모체인 열 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법조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의 고대 사회의 수많은 법 규정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된 법의 집행 방법이 바로 ‘동태복수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는 ‘동태복수법’은 어긋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 ‘복수’는 악을 악으로 무찌르고, 하느님의 정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어 집행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수’는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자인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태복수법’의 근본취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한 행위를 한 이에게 그의 행실대로 똑같이 갚아주어 깨어진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이 법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는 ‘함께함의 법’이었고,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보복하여 이른바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막는 ‘정의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함께함’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결국 범죄의 악순환만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법의 완전한 폐기를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네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를 ‘용서 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 용서를 하는 사람 모두의 얼굴을 밝게 해 줄 것입니다. 단순히 나한테 죄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얼굴을 밝게 해 주는 ‘용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를 함께하게 해줍니다.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오늘도 우리 모두를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스스로 먼저 잘못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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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 사랑이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오늘 저희 수도원에서는 한 평생 겸손했던 한 평수사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오현교 타대오 수사님, 형제들에게 위문편지나 축일 축하 편지를 쓰실 때면 늘 오소인(小人)이라고 즐겨 쓰시던 분,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멤버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 내 굳은 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정녕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 것 미사 도구며 준비물을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등치가 산만한 후배들의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한 평생에 걸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5년 전 위암이 발병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해오셨으면서, 그만하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도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수사님은 열심히 투병생활에 임하셨습니다.
항암제 기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수도회에 도움이 되어보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뛰어드시던 수사님은 정말 저희 후배들의 귀감이셨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드러눕기도 앉아있기도 힘겨워서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수그리고 계시던 수사님, 그 와중에도 미사나 기도를 꼭꼭 챙기시던 수사님, 그 고통 속에서도 수도회의 일치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어젯밤 그런 수사님의 영정 앞에 백여 명의 저희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한 목소리로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이, 양 신부, 잘 되고 있어? 별 일 없고? 몸은 괜찮냐? 쉬어가며 천천히 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사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분들, 수녀님...많은 분들이 마치 사랑하는 삼촌이라도 여읜 듯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수사님께서는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 들을 줄 아는 ‘큰 귀’를 바탕으로 공동체나 사업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불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로 인해 공동체 일치가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중재를 서시곤 하셨지요. 부드러움, 편안함,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떠나신 수사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통념적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지요.
예쁜 아이들, 귀여워해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인사 잘 하는 사람, 내 비유를 잘 맞춰주는 사람, 내게 뭔가 하나라도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환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을 뛰어넘어서야만 합니다. 갈 때 까지 간 아이들, 반평균 점수 다 깎아먹는 아이들, 마구잡이로 대드는 아이들조차도 품에 안아줄 줄 아는 사랑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왠지 밉상인 사람, 그저 보기만 봐도 껄끄러운 사람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 사랑이 계속 성장해서 언젠가 당신이 지니셨던 그 큰 사랑 가까이 따라오도록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사랑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꾸준히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 완전한 사람은 힘들지라도, 좀 더 큰 사랑,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평화의 샘은 마르지 않는 것
- 이봉하수사-
세계 역사 가운데 중동 지역만큼 분쟁이 많고 시끄러운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민족간의 갈등, 종교간의 갈등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와 보복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무장 단체의 테러로 인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보복은 또 다른 분쟁과 테러를 낳습니다. 테러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이 뒤따르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메아리는 아주 멀리 오래갑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평화의 싹이 자라게 됩니다.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안에서 분쟁과 보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용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심리학 안에는 여러 분야가 세분화되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용서하기’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직 보편화가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테러와 보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용서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서지 않겠다는 마음, 한 발 양보하겠다는 마음, ‘안 돼’라는 마음을 ‘된다’라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미움을 통해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평화가 아니라 바로 오늘과 내일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김지영 신부-
◆누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마저 돌려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까지, 곧 바래다 주었다가 되돌아오는 사람이 그리 흔할까? 한번 생각해 보자. 복음에서 왼뺨이 아니라 오른뺨을 칠 때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린 셈이다. 사실 손등으로 맞는다는 것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뺨마저 대주라고 한다. 또한 가진 것이라고는 겉옷과 속옷 한 벌밖에 없는 처지인데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당장 벗어주고 거기다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실천이 인간 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예수께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을 말하신 것이 아닌가? 차라리 구약의 율법이 현실에 더 맞는 것처럼 여겨진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산상설교를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규범으로 인식하였으며 그것이 공동생활에서 가장 이상적인 질서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써 노력하는 자세를 보신다.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 말고 마음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산상설교의 핵심이다.
-홍성만 신부-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산상 설교에서 오늘 주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하는 말씀은,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마로 맞서 저항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보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면서 하느님께 맡겨라' 하는 주님의 속마음이십니다.
~ 성경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또, 로마 신자들에게 모낸 서간 12장 19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사실 복수는 더 커다란 복수를 가져옵니다.
복수보다는, 악인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혹시 오늘 섭섭한 일, 분한 일이 있거든 하느님께 맡기며 기도 드리는 하루가 되도록 합니다
앙갚음하지 마라.
-강영구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
그대에게
오늘은 좀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할까합니다. 어제 책을 읽다가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라는 생소한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적개심을 바탕으로 함께 공존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서로 앙갚음할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증오하는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테러를 벌이고 그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으로 적개심을 키운 테러집단이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하고, 그 테러에 대해서 또 보복을 감행합니다. 증오와 적개심을 바탕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복수의 악순환 속에서 테러집단은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하고 정치집단은 권력을 장악하고 군수업체들은 돈을 벌고.... 그러니까 테러집단, 권력집단, 군수업자들은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습니다. 이들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욕(權力慾)과 탐욕(貪慾)을 충족시킵니다. 증오하고 복수할 상대가 없으면 존재의 근거(根據)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복수의 악순환을 속에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키우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다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지옥(地獄)이며 그 끝은 비참한 공멸(共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가 허물어질 것입니다. 적개심과 증오심은 사라지고 복수의 악순환도 멈추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동지적(同志的) 상생관계(相生關係)라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납니다. 진정한 평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움과 증오, 적개심과 앙갚음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십시오.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행복한 하루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 폐기되는 '탈리오' 법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刑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 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는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의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와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應報)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악(惡)을 선(善)으로 되 갚으라고 하신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惡)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탈리오 법칙과 제로섬 법칙 †
오늘 복음묵상 주제는 '나에게 잘못한 자에게 어떠한 반대적 반응도 보이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더 잘 대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묵상해 보면 사람들은 두가지 견해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한쪽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고 의구심을 가지는 무리일 것이고, 또 다른 한쪽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하고 소망하는 무리들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적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오늘 복음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자에게 어떠한 반대적 반응도 보이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더 잘 대해 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 밀어 주며 더 맞으라'고 하시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아프고 화가 날 지경인데 얼굴을 내밀며 더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다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나를 학대하고 경멸하며 혹사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은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하나 이윤을 따지고 돈을 벌지 않으면 비정한 경쟁의 삶의 자리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다간 군대의 규율은 무너져 버리고 정복하거나 방어하려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며, 질서와 공안을 위한 경찰관들의 체제 또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시다니, 이래서는 정의로운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며 감옥은 개방해야 하고 소송제도는 폐지해 버려야 할 것이며 판사나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이 달라는 대로 다 내어 주고, 꾸려고 하는 자의 청도 다 들어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한 사람들의 끝없는 요청에 계속 시달릴 것이며 끝내 빈 털털이가 되어 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탈리오 법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도저히 마음에 안들어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정의롭지 못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그릇된 악으로 우리를 내몰아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말씀은 세상 살기 참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의 말씀을 탈리오법칙이 아닌, 제로섬법칙으로 이해애 본다면 마음이 열리면서 오늘 예수님의 심오한 복음이 마음에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탈리오법칙이 '가짐의 논리, 소유의 논리'라고 한다면, 제로섬법칙은 '나눔의 논리, 비움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생명을 지음받고 생노병사를 하는 과정에서 결국 계산해 본다면 "영(0)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 진행형으로 보면 플러스게임을 하고 있지만, 현재완료형(죽음)으로 보면 제로(0)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제로섬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더 주고 덜주고하는 잔머리 계산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다 팔고' 무(영)의 상태에서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를 전교파송하시면서도 무의 상태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승기록에서도 보면 공동체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함께 공유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부족함이 없이 사로 평화를 이루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로섬 삶의 아가페 사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태오 복음의 오늘 복음과 같은 장인 5장의 앞부분이 말하고 있는 바, 즉 '참된 행복의 선언'이라 표현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먼저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삶 안에서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 나라,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이 지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성서의 다른 구절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상의 삶'의 눈으로만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오늘의 복음말씀은 바로 '하늘나라의 삶'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한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미움은 미움을 계속 낳지만, 사랑은 사랑을 계속 낳는다'는 참으로 확실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자세를 통해 하늘 나라가 바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우리 함께 희망해 봅시다. 남에게 먼저 그렇게 살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내가 먼저 그렇게 한번 살아 보도록 합시다. 제한 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 오늘의 복음말씀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실감하며 참된 행복을 이 지상에서부터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