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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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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2000-1500 B.C. | 하(夏) | |
1700-1027 B.C. | 은(殷) : | 상(商)이라고도 함 |
1027-771 B.C. | 주(周) |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나누어짐 |
770-221 B.C. | 770-476 B.C | |
춘추 (春秋)시대 | ||
475-221.BC | ||
전국 (戰國)시대 | ||
221-207 B.C. | 진(秦) | 진시황이 전국의 나머지 국가들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 |
206 B.C.-A.D. 9 | 한(漢) |
진이 진승오광의 난으로 멸망한 후, 한의 유방은 초의 항우가 천하를 놓은 다툼에서 이겨 한제국 이 성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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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西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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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 유방이 세운과 서한과 유수의 동한으로 분활됨 | ||
A.D. 9-24 | 신(新) | 왕망이 신을 건국 |
A.D. 25-220 | 동한(東漢) | 유수가 재건한으로 나누어짐. |
A.D. 220-280 | 삼국(三國) | 동한이 망한 후, 위, 오, 촉의 삼국이 천하를 놓고 쟁패. |
AD 220-265 | 위(魏) | |
AD 221-263 | 촉(蜀) | |
AD 229-280 | 오(吳) | |
A.D. 265-316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 위오촉의 삼국시대부터 위의 쟁패, 사마씨의 진으로부터 이후 남북으로나뉘어져 분열된 시기를 보냅니다. 북쪽은 오호십육국이, 남쪽은 건업(지금의 남경)에 송, 제, 양, 진이 건국. |
A.D. 581-617 | 수(隋) | 고구려와 전쟁으로 국력 소모 |
A.D. 618-907 | 수를 이어 천하를 차지함. | |
당(唐) | ||
(중간에 측천무후가 주 (周) 로 국호를 바꾸기도 함). | ||
A.D. 907-960 | 오대십국(五代十國) | 당의 멸망하고,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나라가 개봉에 들어서고, 기타, |
오월, 전촉, 남당등의 국가가 건국 | ||
AD 960-1279 | 북송(北宋) | 조광윤은 후주의 절도사출신으로 후주에서 정권을 빼앗아 송을 세우고 천하통일. 이 시기에 북쪽에는 야율씨의 거란족국가인 요(遼)를 건국 북쪽에 신흥국가 여진족의 금이 거란족의 요를 멸망시킵니다. 남송가 대치. 지금의 녕하지방에는 서하(西夏)가 있음 |
남송(南宋)/금(金) | ||
AD1279-1368 | 원(元) | 몽고족의 원은 금과 남송을 차례로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 |
AD 1368-1644 | 명(明) | 주원장이 몽고를 물리치고 천하를 차지 |
AD 1644-1911 | 청(淸) | 여진족의 명을 정복하고 청을 건국 |
AD 1911-1949 | 중화민국 |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1911년 건국 |
AD 1949 - | 중화인민공화국 | 모택동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북경에서 정부수립 |
표로 된 것이니 보시기 편리할 것입니다.
夏)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商)나라 이전 수백 년 간 존재했다고 기록된 나라입니다. 그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아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으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이리두 유적의 발굴 작업과 사료 검토를 통해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나라의 존재가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나라는 우임금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상나라의 탕왕에게 멸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중국의 연대표입니다.
나라 이름 |
연대 |
나라 이름 |
연대 | ||
하夏 |
BC 2070 ~ BC 1600 |
수隋 |
581 ~ 618 | ||
상商 |
BC 1600 ~ BC 1046 | ||||
당唐 |
618 ~ 907 | ||||
주周 |
BC 1046 ~ BC 221 | ||||
5대10국五代十国 |
907 ~ 979 | ||||
진秦 |
BC 221 ~ BC 206 | ||||
북송北宋 |
960 ~ 1127 | ||||
한漢 |
BC 202 ~ AD 220 | ||||
남송南宋 |
1127 ~ 1276 | ||||
3국三國 |
위魏 |
220 ~ 265 | |||
요辽 |
916 ~ 1125 | ||||
촉蜀 |
221 ~ 263 | ||||
서하西夏 |
1038 ~ 1227 | ||||
오吴 |
222 ~ 280 | ||||
금金 |
1115 ~ 1234 | ||||
진晋 |
서진西晋 |
265 ~ 316 | |||
원元 |
1271 ~ 1368 | ||||
동진東晋 |
317 ~ 420 | ||||
명明 |
1368 ~ 1644 | ||||
16국十六國 |
304 ~ 439 | ||||
청清 |
1644 ~ 1911 | ||||
남북조南北朝 386 ~ 589 |
북조 北朝 |
386 ~ 581 | |||
중화민국中華民國 |
1912 ~ 1949 | ||||
남조 南朝 |
420 ~ 589 | ||||
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 |
1949, 10, 1 ~ |
진秦, 진晋 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한글로 읽을 때 같을 뿐입니다.
한나라 뒤의 이민족이 아닌 한족이 세운 나라와
현대의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나라들에 대한 왜곡과 과장된 부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중국의 정통성과 민족적 우월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주관적인 역사해석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비단 중국 뿐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부분이 적지 않고, 일본도 마찬가지 입니다.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애국심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역사를 가르치는 자들의 의무 중 하나라고 봅니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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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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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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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선진시기는 진나라 이전의 시기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왕실을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 이 시기 동안 세력이 강한 제후중에 주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다섯 개의 제후국을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중화민국은 공화국을 선포하지만, 위안스카이가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정을 선언하면서 제정을한때 시행되나 위안스카이사후 공화정으로 복귀되나 , 화북의 군벌시대, 남쪽의 중화민국으로 잠시 양분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천두슈와 마오쩌둥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화북의 군벌들을 제압하는 데 공산당과 협력하는 한편으로,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공산당 역시 세력확장을 위해 중화민국과 협력하는 한편으로 소련 등과의 접촉을 계속 시도하였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 때에도 중화민국과 공산당은 협력과 경쟁을 반복했으며, 1949년을 기점으로 지금과 같은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아시아 각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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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 | 그루지야¹ · 네팔 · 동티모르 · 라오스 · 러시아¹ · 레바논 · 말레이시아 · 몰디브 · 몽골 · 미얀마 · 바레인 · 방글라데시 · 베트남 · 부탄 ·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⁴ · 브루나이 · 사우디아라비아 · 스리랑카 · 시리아 · 싱가포르 · 아랍에미리트 · 아르메니아¹ · 아제르바이잔¹ · 아프가니스탄 · 예멘 · 오만 · 요르단 · 우즈베키스탄 · 이라크 · 이란 · 이스라엘 · 인도 · 인도네시아 · 일본 · 중국 (중화민국⁴, 중화인민공화국) · 카자흐스탄¹ · 카타르 · 캄보디아 · 쿠웨이트 · 키르기스스탄 · 키프로스² · 타이 · 타이완 (중화민국⁴) · 타지키스탄 · 터키² · 투르크메니스탄 · 파키스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³ · 필리핀 · 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속령 | 마카오5 · 홍콩5 · 티베트3 | |
¹.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함. ².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 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 ³.아시아의 비독립 국가. ⁴.불인정 또는 일부 인정 국가. 5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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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수도(위: 낙양->허창), 촉:성도, 오: 건업)
지도로 보는 간단한 중국역사
<그림 : 우리가 흔히 아는 가짜 삼국지 지도 : AD3-4세기>
이 지도는 한대의 영향력이 미치던 영토로 착각해서 그린 것이다.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역이 아니다.
<그림 : 진짜 삼국지도, 실제 한족이 지배한 영역> 어째서 그러한가?
또는 다른 지도(^^)
삼국의 영토는 한대의 영토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한대의 영토 중에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토가 삼국지의 무대가 된다. 기타 지역은 아직 한화되지 않은 이민족이 살던 곳이다. 중국이 분열되면 당연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림 : 중국의 고대 상(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시(BC7-BC4세기)
-진나라(BC3세기)-한나라(전한) 영토>
오리지날 한족 영토
원래는 <하-은-주-한>으로 간다고 하지만 <하>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그 전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기록상으로만 존재한다. 처음 중국은 하나라에서 시작하니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쪽의 <동이족>과 결합해서 <한족>이라 부른다. 중국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은 한나라를 그 시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수도는 낙양과 장안으로 화하족의 중심이다. 그러나 중국 문명은 황하에서 시작되었고 동이족의 영토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것으로 한자가 처음 만들어 졌다.
그러니 동이족이 바로 한족이다.
<그림 : 중국 북쪽의 지명>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으로 나뉜다. 그 알타이가 알타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다. 우랄은 우랄 산맥에서 나온다. 우랄은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해 준다. 알타이는 아시아의 중앙에 있다.
<그림 : 중국 춘추전국시대 BC7-BC4세기, <진/한>통일 전의 영토>
이 영토가 한나라의 영토가 된다.
요동은 고조선의 영토로 추정되지만 연나라의 공격으로 평양으로 후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요동이 진나라때 중국 영토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은 만리장성의 끝이 요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영토는 나중에 고구려에 의해서 수복된다.
<연/제/초>는 동이족의 영토였다.
반면 <진/위/한>은 화하족의 영토였다.
이곳에 낙양과 장안이 있다. 이 수도는 주나라때부터 당나라까지 수도로 쓰인다.
<그림 : 중국 고대의 주변 민족>
.
중국의 <진대 BC 3세기>는 유럽의 <알렉산더>시대에 해당된다.
<한대 BC3세기-AD3세기>는 유럽의 <로마>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흉노가 사라질 무렵 유럽에선 훈족이 나타나서 로마를 멸망시킨다.
중국에서 돌궐이 사라질 무렵 서쪽에선 투르크 왕국들이 생기며 동로마를 멸망시킨다. 몽고족이 동서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면 과거 흉노와 돌궐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과거에는 기마 유목민의 군사력이 최강이었다.
로마도 훈족에게 조공을 받쳤고, 한나라도 흉노에 조공을 받쳤다.
<그림 : 흉노족의 이동> 기록을 좇아서 찾은 추정 위치
중국에서 이미 동서로 흉노족이 갈라진 기록이 나온다.
서쪽에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유럽이다.
<그림 : 고대의 우리나라 민족 이동 경로 추정>
우리민족을 북방 기마민족이라 가정할 경우
우리 민족을 북방 유목민 중의 어느 한 종족으로 가정한 경우 민족 이동 경로이다.
중국인이 맥족이라 부르던 종족이 직계조상으로 추정된다.
몽골과 고구려의 관계는 몽골의 신화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으로 추정한 것이다.
코리(=구리=구려=고려=Corea=Korea)족의 고주몽과 같은 활솜씨가 좋은 자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하나의 부족이 둘로 갈라지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중에 몽골에서 징기스칸이 나온다.
<그림 : 중국 한대의 동북아 종족>
여기서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의 세계이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켰고, 한반도에 한4군을 두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건국되는 과정에 있다.
기마 문명은 서쪽 터키지역에서 중앙 아시아 초원지대와 한반도 신라와 가야까지 걸쳐있다. 아주 옛날 하나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도 원주민이 있었다.
결국 한반도와 일본은 원주민과 기마유목민의 혼혈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한반도는 <기마유목민+한족+원주민 = 한민족>이 된다.
<그림 : 한나라와 고구려>
고구려가 막 태어나고 신라/백제/가야/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우린 우리 역사를 한나라의 기록을 통해서만 볼 수 밖에 없다.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기록에서 찾았듯이 고구려의 역사도 중국 기록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림 : 한나라 때의 지방 명칭>
중원의 주요 주(소국)의 명칭이다.
조조는 청주병을 거느렸다.
청주는 산동반도이고 동이족의 땅이었다.
<그림 : 전한-후한-황건적 봉기 AD 3세기 현황>
여러 곳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조직적인 반란이다. 황건적의 난이 아니라 황건민중봉기이다. 중국은 종교단체로 인한 반란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파룬궁(법륜공)이란 기수련 단체도 수난을 겪고 있다. 로마도 기독교계 지휘관의 승리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종교란 위험한 것이다.
<그림 : 삼국지 AD 3-4세기의 영웅출생지>
서부/북부 유목민 출신 또는 그 문화 영향을 받은 영웅은 항상 악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인은 북방 기마민족을 아주 싫어 한다.
중국 한족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나라와 촉한(유비)에서 찾는다.
그러나 위나라(조조)가 중국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다. 단지 북방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동탁/여포/이각/곽사가 삼국지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나올 수 있던 것은 강력한 군대 덕분이다.
<그림 : 삼국지 초기 3세기 군웅들의 위치>
<그림 : 삼국지 1차 대전 = 관도대전 초반, 원소 vs 조조>
<그림 : 삼국지 관도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오환족과의 전투>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마무리>
<그림 : 관도 대전 당시의 주변 민족>
여기 나오는 오환족은 거란족의 땅과 일치한다.
선비족이 중원으로 들어가면 그 빈 땅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어느 한 순간 돌궐(투르크)이라는 나라가 동방에서 시작된다.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의 결말, 조조의 영토> 사실상 중국의 통일 달성
사실상 삼국지는 여기서 끝난다. 조조가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조조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중원이라고 부르는 노른자위땅이다.
이곳에 태산(중국 황제가 제사지내는 곳)이 있다.
<그림 : 삼국지 2차 대전 = 적벽대전, 조조 vs 손권>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후반, 조조퇴각>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결과 손권 오의 영토>
모든 도시들이 황하와 양자강 주변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강을 통해 배로 물자를 수송하고 이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 좋기 때문이다.
형주땅은 적벽 대전 결과로 유비가 먹었으나 촉으로 이동하고 나서
오에 빼앗기고 만다.
<그림 : 삼국의 성립>
이렇게 하여 명목상 삼국이 성립된다.
단지 요동에 미친 연나라가 하나 있다.
<그림 : 1차 요동전쟁 237년, 고구려 /위 연합 vs 연>
유주의 장관이던 관구검이 237년~238년에, 권신(權臣) 사마의(司馬懿)의 명령으로 고구려와 협력하여 연나라를 자칭한 공손연(公孫淵)이 점령하고 있는 요동을 정벌했고, 안읍후로 승진했다.
<그림 : 2차 요동전쟁 244년>
고구려 vs 위(관구검)=> 고구려(동천왕)의 굴욕
244년 고구려에 2차로 침입하여 수도 환도성을 점령하였고 동천왕(東川王)은 옥저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한 저항을 받아 멸망시키지 못하고 군대를 물렀다.
고구려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에 참전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관구검은 고구려의 동천왕을 맞아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결국 그를 물리쳤다.
이후 환도성을 공략하며 고구려의 전국토를 유린하지만 남옥저 부근에서 고구려 장수 유유와 밀우의 활약에 막히며 부장 왕기(현도태수)가 사살되는 등 피해를 입으며 위나라로 후퇴했다
처음엔 고구려-위 연합이 연나라를 깬다. 그 후 고구려와 위나라가 한 판 붙는다.
이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의외로 오래전에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까지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고구려는 멸망직전까지 간다.
<그림 : 제갈량의 남만 정복> 베트남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당시 남만이란 양자강 이남 사람을 뜻한다.
당시 동이족이 중국 동해안 평지사람들을 나타내듯이
남만은 양자강 이남 사람들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의 영토는 크지 않았다.
<그림 : 제갈량의 소설상의 행군로>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됨.
<그림 : 제갈량의 실제 예상 행군로>
제갈량이 놀았던 지점은 촉땅 남부 지금의 운남성 정도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게임에는 베트남까지 간 것으로 나와 있다.
남만은 베트남이 아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맹획을 7번잡았다 놓아 주긴 뭐하니 그냥 힘으로 눌렀다. 그게 중국 방식이다.
그 다음이 제갈량과 강유의 북방공격이다.
별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다가 제갈량이 죽는다.
강유 또한 전쟁만 벌이느라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위나라는 실속이 없는 전쟁을 피하려고 촉과 오를 남겨 놓는다.
그러나 사마씨가 晉나라를 세우면서 새 왕조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촉과 오를 통일하게 된다.
<그림 : 晉의 오나라 정벌 4세기> 간단한 촉 정벌후 대대적인 오나라 공격
이로써 삼국지의 시대는 끝난다. 촉과 오는 아주 쉽게 무너진다.
이로써 나라가 망하는 것은 2가지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층의 부패와 외부의 강력한 힘이다.
<그림 : 삼국의 통일 서진 4세기, 사마씨의 나라 분열, 8왕의 난과 당시 5호의 위치>
통일한 나라를 사마씨들이 망친다.
8왕의 난으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북방 기마민족 5종족이 중국을 쳐들어 온다.
강/저는 지금의 티베트와 위구르 족속의 위치에 있다.
위구르는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서쪽의 터키가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이렇게 넓은 곳을 이동할 민족은 기마유목민 밖에 없다.
선비/흉노/갈은 중국에 흡수되어 이미 사라진 종족이다.
이때부터 5호 16국(5 종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우고 망하는 어지러운 세상)시대다.
<그림 : 5호의 침입으로 줄어든 중국 영토>
남쪽으로 쫓겨간 중국인들
<서진 263-316> <5호16국 4-5세기> <남북조 5-6세기>
이 때 중국인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가 양자강 이남이 중국 영토가 된다.
양자강 이남에선 오나라의 건업/남경이 수도가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말과 북방 중국어의 말이 다르다.
한국/일본/대만의 한자 발음은 남쪽 중국어와 비슷하다.
<그림 : 삼국 통일 후의 서진 시대>
아직 북방에 있을 때
<그림 : 5호의 침략후 동진 시대>
남으로 쫓겨간 때
<그림 : 북방민족의 5호 16국 시대 : 5세기>
드디어 북방 민족의 시대가 열리며 중국인의 굴욕의 시대가 왔다.
북족의 어지러운 종족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간다.
이들은 결국 수나라와 당나라를 만들게 된다.
수/당 왕조는 북방민족(선비족)의 황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한다.
그래서 육체는 유목민의 씨앗이나 정신은 한족이 된다.
이 혼란한 시기에 고구려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 우리에겐 불행이 시작된다.
<남북조시대 5-6세기>
이 나라를 통일한 나라가 7세기 수나라(선비계)이고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결과 수나라가 망하고 다시 8-9세기 당나라(모계가 선비계)가 통일을 하고 역시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1차는 패배, 그러나 2차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한반도의 삼국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 전에 나당 연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왜는 일본으로 독립하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의 후속국인 발해가 서면서 국제는 <당-발해-신라-일본>이 성립된다.
이 때부터
한국은 신라의 후손으로 갈리며
발해는 청나라로 이어지고,
일본은 독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 때 중국에 잡혀간 고구려인들이 서쪽으로 남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이상한 곳에 가면 한국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 중에 고선지장군이 있어 서양에 종이를 전해주게 된다.
<그림 : 북방 기마 유목민의 복수, 수(7세기)/ 당(8-9세기)-요(10-12세기)/
금(12-13세기)남송시대 원(13-14세기)남송 시대>
고구려는 발해로 이어진다. 발해는 거란(요)에 망하고
당은 5대십국으로 멸망되고 나중에 금이 서게 된다.
그리고 몽고에서 징기스칸이 나오면서 원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압박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의 자존심은 <漢-唐-明>인 3개의 나라만으로 좁혀진다.
기타 중국의 다른 나라에선 중국의 자존심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통신-고려-이씨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북방의 우리 친척은 <고구려-발해-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진다.
고려는 원나라와 많은 문화적인 교류가 있고, 왕족 간의 결혼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간에 못할 짓을 많이 해서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려가 원에 협조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이 청에 협조를 했다면?
원은 일본을 침략하다 카미카제(신의 바람)을 만나서 모두 침몰한다.
그리고 이 징기스칸 덕분에 서양은 고려의 금속활자기술을 받고, 중국의 화약을 받게 된다. 4대 발명품이 모두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왜 4대 발명품인가?
서양을 과학시대로 이끌고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먼저 동로마가 투르크의 대포에 멸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림 : 중국의 자존심 회복, 명나라 14-17세기)>
원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은 북쪽(=북원=>티무르왕조)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명나라가 서게 된다.
그리고 우린 조선이 된다.
명나라와 조선은 망국적인 사상으로 살던 국가들이다.
명나라 황제중에 정상적인 놈이 없었고, 조선도 참으로 이상하게 답답하게 살았다.
일본이 이 때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명은 후금(만주족 =청)과의 전쟁에서 지게 된다.
타타르가 도망간 몽골족인가? 지금의 타타르족은 러시아 쪽에 살고 있다.
지금 몽고족은 할하족이라 한다. 몽고가 이러하게 광대한 영토를 얻었는데
그 옛날 <흉노=훈, 돌궐=투르크=터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고대의 고조선이 기마유목민족이라면 그런 넓은 영토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총이 나오기 전에는 기마유목민의 전투력이 전세계 최고였던 것 같다.
<그림 : 다시 북방 기마민족의 세계로, 청나라 17세기-20세기>
앞에서 말했듯이 <고구려-발해-금-후금-청-중국>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통신-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가야/백제/왜-일본>으로 이어진다.
이 청나라가 한 일이 재미있다.
북방 몽골족이랑 통혼을 하고 몽고족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한족과는 통혼을 하지 않았다.
몽고족과 고구려 후손들이 서로 같은 족속으로 생각했단 뜻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엄청나게 넓혀주어서 지금 중국인들에게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 결국은 한족으로 동화되어 통혼이 되고 언어도 사라져버렸고
청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그 힘을 잃어 버린다.
몽골은 나중에 독립하게 된다.
동북공정은 이 청나라 역사(고구려~청)를 숨기는 것이다.
청=현대중국=고구려의 후손=고구려인은 중국인!?
고구려는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다.
<그림 : 청나라가 한족과 북방기마유목민을 구분하던 경계>
청나라도 처음엔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중국은 자신들의 뿌리를 한족에만 두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이 모두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림 : 청나라가 준 선물, 동남쪽 영토>
무협지에 잘 나오는 반청복명의 근거지가 대만이었다.
당시 대만 원주민을 명나라 잔류병이 쳐들어가서 대만이 결국 중국 영토가 되었다. 청이 이 반군을 섬멸하면서 대만이 중국영토가 된 것이다.
삼국지 게임에 나오는
<남만/산월/강족/오환>중에서 푸젠/광둥에 있던 산월도 없어진다.
그 다음일은 잘 알고 있는 2차 세계 대전, 장계석-모택동 전쟁, 한국(6.25)전쟁 등이 있다. 장계석이 역시 대만으로 도망가서 대만은 또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민족간의 전쟁으로 서로 밀리고 밀려서 형성되었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로 들어가서 로마가 망했다.
게르만족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동쪽에서 밀리면서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정리하자!
역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국민들이 문란해서도 아니고, 왕이 홀로 타락해서도 아니다.
주로 집권층(귀족/권력집단/장관/경찰/군인/공무원)의 타락이 주 원인이다.
또 다른 원인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망하는 경우이다.
90%의 사실 + 10% 거짓말 = 100% 사실이다.
모든 역사기와 종교와 소설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린 진실을 알지 못한다.
삼국지 소설은 거짓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100%사실이라고 착각한다.
2. 중국인들의 지도
현재 중국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국가이다. 봉건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동북지역에는 고조선이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춘주전국시대를 거쳐 중국 최초의 제국시대를 연다.
중국 민족인 한족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한나라는 동북지역의 맹주였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베트남, 몽골, 일본, 중앙아시 등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한 제국이었다. 중국은 곧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5개 부족이었다. 5호16국시대(4-5세기), 남북조시대(5-6세기) 각 부족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한다. 결국 수나라는 동북지역을 장악한 고구려제국을 침공했지만 패배하고 내부분열로 멸망한다. 건국당시에는 당 북쪽지역에 있던 돌궐의 신하국가로 복종하지만 돌궐제국이 분열하면서 당제국은 돌궐을 정복한 후 고구려를 정복한다.
고선지 장군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아랍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당제국은 국제적인 국가였으며, 당시 최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현대 중국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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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BC7-BC4세기)
전국시대 BC4세기
진나라 BC3세기
(서)한시대 BC 3세기-AD3세기
중국 삼국시대 3세기
서진 4세기
5호16국시대입니다....전진/동진 (5세기)
남북조 시대(6세기초) : 북위/남제
남북조시대(6세기말): 북주,북제/진
수나라(6-7세기).. 돌궐(서돌궐, 동돌궐)
당나라(7-9세기)
요나라(10-12세기)/송
금나라(12-13세기)/ 남송!!
원나라(13-14세기)
명나라(14-17세기)시대. 과장이 좀 심하네요...
청나라시대(17-20세기) 만주족들에게 고마워해라 이것들아...
<위> 155년 조조 태어남.
189년 조조, 향리에서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함. 192년 연주목으로 영입되어 정예군 청주병을 조직함.
196년 헌제를 봉대하고 허창으로 천도함. 둔전제 시행.
200년 백마, 관도에서 원소군을 무찌름.
207년 오환을 정복하여 평정.
210년 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213년 조조, 위공이 됨. 215년 조조의 딸, 헌제의 황후로 세워짐. 한중을 평정. 216년 조조, 위왕이 됨.
219년 조조, 한중을 잃음. 손권과 연합, 관우를 격파함.
220년 조조 서거. 조비, 문제에 오름. 후한 황조 멸망. 낙양으로 천도함.
226년 조비 승하. 조예 즉위.
234년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 237년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듦. 238년 사마의, 공손연의 난을 진압. 239년 조예 승하. 조방 즉위.
249년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당을 처형함.
251년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 실패.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뒤를 이음. 254년 사마사 주살 계획 실패. 조방이 폐위되고 조모가 옹립됨. 255년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음. 257년 제갈탄이 오나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다음해 진압됨.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려다가 살해됨. 조환 즉위.
264년 사마소, 상국지공이 됨. 촉나라 정복.
265년 사마소, 진晉왕이 됨. 266년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음. 위 황조가 멸망하고 진西晉 황조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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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161년 유비 태어남. 184년 유비, 황건적의 난 진압에 사설 군대를 이끌고 활약함.
194년 유비, 예주자사에 임명. 도겸 사후 서주목을 겸임함. 196년 유비, 원술 토벌 중에 여포에게 서주를 습격당함. 198년 유비, 조조와 협력해 여포를 멸함. 199년 유비, 조조의 명으로 원술을 멸하지만, 조조에게 반기를 듦. 200년 유비, 조조에게 패해 원소 밑으로 들어감. 201년 유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해 유표 밑으로 들어감. 207년 유비, 제갈량을 군사로 영입함. 208년 유비, 손권에게 제갈량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적벽대전에서 승리. 209년 유비, 형주목이 되어 손권의 누이(손상향)와 결혼함.
214년 유비,
219년 유비, 한중왕을 칭함.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김. 관우,손권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함. 221년 유비, 촉한 황조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함. 장비 범강,장달에게 살해당함. 222년 유비, 이릉에서 동오와의 전투에 대패. 오나라와 국교 수복. 223년 유비 승하. 유선 즉위. 225년 제갈량, 남만 정벌. 227년 제갈량, 출사표를 올리고 한중으로 진군. 228년 촉군이 가정에서 위군에게 패함. 229년 조자룡 사망. 제갈량, 무도·음평 2군을 평정함.
234년 제갈량, 사마의와 대치 도중에 사망. 군 퇴각.
244년 비의, 위 조상의 촉 침공을 격퇴함. 249년 강유, 옹주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56년 강유, 위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64년 위의 침공을 받아 유선은 위나라 등애에게 항복. 촉한 멸망. 265년 종회와 강유가 촉한 부활을 위해 성도에서 쿠데타하지만 실패. 강유와 종회 참살. 반란 직후 유선, 안락공으로 봉해져 낙양으로 압송. 271년 유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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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156년 손견 태어남.
184년 손견, 황건적을 토벌함. 190년 손견,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192년 손견, 유표 공격 중 전사. 아들 손책이 뒤를 이음. 194년 손책,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함. 197년 손책,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절교.
200년 손책,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음. 동생 손권이 뒤를 이음.
208년 손권, 유비와 합심해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음. 213년 조조와 유수에서 전투를 벌임. 215년 합비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대패. 217년 손권, 조조와 화전함. 219년 손권,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평정.
221년 손권, 오왕으로 봉해짐.
222년 촉한과 국교 수복.
223년 위나라와 국교 단절.
228년 육손, 석정에서 조휴를 격파. 229년 손권, 황제를 칭함.
241년 태자 손등이 죽음. 손화를 태자로 책봉.
250년 태자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태자로 책봉.
252년 손권 승하. 손량 즉위.
257년 제갈탄의 반란에 원군을 보내나, 진압됨. 258년 손량 폐위. 손휴 즉위.
264년 손휴 승하. 손호 즉위.
280년 진晉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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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 155년 ~ 220년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비록 환관의 자손이지만 신분의 벽을 넘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시대를 선도한 풍운아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하후돈과 하후연 이 두 사람은 그의 대표적인 가신(家臣)이다.
즉 유비에게 관우, 장비가 있다면 조조에게는 하후돈, 하후연이 있다는 것.
조조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조조는 얼굴이 약간 여우처럼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劉邦)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 》〈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본래 하후씨이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와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 |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숙부께서는 저를 싫어하셔서 없는 말을 지어내는가 봅니다. | ” |
라고 답하였다.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설신어에 의하면 조조는 원소(袁紹)와 어린 시절부터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조조는 품행이 좋지 못했으며, 거칠고 학업을 쌓기를 게을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도 젊은 시절의 조조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나라의 교현(橋玄)과 남양의 하옹(何?)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許昭)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십상시인 건석(蹇碩)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형틀에 묶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2] 이로 인해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으로 승진하나, 중앙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董卓)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산조(酸棗)에 집결해 있던 여러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조조는 장막(張邈)과 힘을 합쳐 형양에서 동탁군과 싸웠으나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산조로 돌아온 조조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제후들에게 동탁을 격파할 전략을 제시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모든 제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했고, 단지 유력자들의 이합집산일 뿐이었으며 심지어는 맹주인 원소조차 연합군 내부의 견제로 보급로가 차단당해 꼼짝할 수 없었을 정도였던 연합군에게 이런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한편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손쉬운 방법으로 동탁을 견제하고자 했다. 바로 기존 황제를 시해하고 동탁에게 옹립되었다는 명분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당시 황실의 정통성에 도전하여 명망 높은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던 것이었는데, 원술(袁術) 등이 중심이 되어 이와 대립했고 이때 조조도 원소와 일시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계책은 유우 본인의 거절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사실상 해산되고 만다.
이때 조조가 동탁을 친 것이 계산된 행동으로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인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동탁으로부터 헌제를 구출하지는 못했다.
반면 원술은 손견(孫堅) 등을 앞세워 실제로 동탁을 격파하고 화웅(華雄)을 쓰러뜨리는 무훈을 세웠으며 더군다나 낙양(洛陽)을 수복하는가 하면 연합군의 유우 옹립 계획에 반대한 대표자격으로 초반에는 여론에 있어서도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순욱(荀彧)이 그를 그토록 예우하던 원소를 따르지 않고 굳이 조조를 따른 예의 경우 당시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노골적인 패권주의를 보여온 원소와 달리 조조가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킬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지만 이 무렵의 조조의 행보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후 원소와 제휴한 조조는 191년(초평 2년)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하고 원소로부터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해 왔다. 당시 연주목이었던 유대(劉岱)는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평소 조조와 가까웠던 제북상 포신(鮑信)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했다. 조조는 황건적과 싸워 포신이 전사하는 등 고전했으나 마침내 가까스로 격파해 몰아냈다.
이후 조조는 이들과 협상해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황건적을 흡수해 기반을 얻은 조조는 이때부터 차츰 원소의 영향에서 벗어나 난세의 군웅으로서 발돋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公孫瓚)과 서주의 도겸(陶謙)과 손잡아 서로를 견제했다.
이때부터 원소의 영향 아래 있던 조조는 인접해 있던 도겸과 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조는 원소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을 격파하여 마침내 원술은 본거지를 버리고 양주(회남)로 달아나게 된다. 이 직후에 도겸은 재차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라는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웠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劉備)가 여포에게 하비(서주)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 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曹昻)과 부하 전위(典韋)가 전사한다. 이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유비는 하비에서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했다. 그러나 200년에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關羽)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 밑으로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졌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이는 등 활약했지만, 점차 전황이 불리해지고 아군의 식량이 고갈되어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부하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식량기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여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 |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 ” |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3공의 지위를 없앴으며 이미 대장군이 되어 있었기에 '대장군 대승상'(大將軍 大丞相)으로서 공식적으로 후한 조정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형주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대패하여 조조는 가까스로 도망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망치는 도중에 3번이나 손권과 유비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나라면 여기에 복병을 놓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조운(趙雲), 장비(張飛), 관우에게 차례로 습격당한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 아들인 조비가 미리 화용도를 정비하고 오림에 도착하여 조조가 수월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제갈량은 적벽에서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고 수월하게 형주와 촉을 병합하려 하였지만, 조비의 길 정비로 인해 기대한 것의 10분의 1만큼의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때려부순 조조의 병선은 거의 대부분 형주의 병선들이고,
죽은 병사들은 원래 조조의 청주병이 아닌 형주의 유표, 유종의 수군이었을 뿐이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조조는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조조는 자신이 저축한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모두 기부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훌륭한 군주로 거듭났다. 그 영향을 받아 조조를 섬기고 있던 고위 관직층 신하들도 자신들이 저축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위왕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찮다. 조조의 위왕 취임을 반대한 순욱에게 자살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자는 비록 공로자라고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211년 마초(馬超)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세력이 약해진 틈에 마초에게 습격당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허저(許?)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3]
결국 가후(賈?)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한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벌였다.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대신 손권과 연대해 형주의 관우를 격파한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曹丕)가 위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曹植)과 함께 당대의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는 정치와 군사 뿐만 아니라 문학 방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공식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다고 평가받고, 당시의 최고 시인의 한명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단가행(短歌行)》, 《구수수(龜雖壽)》 등이 있다.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성격적 결함이 있었다.
유비에게 속아서 당대 최강의 무예를 자랑하는 여포같은 아까운 인재를 함부로 참수했으며 적벽대전에서는 방통에게 속아서 배를 하나로 묶은 데다가 매복장수인 황개에게 속아서 내부전투가 발발하는 바람에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했다.
또한 조비에게 속아서 조비에게 후사를 잇게 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는데 조비는 주색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주공을 본받아 자신이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 조비에 이르러 한실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이 계속 쫓아다녔고 명분론과 정통론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반역자와 도적으로까지 묘사되기도 하였다.
나관중의 연의에 이르러서는 간교한 악인의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경극 도중 조조역의 배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조조는 한제실에 대한 간신과 역적의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과 곽말약(郭沫若) 등이 조조의 영웅으로서의 진취성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복권에 대한 움직임도 상당하다.
영화 적벽대전 2에서 조조는 리더십이 뛰어난 지도자로 설명된다. 전염병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로하여 전쟁에서의 승리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문학에 뛰어나서 조조의 시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치세의 도적이자 난세의 영웅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했다.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는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진수가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뜻이다.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조조와 사마의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4]
시인이자 정치가였였던 두목(杜牧)은 “조공(조조)은 손무의 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면서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조조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조조의 복권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의 제도 개혁과 둔전제 등의 정치적 공적과 탁월한 군사재능 그리고 조조의 문학 재능을 칭찬하면서 조조를 공식 석상에서만 32번 언급하여 모택동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이 조조라고 한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5][6]
나관중은 조조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촉한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7]
하지만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밭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며[8],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 조조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만 자신의 말이 보리를 밟았다. 법을 어김을 부끄럽게 여긴 조조는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을 두려워하였다.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 현 안펑 향 시가오쉐촌에 있는 동한시대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중국 학계의 따르면 무덤의 크기는 지하 15m에 위치한 이 무덤은 갑자(甲字)형태의 구조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진 내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앞뒤에 규모가 큰 쌍실(雙室)과 4개의 측실(側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길이 39.5m, 넓이 9.8m에 전체 면적이 740㎡로,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차례 도굴됐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됐으며 조조가 사용하던 창과 조조가 사용하던 돌베개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 남성과 여성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는데 이 남성의 유골은 사망 당시 60세 전후였던 것으로 감정됐다. 이는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골이 조조의 것으로 보고있다.[9]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결론과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두 비석은 현장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공안국이 도굴꾼들을 체포해 압수한 과정에서 가짜가 만들어질 가능성 있는 등 의문을 제기하였다.[10]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문물국은 "조조의 고분을 발굴하고 학술적인 검증을 거쳐 연구성과를 발표한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고고학계의 규칙에도 부합한다"라고 말하며 조조의 무덤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11]
전 임 - (승상) |
제1대 위공 212년 - 216년 |
후 임 - (위왕) |
전 임 - (위공) |
제1대 위왕 216년 - 220년 |
후 임 3남 위 문제 조비 |
위세조 문황제 조비(魏世祖 文皇帝 曹丕, 187년 ~ 226년)는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이며,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자환(子桓). 그는 줄곧 조조의 첫째 아들로 불리는데, 원래는 셋째 아들이다. 조조의 첫째 아들은 조앙(曹昻)이며 둘째 아들은 조앙의 동복 아우인 조삭(曹?)인데, 조앙은 조조를 지키려다 전사했으며 조삭은 일찍 죽어서 셋째 아들인 그가 첫째 아들로서 행세했기 때문이다.
조비는 조조와 원래 측실이었던 황후 변씨 사이에 출생한 서자였다.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또한 본인의 저서인 전론(典論)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에게 사사받고 모든 검법을 숙달했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이미 8살에 붓을 들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고, 고금의 경서와 그 주석, 제자백가 등에 완전히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본래 정실인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嫡子)로 입적된 장남 조앙은 197년(건안 2년)에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역시 적자로 입적된 차남 조삭은 조앙이 죽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었으므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조충(曹沖)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조는 처음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충도 208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204년 아버지의 큰 경쟁 상대였던 원소(袁紹)의 세력을 공격하는데 종군한다.
거기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인 견씨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고 견씨는 이듬해 조예(曹叡)를 낳는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번째 아들 조식(曹植)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인해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를 유비(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이후 조비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정책을 쓰는 한편, 냉혹한 인사를 단행했다.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많은 재산을 기부한다. 그 영향을 받아 조비를 섬기고 있는 고위 관직층의 신하들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구제 활동을 한다. 그 결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조비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우(關羽)에게 항복했던 우금(于禁)이 돌아오자 선친인 조조의 무덤지기로 임명했다.
조조의 묘지 담벼락에는 희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관우가 방덕(龐德)과 우금을 생포해 놓은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방덕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 관우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관우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지만 우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울면서 관우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우금은 분통이 터져 죽었다. 조창(曹彰)의 경우 역시 병력을 남김없이 몰수하고 내쫓아버렸다.
조비는 대외적으로는 순종의 뜻을 밝힌 손권(孫權)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자 대군을 동원해 2차례에 걸쳐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내치 면에서는 유학을 장려하며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으나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폐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즉위 직후에 시행했던 구품관인법의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을 폈지만, 과거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의 쟁탈자였던 조식의 측근들은 조비의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으며 조식은 모친 변 태후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후 지방으로 쫓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다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영지를 옮기면서 쓸쓸히 죽었다. 또 다른 동생인 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조비에 의한 독살설조차 제기할 정도였다.
일찍이 조비는 당숙뻘인 조홍(曹洪)에게서 무리하게 재물을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그 때문에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홍을 내쫓고 조홍의 식객이 범한 죄를 이유로 처형하려고 했다. 이것도 변 태후의 사주를 받은 곽 황후의 처절한 만류로 죽음만은 면했다.
이 밖에도 과거의 원한으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처형한 일이 많으며 조강지처이던 견 황후에게는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는 등 치졸한 면이 많이 보인다.
226년(황초 7년),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진(曹眞)과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 7년, 나이 40살 때의 일이었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사면, 복권했다.
전 임 아버지 위 무왕 조조 |
제2대 위왕 220년 |
후 임 - (황조 성립) |
전 임 - (황조 성립) |
제1대 중국 위 황제 220년 - 226년 |
후 임 장남 위 열조 명제 조예 |
전 임 후한 헌제 유협 |
중국 황제 (촉한-유비→유선) (오-손권) 220년 - 226년 |
후 임 장남 위 열조 명제 조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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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
참모 | |||||||||||||
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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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한족 | |||||||||||||
기타 |
중국 삼국 시대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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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 |
촉한 | |
손오 |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부인이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1]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예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조정대신과 교류하거나 정사를 묻는 일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1]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곧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이 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로운 생활을 하는 등 민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235년 허도에 큰 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고 낙양에도 조양전과 태극전을 짓고 총장관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10길에 달했고 숭화전과 청소각, 봉황루 등을 세우고 구룡지를 만들어 박사 마균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궁전의 대들보와 기둥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푸른 기와와 금빛 벽돌을 사용하며 이름난 명장 3만 명이 동원되고 백성 30만 명이 부역으로 끌려와 일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표문을 올리지만 거절당하고 곧 태자사인 장무가 표문을 올리지만 조예의 분노로 처형당하며 소부 양부의 표문도 거절당한다.
한편으로는 어머니 견부인을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고 그녀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를 사사한 후 목을 베어 효수하기도 하였다.
239년에 조예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그의 사후, 어린 양자인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때 조씨 일파가 사마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실권은 사마씨가 장악하게 되고, 서진(晉)왕조의 성립을 초래하게 된다.
전 임 아버지 위 세조 문제 조비 |
제2대 중국 위 황제 226년 - 239년 |
후 임 양자 위 애왕 조방 |
전 임 아버지 위 세조 문제 조비 |
중국 황제 (촉한-유선) (오-손권) 226년 - 239년 |
후 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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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간나는대로 읽어주세요
꼭 필요한 자료였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