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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화유산자료 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2)...의성 김씨(2)
김석규 추천 0 조회 261 09.12.17 22:59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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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18 12:18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본문중 退溪嫡傳이란 부분은 관점에 따라 是非가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小見으로는 병호시비의 시작이 이미 학봉이 아니라 월천과 서애의 갈등으로 부터 잉태되고 虎派의 결집은 학문적 계승보다는 광해군 이후 소왜된 계파의 단결이라고 생각됩니다.사실 학봉의 문집에도 학술적 저술의 분량은 많지않고 제자도? 여담: 鶴峰의 諡狀에 보면 "旅軒 張顯光과 學問을 겨룰만 하였으니" 즉 학봉도 시호를 내려주라는 귀절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旅軒과 學峰의 지명도는 어떨까요. 張顯光(1554-1637)은 文康公(효종8년1657) 鶴峰(1538-1593)은 文忠公(숙종2년1676) 17년 후배학자가 20년 먼저 시호를 받았지요.

  • 09.12.20 17:48

    1573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575년에 완공된 안동의 首서원인 여강서원이 숙종조인 1676년에야 비로서 호계서원으로 사액되는 것이나 학봉선새의 시호가 늦게 내려진 것은 서인들의 남인 견제와 서인들이 제기한 임진왜란 책임론의 희생양으로 학봉선생이 지목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 09.12.23 09:39

    미묘한 논란(?)이내. 병호, 한려시비의 뿌리가 아닌가? 당시 서인(노론)들은 남인들을 재기 불능하게 하기위하여 영남 남인 세력들에 대하여 분열 공작도 많이 시도하고 성공도 했는데 대표적인 겄들이 병호, 한려시비라고 할수 있겠지요.

  • 작성자 09.12.21 15:32

    퇴계의 적전문제를 놓고 시각이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대표적 고제를 월천,서애,학봉으로 볼때 재전제자 경당이 누구의 학맥을 계승했는가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겠습니다 ..경당은 학봉 사후에 서애문하에 출입을 한적도 있습니다만, 아버지 장팽수와 학봉이 같은 안동 권씨 집안의 사위이고, 어릴적부터 같은 향리에서 학봉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말까지 계승된 퇴계의 학맥을 고려할때 경당의 위치를 학봉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큰 이견이 없는 걸로 보는데....

  • 09.12.22 10:57

    활자로 공식화 할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을 안고 있지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溪門第子錄은 지금까지도 진행중이고 지금도 조상의 이름 석자를 올리기위해 자손들이 노력하고있습니다. 학맥의 개념이 무었일까요. 특히 영남에서? 어느계열이던 줄을 서지 않으면 발언권을 행사할수 없고 일부러라도 이슈를 만들어 논란의 場이 펴져야 자신의 존재를 들어낼수 있었지요. 과연 敬堂 생존시 그의 위치와 역할은? 갈암7세 경당 사망,대산19세 밀암 사망 정제5세 대산 사망 영남 유림의 8할이 虎派에 인연을 맺으려 노력함.(총독부 편수관 신석호 병호시비전말을 국가예산으로 조사정리)실제 당시 인물들은 계파에 관계없이 스승관계를 맺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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