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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아동소설〕
부처님 곁으로 간 소년
1. 봄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밤공기를 찢으며 들려왔다. 뒤이어 쫓고 쫓기는 듯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칠구야, 아직 안자니?”
소년은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다 말고 옆자리의 칠구를 불렀다.
“응, 그래. 밤이 제법 깊었나봐…… 야경꾼 아저씨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말이야.”
골목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집집의 방마다에 켜놓은 등도 이미 꺼져 있었다.
봄이라지만 아직까지 겨울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제법 썰렁한 밤바람만이 아직 잠을 못 이룬 채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또 한 번 저쪽 골목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에잇, 귀찮아! 또 저놈의 소리가 가슴속을 박박 긁어대는군.”
칠구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씨부렁거렸다. 그는 숨을 씨근거리며 골목 저편의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칠구야, 갑자기 왜 그래?”
소년도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칠구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호루라기 소리를 귀찮아하는 그의 표정을 으슴프레 읽을 수 있었다.
“저놈의 소리만 들으면 고아원시절의 배고픈 생각이 떠오른단 말이야…에이, 퉤, 퉤, 퉤!”
칠구가 길바닥에다 침을 내뱉으며 계속 군시렁거렸다. 소년은 칠구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싸늘한 리어카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칠구야. 그까짓 일 생각하면 뭘 해…그곳에서 이렇게 뛰쳐나왔으면 됐지 뭐. 벌써 열흘이 넘었잖아, 응?”
“에이, 빌어먹을!”
칠구는 벌떡 일어서며 밤하늘을 쏘아 보았다. 칠구가 일어나는 바람에 리어카가 잠시 기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고아원을 뛰쳐나온 지도 어언 열흘이 넘었다.
칠구와 함께 뛰쳐나오긴 했지만 누구 하나 따스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 없었다. 낮엔 시장바닥을 서성거리며 덤쑥덤쑥 배를 채웠다. 밤이면 이렇게 동네 골목의 리어카 위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벗 삼아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귓불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고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얘, 칠구야, 우리말이야... 언제까지나 이런 리어카 위에서만 잠을 잘 수 없잖아.”
칠구는 소년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칠구는 다시 벌렁 드러누우며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괴로울 때면 언제나 튀어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게 말이야…이러다 야경꾼 아저씨들한테 붙잡히는 날엔,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고아원으로 끌려갈 텐데.”
“칠구야, 우리 어디라도 취직을 하면 어떨까, 응?”
“야, 영길아. 우리 같이 초등학교 밖에 못나온 놈들한테 누가 일자리를 주겠어, 응?”
“그도 그렇구나.”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옆자리의 칠구는 어느새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은 잠이 오지 않으면 늘 하던 버릇대로‘눈 속에 별 집어넣기’놀이를 시작했다.
가장 크고 빛나는 별부터 먼저 하나 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 별은 눈 속으로 들어와 대롱대롱 빛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고 그 다음의 별을 찾아 집어넣었다. 눈을 감았다. 이번엔 별 두 개가 초롱초롱 눈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세엣, 네엣, 다섯, 여섯…….
어느새 소년의 눈 속엔 별이 가득 차 버렸다. 눈 속은 대낮보다 더 밝았다. 별들이 제마다 새파란 빛을 내쏘며 대롱거렸다.
소년의 마음도 그 별빛처럼 밝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대롱거리는 별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여섯……
소년은 어느새 깊은 꿈길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눈 안에 걸려있던 별들이 마구 밤하늘을 가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영길아, 어서 별을 따라 가거라.
씽씽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별들의 저쪽에서 무겁고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날 부르는 소리 아냐?)
소년은 저도 모르게 내달리는 별 무리의 뒤를 쫓았다.
별들은 산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날아오른 별들은 산 중턱에서 한데 얼려 불기둥을 만들어 하늘로 치솟았다.
(아니, 저건 절 아냐?)
소년은 멈칫하며 산 중턱을 뚫어질 듯이 올려다보았다. 불기둥의 건너편에는 우람한 절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이놈들 ! 뭣들 하고 있느냐?”
소년은 소리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소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누구지? 또, 그놈의 방범대원들이 잠을 깨우는 모양인가? 고아원에 붙잡혀 가는 날엔 큰일인데.)
소년은 귀찮은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채며 망설였다.
“허, 허…… 이놈들 보게나. 어서 냉큼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응?”
아까보다는 좀 더 빠르고 우렁찬 목소리가 소년의 귓불을 때렸다.
“아니, 누구세요 !”
소년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홱 쏘아붙였다.
“허허, 그놈 성질 한번 되게 급하구나.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어서 친구나 깨우렴, 응?”
붉은빛 가사(스님들이 입는 옷)를 걸친 늙은 스님 한 사람이 소년을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기가 푹 꺾여 옆자리의 칠구를 흔들어 깨웠다. 칠구는 이리저리 몸을 뒤채며 짜증을 부리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너희 놈들, 꼬락서니를 보니 고아원을 뛰쳐나온 모양이구나, 그렇지?”
노승(나이가 많은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소년과 칠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년과 칠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이 흘금흘금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너희들, 어디 갈 데가 없는 모양이군…그렇지?”
노승의 두 눈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나와 소년의 눈을 부시게 했다.
칠구는 손등으로 두 눈을 씩씩 문지르고 나서야 노승을 알아본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는 스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노승은 한동안 칠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허……나 말이냐? 난, 해인사에 있는 만공 스님이다. 너희들, 먹고 잘 데가 없는 모양인데…이걸 어쩌나?”
칠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스님!”
소년은 다시 한 번 노승의 얼굴을 올려다 보였다. 마구 눈이 부셨다. 태양을 쳐다볼 때마다 더 눈이 따가웠다. 노승의 두 눈에서는 수많은 은빛의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린데…이상한 일이구나? 어디서 들은 목소리지? 아, 그렇구나! 꿈속에서 들리던 그 목소리와 꼭 닮았구나.)
노승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 날 따라 가겠느냐?”
칠구가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불쑥 말을 받았다.
“네 ?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부처님 곁으로 가는 거지…그래,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칠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열 적게 웃었다.
“에이, 난 또 스님께서 일자리를 구해주시는 줄로 알았는데…스님! 난, 불교엔 별로 취미가 없는데…그래도 괜찮을까요?”
노승은 칠구를 보고 씽긋 웃어 보이고 나더니 앞장을 서며 말했다.
“허허, 그놈 참 맹랑한 녀석이로군…어서, 날 따라 오너라.”
소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노승은 정말 사람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그분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소년과 칠구는 자석에 이끌리듯 노승의 뒤를 따라갔다.
점심나절에야 가람(절)에 도착했다. 공양간(부엌)옆에 붙어있는 허름한 방에다 짐을 풀었다.짐이래야 몸뚱이 하나뿐이었지만.
노승은 소년과 칠구를 방안에 꿇어앉혀 놓고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행자 노릇을 해야 한다. 행자란 정식으로 숭려가 되기 위한 입문 과정을 밟는 사람을 말하느니라. 저 아래 세상에서처럼 소릴 지르며 날뛰어서 안 되느니라…말하자면 이곳의 규칙을 어기지 말란 뜻이다…알겠느냐?”
“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소년과 칠구는 엉겁결에 선뜻 대답해 버렸다. 노승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왠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점심 공양(점심 식사)이 끝나자, 노승은 소년과 칠구를 가람의 뒤뜰로 데리고 갔다.
만공 스님은 날이 시퍼런 삭도(중의 머리털을 깎는 데 쓰는 칼)를 햇빛에 비춰보며 말했다.
“자, 칠구 너부터 여기 앉거라…머리를 깎아야 정신과 마음이 맑아지느니라.”
만공 스님은 먼저 칠구의 머리부터 밀었다. 더북한 칠구의 머리카락이 덤쑥덤쑥 땅바닥에 떨어졌다.
칠구는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칠구의 까까머리가 햇볕 속에 파릇하게 들어났다. 만공 스님이 이젠 소년을 불렀다.
“자, 이젠 영길이 네 차례구나. 어서 이리와 앉거라.”
만공 스님이 예리한 칼날을 손가락으로 슬쩍슬쩍 건드리며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칼날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선뜩한 바람이 일어났다. 만공 스님은 소년의 머리를 다 밀고 나자 소년과 칠구를 나란히 앉혀 놓고 주의를 주었다.
“자, 너희들은 이제부터 이 가람의 한 가족이니라…행자 생활이 고달프더라도 이를 꾹 참고 잘 견디어내야만,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느니라……알겠느냐?”
“네,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어서 요 앞에 있는 개울에 가서 머리를 씻고 오너라.”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개울물로 머리를 빡빡 문질렀다. 온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칠구는 소년의 까까머리를 보며 배꼽을 틀어쥐고 웃었다.
“영길아, 너 말인데…꼭, 감방에서 금방 풀려나온 죄수 같다.”
소년도 칠구의 까까머리를 슬쩍 문지르며 놀려댔다.
“칠구 넌 어떻고…… 꼭, 차돌멩이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는구나.”
“히, 히, 히.”
“하, 하, 하……으하하하.”
소년과 칠구는 서로의 까까머리를 찰싹찰싹 때려주는 장난질을 하며 키들키들 웃었다.
두 소년의 머리는 따사한 봄 햇살을 받아 갯가의 차돌처럼 반짝거렸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가람에 들어온 지 어언 보름이 지났다. 먼 산의 진달래꽃들이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붉은 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에도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새벽 세시.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주위는 아직까지 깜깜한 어둠이었다.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시자(주지스님을 받드는 사람)가 치는 아침 종소리가 울려왔다.
(벌써 아침 예불 시간이 되었구나.)
소년은 머리맡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 밖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ㅡ뎅, 뎅, 뎅,…….
시자가 치는 스물 한 번의 종소리는 가람의 경내를 한 바퀴 돌며 주위에 있는 것들의 잠을 하나 하나 깨우기 시작했다.
옆방에서 군시렁 군시렁 사람의 말소리가 울려왔다. 모두들 잠을 깨어 가사를 수하는(옷을 입는다는 뜻) 모양들이었다.
“얘, 칠구야. 어서 일어나, 응?”
소년은 코를 골고 있는 칠구를 흔들어 깨웠다. 칠구는 늘 하던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꽥 질렀다.
“에이, 썅! 어이구, 이놈의 절을 떠나든가 무슨 수를 내야겠어.”
소년은 칠구를 향해 씽긋 웃어 보이며 슬슬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얘, 칠구야. 만공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래도, 모든 걸 꾹 참고 지내기로 하자, 응?”
칠구는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다가는 이내 입을 삐쭉거렸다.
“뭐, 불도? 야, 영길이 임마! 불도 너무 좋아하다간 사람 바싹바싹 말라 죽는다구, 응.”
“얘, 칠구야. 어서 나가자.”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앞장을 섰다. 마지못해 칠구도 따라 일어섰다.
아침 시간은 언제나 바빴다. 변소를 다녀와 세수를 하고 나면, 본당(대웅전)에서 아침 예불을 드렸다.
오체투지. 이마와 양 팔굽, 양 무릎 등 몸의 다섯 곳을 땅바닥에다 대고 부처님께 절을 했다.
부처님은 언제나 얼굴 한가득 엷은 웃음은 띄고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선 항상 환한 금빛이 쏟아져 내렸다.
(만공 스님의 얼굴에서도 저런 금빛이 쏟아지고 있었어.)
소년은 이렇게 생각하며 부처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부처님은 금방이라도 본당 마룻바닥으로 성큼 내려서서 소년의 두 손을 덤쑥 포근하게 잡아줄 것만 같았다.
소년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칠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얘, 칠구야. 저기서 만공 스님이 우릴 지켜보고 있어, 응?”
“응? 아니, 내가 깜빡 졸았었구나…그래, 그래 알았어.”
칠구는 번쩍 눈을 뜨며 화들짝 놀랐다. 만공 스님이 이쪽을 건너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는 소년으로서는 와락 무섬증이 일었다.
“얘, 칠구야 어서 예불을 올려, 응?”
“응, 응…알았어, 알았다니까!”
칠구는 벌떡벌떡 일어났다 앉으며 부처님께 절을 했다. 금방이라도 만공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 소년은 가슴을 죄며 흘금흘금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만공 스님은 여전히 엷은 웃음만 띄우시며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셨다.
저녁 공양때였다.
ㅡ딱 !
죽비(두개의 대쪽을 맞추어 만든 물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각기 자기 앞에다 네 개의 발우(그릇)를 늘어놓고 앉았다.
소년과 칠구는 맨 끝자리에 앉아서 합장하여 고개 숙인 채 경을 외웠다.
ㅡ딱 !
다음 죽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몸뚱이만한 커다란 물 주전자가 들어와 한 바퀴 삐잉 돌았다.
ㅡ딱 !
식사 시작을 알리는 죽비 소리였다. 모두들 아무 소리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밥을 다 먹은 사람은 받아 두었던 물을 가지고 아시발우(밥그릇)부터 깨끗이 닦아내야 했다. 닦아낸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쭈욱 한숨에 들이켜야 했다.
“에이, 썅!”
칠구는 흘금흘금 옆을 살피며 투덜대었다. 발우를 닦아낸 물을 어떻게 마실 수 있느냐는 눈치였다.
소년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죽비를 든 채 서 있는 젊은 스님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칠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얘, 칠구야. 어서 쭈욱 들이켜버려, 응?”
칠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망설였다.
“에이, 정말 못 마시겠어.”
“칠구야, 지금까진 그 물을 잘 마셔와 놓고 왜 그래, 응?”
“어서 마시래두!”
“에이…그래도 자꾸 속이 메슥거린단 말이야.”
그때였다.
ㅡ딱 ! 따악, 딱 !
죽비가 칠구의 목덜미에 사정없이 내려쳐졌다. 칠구는 윽 하는 짧은 비명을 올리며 어깨를 아래로 움츠렸다. 죽비 소리가 칠구의 어깨 위에서 비 오듯 쏟아졌다.
밤 아홉시.
취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왔다. 모든 방의 불들이 새벽별처럼 하나 둘 꺼져갔다.
소년은 칠구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흠뻑 얼룩져 있었다.
소년은 칠구의 까칠까칠한 손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친구야, 고생이 되더라도 참아내야 하는 거야, 응?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만한 일쯤은 꾹 참고 견디어 내야 하는 거야.)
친구의 따스한 체온이 봄 햇살처럼 아른아른 전해져 왔다.
소년은 머리맡의 문을 살며시 밀어제쳤다. 쏟아질 듯 새파란 별들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소년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눈 안에 별 집어넣기’놀이를 시작했다. 하나, 눈을 감았다. 두울. 눈을 감았다. 세엣, 네엣, 다섯, 여섯….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에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곧이어 시자가 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친구가 어디로 갔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하러 갔을까? 혹시, 도망을…아니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소년은 놀란 가슴으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옆자리의 친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잔뜩 구겨진 이불만이 빼꼼하게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예불 때에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을 뛰쳐 내려간 것이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이 그까짓 죽비 몇 대 맞았다고 도망을 가? 나한텐 한마디 말도 없이 도둑고양이처럼 산을 내려가다니…에잇, 나쁜 놈 자식 !)
소년은 예불을 끝내기가 무섭게 경내를 빠져나와 일주문까지 냅다 뛰어 내려갔다.
친구는 아무데도 없었다. 옅은 새벽의 어둠만이 산자락을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산 윗켠에서 솔바람 소리가 중길처럼 아득하게 흘러 내려왔다.
(이자식이 그까짓 일을 못 참고 빠져 달아나다니.)
소년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 휙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돌멩이는 바윗돌에 맞아 죽비 치는 소리를 냈다.
“친구야아ㅡ, 친구야아ㅡ,”
소년은 두 손을 입에 모두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건너편 산에서도 누군가 소년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친구야아ㅡ, 친구야아ㅡ,”
소년의 목소리와 산울림이 한데 어우러져 산속의 나무들과 바위들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아침 공양이 끝나자 만공 스님이 소년을 불렀다. 만공 스님은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시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영길아, 네 친구가 도망을 갔다고?”
소년은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스님. 자고 일어나 보니 벌써 떠나고 없었습니다.”
“내,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느니라…영길아, 그놈은 인연 따라 여길 뛰쳐나간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자꾸나.”
“......?”
“바깥세상의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는 헛것이니라…영길아, 너도 그놈처럼 딴 생각을 품은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스님.”
만공 스님의 얼굴에선 예의 그 눈부신 금빛 햇살이 자르르 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 햇살 아래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한동안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누구 한사람도 칠구를 찾지 않았다. 칠구도 약속이나 한 듯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절은 그렇게 조용했다.
먼 숲속에서 뻐꾸기가 극성맞게 울었다. 어느새 진달래꽃이 이울며 봄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2. 여름
초여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제법 싱그러운 풀내음까지 섞여 있었다.
소년은 아침 공양을 끝낸 뒤, 부목(나무를 하는 사람)을 따라 가람 뒤쪽의 산을 올랐다.
나무를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그냥 젖빛이었다. 그 젖빛이 흘러내려 온 산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통 보이질 않는구나. 안개 때문에 그런 모양이지)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쓰윽 훑어 나갔다. 그러나, 태양은 어디에 숨었는지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너, 이놈 영길아! 무얼 그리 열심히 찾고 있는 게냐?”
뒤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소년을 불렀다. 만공 스님이었다. 만공 스님이 소년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계셨다.
“행자이옵니다.”
소년은 늘 하던 그대로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떠듬떠듬 말했다.
“영길아, 태양을 찾고 있었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그래, 태양이 있더냐, 없더냐?」
“안개 때문인지 보이질 않습니다.”
“허허, 그래? 태양이 보이질 않는다고? 거, 참 이상한 일이구나.”
갑자기 만공스님이 온산이 떠나갈 듯 크게 웃어제꼈다. 소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넙죽 엎드려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솔바람 소리며 멧새 울음소리, 가람의 목탁소리 등이 순간 딱 끊겨 버렸다.
만공 스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소년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영길아, 내 눈엔 해가 환히 보이는데 내 눈엔 안 보인다니……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네?”
소년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태양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만공스님이 여전히 온 얼굴에 엷은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안 보이느냐?”
“네, 스님.”
소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오히려 만공 스님의 눈이 이상하시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공 스님은 합장한 채 한동안 염불을 외고 나더니 소년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셨다.
“영길아, 네 눈이 너무 어두워진 모양이구나, 응?”
“네?”
소년은 몇 번인가 눈을 꿈적이고 나서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소년의 눈엔 모든 것이 잘 보였다.
무겁게 열매를 맺고 있는 잣나무 숲, 도토리나무들, 푸른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산죽(대나무) 숲 등이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이상하다? 내 눈엔 모든 게 잘 보이는데, 스님께서 내 눈이 어두워졌다고 나무라시다니…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스님을 흘금흘금 쳐다보았다.
“너 이놈! 내가 말하는 눈이란 얼굴의 그 눈을 말하는 게 아니라...마음속에 있는 눈을 말하느니라.”
“네?”
소년은 고개를 들어 만공 스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눈이 부셨다. 만공 스님의 얼굴이 환한 금빛 햇살에 싸여 있었다. 소년은 눈이 부셔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꼭 무엇엔가 홀린 것 같은 멍한 기분이었다.
만공스님이 다시 엷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영길아, 너처럼 마음이 어두운 사람의 눈엔 밝은 태양도 잘 보이지 않느니라…알았느냐?”
“네? 아, 네!”
소년은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다시 만공 스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이 부셨다. 만공 스님의 머리 뒤에서는 햇무리보다 더 밝은 햇살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만공 스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년을 향해 말했다.
「너, 이놈! 바깥세상이 그리운 모양이구나…그러니까 자꾸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거겠지, 응?“
소년은 이마를 땅바닥에다 바싹 가져다 붙이며 마구 변명을 했다.
“네? 아, 아닙니다! 스님.”
“아니긴 뭐가 아냐! 내 눈엔 어두운 네 마음이 환히 비치는데 변명을 늘어놓는구나…도망간 친구란 녀석이 보고 싶은 거지, 응?”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바깥세상의 모든 건 다 헛것이니라…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는 것들뿐이야.”
만공 스님은 한동안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휙 돌아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소년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뽀얗게 산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스르르 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니 언제 해가 나타났지? 이게 꿈인가, 아니면 생시인가?)
소년은 만공 스님의 뒷모습을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만공 스님은 환한 금빛 햇살에 휩싸인 채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큰 스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숨어있던 해가 튀어나온 모양이구나…정말 이상한 일이야.)
소년은 만공 스님의 펄럭이는 가사 자락에서 떨어져 내리는 금빛햇살 조각들을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다니…그럼, 스님의 말씀처럼 정말 내가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소년의 눈에는 만공 스님의 온몸이 해처럼 비춰 왔다. 만공 스님은 가슴 속에다 커다란 해를 간직하고 계시는 모양이었다. 그랬다가 지금에야 그 해를 꺼내어서 저 하늘에다 대롱대롱 달아놓은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그래 맞아! 틀림없이 만공 스님께서 저 해를 달아놓으셨을 거야.)
만공 스님의 뒷모습이 가람의 귀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두 팔을 쭈욱 뻗으며 마구 소리쳤다.
“만공스님께서 해를 달아 놓으셨다. 만공 스님께서 해를 만드셨다.”
소년의 목소리는 잣나무 숲을 빠져나가 계곡을 건너 뛰어 건너편 산으로 번져 나갔다. 저편 산에서도 누군가가 소년의 흉내를 내었다. 산 메아리였다.
불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8월의 무더위가 가사 자락을 헤집고 들어와 온몸을 후끈거리게 했다.
“영길아, 네게 편지가 왔구나.”
만공 스님이 소년에게 편지를 건네주며 빙그레 웃었다.
“네? 제게 편지가 왔다구요? 제게 편지 보낼 사람이 없을텐데….”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떨리는 두 손으로 편지를 받았다.
“누구긴 누구야…이곳을 뛰쳐나간 칠구란 녀석한테서 온 거지.」
“네? 칠구한테서요?”
소년은 사뭇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가람 뒤뜰로 들어섰다.
칠구의 까까머리가 바람처럼 휙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쯤은 머리털이 제법 많이 돋아 까뭇까뭇 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짜아식, 지금쯤 뭣하고 있는지...날 생각이라도 할까?)
소년은 자꾸만 떨려오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뜯었다. 또록또록한 칠구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영길아, 그동안 잘 있었니? 너와 헤어진지도 벌써 다섯 달이 다 됐구나. 네게 아무 말도 없이 산을 뛰쳐 내려와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구나.
영길아, 그렇지만 할 수 없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어. 영길이 너 같으면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나 혼자서만 산을 뛰쳐 내려온 것이다. 영길아, 난 지금 부산 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단다. 하루에 구두 오십 켤레만 닦으면 마음대로 먹고 쓸 수 있단다.
영길아, 혹시 부산에 올 일이 있거든 꼭 한번 들려주었으면 좋겠어,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네 사정이 어떨지 모르겠구나.
영길아, 만공 스님께 칠구가 용서를 빌더라고 전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너의 소식을 기다리며 안녕. 박칠구 씀.
문득 칠구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짜아식, 그동안 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었구나. 밥은 먹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소년은 칠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본당 앞뜰을 지나갔다. 짜릿한 향내음이 소년의 코끝에 와 부딪쳤다. 어느새 칠구의 모습이 물거품처럼 스러졌다.
가람 안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규칙적이었다. 또, 누구 한 사람 정답게 말을 붙이거나 자상하게 보살펴 주지도 않았다. 고아원 생활보다 더 엄격한 하루 하루였다.
아침 공양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심 공양 준비를 해야만 했다. 채공(반찬 만드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물을 길어 나르고 나물을 다듬고 나면, 다시 화공을 따라 나무를 하러 산위에 올랐다.
부목이 산 윗 켠으로 올라간 틈을 타 소년은 잠시 풀밭에 몸을 뉘었다.
ㅡ 영길아,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한번 만났으면 좋겠구나.
칠구의 목소리가 귓속에 크게 울렸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만공 스님께서 세상의 모든 건 물거품처럼 스러지는 헛것이라 했어.)
소년은 벌떡 일어나 앉아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칠구의 목소리는 파리 떼처럼 마구 귓가에 엉겨 붙었다.
ㅡ영길아, 부산에 올 일이 있거든 꼭 한 번 들려주었으면 좋겠어.
다시 칠구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소년을 꾀었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합창한 채 마구 경을 외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아무리 경을 외워도 칠구의 목소리는 소년의 귓속에서 떠나지 않은 채 바글바글 끓었다.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잣나무를 쥐어흔들며 마구 외쳤다.
“안 돼, 안된단 말이야! 난, 난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가 돼야 한단 말이야.”
방울 속에 들어있던 잣 열매가 소낙비처럼 후둑후둑 떨어졌다.
“너, 이놈! 또, 칠구란 그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만공 스님이었다. 만공 스님이 떡 버티고 서서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행자이옵니다, 스님,”
소년은 땅바닥에 넙죽 엎으려 이마를 마구 비벼댔다. 풀잎의 이슬이 소년의 이마를 차갑게 적셔 주었다.
“영길아, 저 아래 주차장에 내려가 향 한 갑 사오너라.”
만공 스님이 소년에게 돈을 건네주며 엷게 웃었다.
소년은 돈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산 아래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뒤에서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다시 크게 울리며 따라왔다.
“바깥세상을 그리워해선 안 되느니라…그러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느니라.”
소년은 마구 내달렸다. 일주문이 소년의 뒤쪽으로 성큼성큼 물러앉았다. 솔숲이며 잣나무 숲, 도토리나무들이 휙휙 뒤로 내뺐다.
주차장엔 버스가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마치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붕붕거리고 있었다.
(그래, 맞아! 칠구란 놈을 꼭 한번 만나봐야 해.)
소년은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버스를 향해 나아갔다.
철거덕.
소년이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문이 닫혔다. 소년의 가슴 속에서도 무엇인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만공 스님, 용서해 주십시오. 칠구를 한번 만난 뒤 꼭 돌아오겠습니다.)
소년은 만공 스님께 용서를 빌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지랑이가 호물호물 피어올랐다. 아지랑이 뒤쪽의 가야산이 물결처럼 하르르 하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소년을 붙잡지 않았다. 누구 하나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년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행인들의 따가운 눈길을 온몸에 받으며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칠구가 있을까, 없을까? 없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아냐! 분명히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을 거야.)
부산 극장 가까이 왔을 무렵이었다. 가슴 속이 쿵쿵 울렸다. 마른침이 마구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칠구가 꼭 있어야 할 텐데…)
칠구가 있는 쪽을 향해 눈길을 주기가 무서워졌다. 소년은 그만 홱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아냐! 칠구는 꼭 있을 거야.)
다시 돌아서서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몇 아이들이 등을 돌린 채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칠구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얘, 여기 칠구라는 아이 없어?”
소년 또래의 구두닦이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구두닦이 소년은 옆자리의 친구들을 한번 둘러 본 뒤 소년을 쓰윽 훑어보았다.
“칠구? 아, 그 까까머리 자식…그 자식은 어제 들어갔어.”
“어디? 고아원?”
소년은 재우쳐 물었다. 구두닦이 소년은 코를 한번 훌쩍인 다음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아원? 고아원 좋아 하시네…경찰서에 붙잡혀 갔어. 남의 지갑을 털다 들켰단 말이야.”
“뭐, 경찰서엘 들어가?”
소년은 한동안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하늘이 핑글핑글 돌았다. 거리의 모든 것들이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경찰서인데, 응?”
소년은 구두닦이 소년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며 물었다. 구두닦이 소년은 어깨 위의 팔을 홱 뿌리치며 쏘아 붙였다.
“어느 경찰서인지 내가 알게 뭐야…중놈의 새끼가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에이, 재수 없어…퉤, 퉤, 퉤!”
구두닦이 소년은 땅바닥에 침을 찍찍 내갈기며 투덜대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두 다리가 파들파들 떨려 한 걸음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뒤에서 소년들이 키들키들 웃었다. 귓속이 멍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들도 소년을 손가락질 하며 놀려대는 것만 같았다.
ㅡ저놈이 산에서 몰래 도망쳐왔구나. 하, 하, 하. 그런데 염불은 않고 뭐 하러 내려왔지?
소년은 송도 해수욕장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후끈거리는 모래밭처럼 소년의 얼굴도 화끈 달아올라 있었다.
달빛이 유난히 고왔다. 별빛도 밤바다에 하얀 수를 놓고 있었다. 밤바다는 한낮의 더위를 식히느라 숨을 씩씩 몰아쉬며 출렁거렸다.
(이자식이 하필이면 도둑질을 하다 붙잡혀 들어가…절 만나러 내가 이렇게 산을 뛰쳐내려온 것도 모르고 말이야.)
소년은 모래밭에 벌렁 들어 누워버렸다. 찰랑대는 밤물결 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들려오고 있었다.
(짜아식이 빨리 풀려 나와야 할텐데…혹시, 소년원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소년은 이리저리 몸을 뒤채었다. 칠구의 얼굴이 등불처럼 깜빡거리며 다가왔다.
(에이, 눈 안에 별 집어넣기나 하자.)
유난스레 큰 별을 찾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별 하나가 눈 안을 환하게 밝히며 대롱거렸다. 두울, 세엣, 다섯, 여섯, ………………
소년은 깊은 꿈길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별무리들이 환한 빛살을 뿌리며 내달렸다.
ㅡ영길아, 어서 따라오너라.
갑자기 어디에선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귀에 익은 소리였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 별무리의 뒤를 쫓았다. 별무리는 산 윗켠으로 올라가 눈부신 불기둥을 이루며 치솟았다. 별무리 저쪽에선 우람한 절 한 채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ㅡ영길아, 네가 머물 곳은 이 곳이니라…뒤를 돌아보아선 안 되느니라.
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소년은 넋을 잃고 불기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모래밭을 거닐었다.
(그래, 만공 스님께로 다시 돌아가 용서를 빌기로 하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호, 야호!”
소년은 소리를 지르며 모래밭을 마구 내달렸다. 반짝이는 은물결 바다도 소년과 함께 내달렸다.
지나치는 해수욕객 몇 사람들이 소년을 보고 킥킥거렸다.
점심나절에야 해인사 가람에 도착했다. 스님들 누구하나 소년을 보고 꾸짖지 않았고 반겨하는 이도 없었다.
만공 스님은 소년을 향해 엷은 웃음을 보낼 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실 뿐이었다.
“세상 모든 게 다 헛것이니라……물거품과 같은 거야.”
이 한마디 말씀뿐이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가람에 새 손님이 두 사람 들어왔다. 영이라는, 소년 또래의 소녀와 보살인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했다. 몸이 약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 년 동안 쉬고 있다고 했다. 부처님께 지성으로 빌면 건강이 좋아질 거라 믿어 이 가람에 들어왔다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새 기승을 부리던 여름도 개울물에 씻겨 내려가 버렸다. 하늘도 멀찍이 물러앉고 있었다.
3. 가을
아침저녁으로 제법 상큼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뜰 앞의 사르비아가 온 경내를 활활 불사르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자 가람은 제법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장 준비도 해야 하고, 땔감도 충분히 장만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은 아침 공양을 끝내자 나무를 하기 위해 산 위에 올랐다. 땅위에 얽히고 설킨 덤불이며 마른 나뭇가지를 부지런히 긁어모았다.
“얘, 나무를 하고 있었구나?”
누군가가 뒤에서 소년을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소년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응? 누구야?”
“얘는...꼭, 귀신에 홀린 사람 같구나. 나야, 나!”
영이가 소년을 올려다보며 해죽해죽 웃고 있었다. 영이의 분홍빛 뺨의 보조개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얘, 난 내일 모레면 부산으로 떠날 거야...그동안 참 즐거웠어.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되다니 정말 섭섭하구나.”
영이가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물기가 촉촉이 밴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의 일이 별똥처럼 획획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다람쥐를 쫓던 일,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휘청휘청 흔들어대던 일, 단풍잎을 주워 모아 꽃목걸이를 만들어 영이의 목에 걸어주던 일 등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정말, 그동안 참 고마웠어...부산에 닿는 대로 내 곧 편지할게.”
영이가 소년의 손목을 포근하게 감싸 쥐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애써 슬픔을 참으며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갑자기 저 아래 켠에서 보살(여자 불교 신도를 말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이야, 바깥바람이 몹시 차구나...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영이의 어머니였다. 소년은 보살 쪽을 향한 채 합창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영이와 보살은 산죽 숲을 돌아서 가람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보살과 영이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산죽 숲만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영이가 이곳을 떠나는구나...이젠 나 혼자 뿐이구나...이번 기회에 아주 영이를 따라 가 버릴까? 언제든지 부산에 오면, 자기 아버지 회사에 취직시켜 준다고 했잖아.)
소년의 눈앞엔 갑자기 도시의 화려한 모습이 떠올랐다. 몸뚱이를 햇볕에 반들반들 반짝이며 내달리는 자동차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우뚝 치솟은 빌딩들, 입에 군침이 도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무지개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 영이에게 꼭 해둘 말이 있어.)
소년은 영이가 내려간 쪽을 향해 냅다 달렸다. 영이를 만나 꼭 무슨 말인가 해두고 싶었다.
-너, 이놈! 또,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뒤쪽에서 갑자기 만공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온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소년은 멈칫 그 자리에 서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멧새 몇 마리만이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지절대고 있을 뿐이었다.
(만공 스님! 난, 영이를 꼭 따라가야만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소년은 다시 돌아서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내달렸다. 댓 이파리들이 소년의 가사 자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 딱, 따악, 딱!
갑자기 뒤에서 죽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흠칫 그 자리에 우뚝 서며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은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두 발이 땅바닥에 철썩 달라붙어 마음 먹은 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만공 스님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뒤켠에서 들려왔다.
- 영길아, 모든 게 다 헛것이란다. 네 마음을 어둡게 하는 허깨비야.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소년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소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마구 머리를 내저으며 언덕바지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영이의 모습이 모기떼처럼 왕왕 거리며 소년의 눈 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년은 머리를 탈탈 흔들며 엉엉 울었다.
이틀 후, 영이와 보살인 그녀의 어머니는 가람을 떠났다. 소년은 일주문의 기둥 뒤에 숨어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 얘, 부산에 닿는 대로 꼭 편지할게...그리고, 이 생활이 싫증나거든 언제든지 내려와. 우리 아빠회사에 취직시켜 줄 테니까, 응?
영이의 마지막 말이 문득 떠올랐다. 멧새의 지저귐 소리보다도 더 맑고 고운 영이의 목소리가 소년의 귓속에서 마구 울려왔다. 소년은 돌멩이 하나를 냉큼 집어 들어 아래쪽을 향해 휙 내던졌다.
- 따악!
돌멩이는 한참 단풍으로 물든 나뭇가지에 닿아 죽비 치는 소리를 냈다. 며칠이 지나도 영이의 편지는 날아들지 않았다. 소년은 나무를 하다 말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가을 하늘에 영이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이상한 일이야? 떠난 지가 스무날이 넘었는데도 편지가 없다니...? 몸이 아직 덜 나은 걸까? 아니야, 아냐! 혹시, 날 잊어버린 건 아닐까? 여기서 보다는 더 좋은 일이 많아 나 같은 놈은 잊어버린 걸 거야...괘씸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씨근거렸다. 들고 있던 낫을 홱 내던지고 저 아래 일주문 쪽은 향해 내달려 내려갔다.
- 영길이, 너 이놈! 또, 헛것에 미쳐 부처님 곁을 떠나려 하는구나.
뒤에서 만공 스님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언뜻 들여왔다. 홱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우뚝 선 일주문만이 가을 햇살 속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가람 쪽을 향해 절을 하며 외쳤다.
“만공 스님. 난, 꼭 영이를 만나봐야 합니다. 이곳을 뛰쳐 내려가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영길아, 모든 게 다 헛것이래도 헛것!”
“아닙니다, 만공스님. 직접 만나보고 제 눈으로 헛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번에는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불쑥 되돌아 왔다.
“그것들이 헛것일 때는?”
“다시 부처님과 만공 스님의 곁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래? 그러면 좋다. 어서 이곳을 떠나가거라.”
만공 스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흔들어 주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만공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소년을 붙잡지 않았다. 만공스님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도, 죽비 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입술을 앙다물며 마구 내달렸다.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단숨에 산을 달려 내려와 버스를 타버렸다. 차창을 스쳐가는 도시의 풍경들이 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해주었다. 소녀의 얼굴이 차창 밖으로 비누방울처럼 둥둥 떠다녔다. 버스를 내렸다. 소년은 영이가 떠날 때 건네준 종이쪽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우람한 저택들이 쭈욱 들어선 골목길을 더듬더듬 걸어 나갔다.
산그늘이 깔리고 있었다. 그 산 그늘 속에서 엷은 땅거미가 슬슬 기어 내려와 동네를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느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소년또래의 계집아이가 문을 열고 나와서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합장해 보이고는 대뜸 물었다.
“이 집이 김영욱 씨 댁입니까?”
“아녀요! 우리 아빠 이름은 박정근이라고 해요.”
계집아이가 소년을 쓰윽 훑어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네? 그럼, 이 집에 혹시 김영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없다니까 그러네! 제 이름은 박정숙이라고 해요... 혹시, 그 전에 이집에 살던 아이를 찾는 모양이군요.”
소년은 깜짝 놀랐다. 머리 속으로 무엇인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연신 침을 꿀꺽 삼키며 바싹 다가서서 물었다.
“아니, 그럼 그 영이라는 아이가 이사를 갔단 말입니까?”
“네, 일주일 전에 온 가족이 시골로 내려갔대요....아니, 빚쟁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도망을 갔다나 봐요.”
소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꼭 무슨 귀신에 흘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소년은 다시 소녀 쪽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아니, 왜 도망을 갔습니까?”
“그 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나 봐요...그래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자 이집을 팔아버리고 도망을 간 거겠죠.”
온몸의 힘이 죄다 발끝을 통해 술술 빠져 나가고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실례 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합창하고 나서 물러나와 버렸다. 소녀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집안으로 쫄랑쫄랑 들어가 버렸다. 곧 이어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쇠문이 닫혀 버렸다.
(아, 그래서 여태 편지를 하지 않았구나...그런데, 그렇게 쉽게 사업에 실패하다니...사람의 일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손등을 꼬집어보았다. 맵쌀한 아픔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젠, 영이의 편지가 없으면 영영 만나볼 수가 없겠구나.)
소년은 동네 뒤의 언덕바지 위로 올라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 그것봐라, 영길아! 넌, 지금 헛것에 흘려있는 거야...세상 모든 건 금방 스러지는 물거품과 같은 거야.
갑자기 만공 스님의 꾸짖는 목소리가 귓속에 크게 울려왔다. 죽비 치는 소리도 한데 어울려 쿵쿵 울려왔다.
소년은 한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녜요, 아니란 말이에요! 전 헛것을 본 게 아니에요.)
뱃속이 쓰리고 아파 왔다. 문득 두 끼를 굶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선 잠을 자 버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파르스름한 별빛이 눈발처럼 마구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았다. 눈 안에 별 하나가 들어와 빛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다. 또 다른 별 하나를 눈 안에 접어 넣었다. 눈 안이 점점 별빛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예의 그 별무리가 또다시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 전과는 달리 아주 힘이 없어 보였다.
- 영길아, 어서 따라 오너라.
별무리 저편 만공 스님의 목소리도 전에 없는 아주 맥없는 울림이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아주 힘이 없어 보였다.
소년은 넋을 잃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붙어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별무리는 산위로 올라갔다. 별무리는 한데 얼려 불기둥을 이루며 하늘 끝까지 솟구쳐 타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불기둥이 까만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 버렸다.
- 영길아, 모든 게 물거품과 같이 금방 스러지는 헛것이야, 헛것! 어서 부처님 곁으로 돌아오너라.
까만 잿더미 저편에서 다시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아주 힘없는 울림이었다.
(혹시, 만공 스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전에 없는 힘없는 목소리로 보아,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에 틀림없어,)
까악, 까악, 까악.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기분 나쁘게 울어대고 있었다.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꿈이었다. 늦가을 여린 아침 햇살이 하느작 하느작 풀밭에 내리고 있었다.
(어서 가람으로 돌아가자, 만공 스님께 무슨 일이 안 생겼어야 할 텐데...)
소년은 부리나케 언덕바지를 내려와 잰 걸음을 놀렸다. 발걸음보다 더 빠르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점심 공양이 끝날 무렵에야 가람에 도착했다. 늦가을 햇살을 한가슴 가득 안고 가야산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지나치는 스님들이 흘금흘금 소년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아무도 소년에게 말을 붙이거나 반겨하는 기색이 없었다.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만공 스님도 조용한 목소리로 소년을 맞아 주었다.
“그래, 영길아. 영이라는 아이를 만나 보았느냐?”
4. 겨울
만공 스님은 불호령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저 얼굴 가득히 엷은 웃음만 띄우시고 소년을 바라 보셨다.
소년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영이라는 아이들 만나봤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만공 스님이 재우쳐 물었다. 소년은 이마를 땅바닥에 바싹 가져다 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옵니다.”
“그것 봐라, 영길아. 세상 모든 건 물거품과 같은 거야…오직 영원한 건 부처님의 마음뿐이야.」
“......”
만공 스님께서 경을 읽다 말고 고개를 홱 돌리시며 소년을 쏘아 보았다.
“영길이, 너 이놈! 이 가람엔 또 뭐 하러 돌아왔느냐?”
소년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어깨를 내려칠 것만 같았다.
“돌아 왔습니다, 스님! 이제 다시는 이 가람을 떠나지 않겠사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소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만공 스님은 갑자기 방문을 안으로 닫아걸며 호통을 쳤다.
“너 이놈! 어서 이 가람을 떠나거라…너처럼 헛것에 미쳐있는 놈은 부처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느니라.”
소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마구 울먹이는 소리로 애원했다.
“스님! 다시는 이 가람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만공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경을 읽는 소리만이 조용한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앉았다. 만공 스님께서 용서를 해주시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벌써 산그늘이 깔리고 있었다. 그 산그늘 속에서 어둠이 기어나와 솔바람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밤 아홉시.
취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경내를 돌아 다녔다. 방마다 켜져 있던 불이 하나 둘 꺼져갔다.
“지금쯤 만공 스님의 노여움이 풀리셨을 텐데... 아무런 기척이 없구나.)
만공 스님의 방안도 불이 꺼졌다. 소년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별들이 늦가을 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눈 안에 별 집어넣기나 해보자.)
소년은 별 하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 별이 눈 안에 들어와 있었다.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여섯…….
뱃속이 쓰리고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몇 끼를 굶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머릿속이 텅 비어져 갔다.
- 뎅, 뎅, 뎅.
기상을 알리는 새벽 종소리가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종소리에 소년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스님!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 가람을 떠나지 않고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네, 스님!”
소년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스님을 부르며 쓰러졌다. 하늘의 별들도 소년과 함께 와르르 쏟아졌다.
어디선가 문 열리는 소리가 아슴하게 들려왔다. 이어 수근대는 말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게 들려왔다.
“아니, 저건 영길이란 놈 아니냐?”
“배고파 쓰러진 모양이군…만공 스님! 이놈을 어떻게 할까요?”
“어서 제 방에 데려다 옮겨 주어라.”
소년은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봄바람보다 더 따스하게 가슴 속으로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정말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거죠, 네?)
이마가 섬뜩했다. 소년은 펀뜻 눈을 떴다. 어느새 소년은 방안으로 옮겨져 있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길?)
소년은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마에다 손을 갖다 대었다. 이마가 펄펄 끓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아, 내가 부처님의 벌을 받고 있구나...만공 스님! 다시는 이곳을 뛰쳐나가지 않겠습니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 마구 절을 했다. 머릿속에 언뜻 언뜻 떠오르는 경을 마구 외우며 절을 했다.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기울도록 방문을 열어주는 이도 없었다. 소년은 그렇게 꼬박 하루를 앓았다.
- 뎅, 뎅, 뎅.
다시 아침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니 벌써 하루가 지났나?)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몸 안엔 바람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서 아침 예불을 드려야겠구나.)
소년은 본당 쪽을 향해 내달렸다. 부처님께 합장한 뒤 세 번 절을 했다.
만공 스님이 예불을 드리다 말고 소년 쪽을 향해 소리 없이 웃었다.
(아, 만공 스님께서 웃으시는구나…이제야 날 용서해 주시나 보구나…스님! 이제부턴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소년은 뛸 듯이 기뻤다. 경을 읽으시면서 백 여덟 번 절을 했다. 금방이라도 부처님께서 성큼 내려와 소년의 손목을 따스하게 잡아주실 것만 같았다.
“영길아, 거기 앉거라.”
아침 공양이 끝나자 만공 스님이 방안으로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넙죽 엎드려 만공 스님의 분부를 기다렸다.
“영길아, 이제 좀 깨달았느냐?”
만공 스님이 조용히 물으셨다.
소년은 고개가 들릴까 겁을 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스님! 다시는 이 가람을 뛰쳐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오늘부터 내 제자가 돼도 괜찮겠구나?”
“네? 스님, 그러면 절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소년은 다시 한 번 뛸 듯이 기뻤다. 누군가라도 붙잡고 엉엉 소리쳐 울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영길아, 바깥세상의 모든 걸 그리워해서는 안되느니라…그리고, 모든 일에 화를 내서도 안 되고 어리석어도 안 되느니라…앞으로 이 세 가질 명심하고 어기는 일이 있어선 안 되느니라…알았느냐?”
“네,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소년은 마구 고개를 조아렸다. 만공 스님의 말씀이 초롱초롱한 별빛처럼 가슴에 속속 들어와 박혔다.
소년은 만공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만공 스님 곁에서 모든 시중을 들어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혔다.
눈 안에 항상 자리 잡고 있던 칠구의 뾰루퉁한 얼굴이나 벌떼처럼 붕붕거리던 영이의 얼굴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겨울이 왔다.
매서운 칼바람이 도토리나무 가지 끝에서 윙윙 울었다.
- 뎅, 뎅, 뎅.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온 경내에 울려 퍼졌다. 종소리는 소년의 단잠을 스르르 걷어가 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펀뜻 눈을 떴다. 만공 스님께선 벌써 자리를 뜨고 없었다.
소년은 방문을 열었다. 희끗희끗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온 산이 하얗게 물든 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딱, 따악, 딱!
죽비 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거운 눈발에 짓눌려 산죽 숲의 대나무들 허리가 터지는 소리였다.
(대밭의 눈을 털어야겠구나.)
소년은 우의를 뒤집어쓰고 산죽 숲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벌써 많은 젊은 스님들이 몰려와 솔가지를 꺾어들고 산죽 숲의 눈발을 털어내고 있었다.
“아침 예불 시간이 늦겠구나…빨리 빨리 털어내고 들어가자꾸나.”
혜광 스님이 젊은 스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소년도 그 틈에 끼어 솔가지로 눈발을 털었다.
눈발이 마구 흩날려 얼굴에 튀었다. 이마가 시원시원했다. 아직까지 눈두덩에 붙어있던 잠들이 푸슬푸슬 떨어졌다.
“영길아. 넌, 들어가거라…들어가서 만공 스님의 시중이나 들어라.”
헤광 스님이 소년의 손을 잡으며 귓속말을 했다.
“네, 스님!”
소년은 부리나케 본당으로 달려갔다. 만공 스님께선 본당에도 없었다.
(아니, 스님께서 어딜 가셨을까?)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었다. 만공 스님께서 멍하니 누워 계셨다. 소년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
만공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와락 무섬증이 일어났다. 소년은 덥썩 만공 스님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아주 여리고 천천히 맥박이 뛰었다.
(혹시, 스님께서......?)
소년은 만공 스님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눈까풀이 파르르 떨며 입술이 달싹달싹 움직였다.
“스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데가 있습니까?”
소년은 만공 스님의 입술 가까이 바싹 귀를 가져다 붙였다. 만공 스님께선 모기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씀하셨다.
“영길아…어, 어서 주지 스, 스님을 모, 모셔 오너라.”
“네, 스님!”
소년은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주지 스님의 처소로 뛰어갔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며 소년의 앞길을 막았다.
“스님, 주지 스님! 큰일 났습니다…만공 스님께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주지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달려왔다. 만공 스님을 중심으로 삥 둘러앉아 합창한 채 경을 외웠다.
얼마 후에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만공 스님께서는 맥없이 눈을 깜작이며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 몸을 화장하지 마시오…그냥 산에다 버려 모든 초목들의 거름이 되게 해주시오…영, 영길아…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 스님!”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소년의 두 눈에선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만공 스님은 소년의 손목을 꼬옥 움켜잡으며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영길아, 나 먼저 부처님 곁으로 돌아간다…딴 생각 품지 말고 열심히 도를 닦아,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알겠느냐?」
“네, 스님! 흐, 흐, 흐, 흑.”
소년은 떨리는 손을 만공 스님의 얼굴에 마구 문지르며 울었다. 갑자기 만공 스님의 손이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만공 스님께서 입적하셨다.”
주지 스님이 어둡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합장했다. 모든 스님들도 함께 합장하며 경을 외었다.
소년은 만공 스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다.
이튿날 아침.
만공 스님의 시체는 계곡에 버려졌다. 모든 초목들의 거름이 될 수 있도록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소년은 저녁 공양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곡을 타고 올랐다. 만공 스님의 시체는 함박눈에 하얗게 범벅이 되어 나무토막처럼 뒹굴고 있었다.
소년은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만공 스님의 시체를 지키고 앉았다.
- 영길아, 세상 만물은 모두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이루어졌느니라…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느니라.
만공 스님의 따스한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소년의 손목을 덤쑥 잡아줄 것만 같았다.
-까악, 까악, 깍, 깍!
눈발 저쪽에서 까마귀들 몇 마리가 기분 나쁘게 울었다.
(이놈의 까마귀들!)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솔가지를 꺾어 들었다. 까마귀들이 몰려오면 마구 후려칠 생각이었다.
(만공 스님! 저도 부처님 곁으로 데려가 주시옵소서.)
소년은 만공 스님의 손목을 마구 얼굴에 부벼댔다. 따스한 사랑이 봄 햇살처럼 나른하게 번져왔다.
(아, 잠이 오는구나.)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얼굴에 부딪쳐 오는 눈발들이 잠을 재촉했다. 두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 까악, 까악, 깍, 깍!
까마귀 소리에 놀라 소년은 펀뜻 눈을 떴다. 까마귀들 서너 마리가 만공 스님의 가슴에 올라앉아 날카로운 부리로 살을 쪼아대고 있었다.
“이놈의 까마귀들이!”
소년은 옆에 있던 솔가지를 휙 집어들어 까마귀들을 후려쳤다. 까마귀들은 까악, 까악 요란하게 짖어대며 눈발 저 너머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 영길아, 가만 내버려 두어라…어차피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데, 저것들에게도 내 살점을 바쳐 조그마한 은혜라도 베풀고 싶구나.
만공 스님의 목소리가 귓속에 크게 울려왔다. 소년은 솔가지를 마구 후려치며 외쳤다.
“아닙니다, 스님! 스님 몸엔 그 어느 누구도 손을 못 댑니다.”
- 까악, 까악, 깍, 깍!
또다시 까마귀들이 몰려왔다. 이번엔 몇십 마리인지도 몰랐다. 그저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니, 이놈의 까마귀들이!”
소년은 두 눈을 활짝 뜨고 몰려드는 까마귀들을 향해 마구 후려쳤다.
까마귀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만공 스님의 온몸에 오글오글 달라붙어 마구 쪼아댔다.
“아니, 이것들이!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소년은 마구 팔을 내둘러 까마귀들을 쫒았다. 까마귀들은 잠시 하늘로 솟아올라 휘적이다가 눈발 속에 숨어 버렸다.
(아니, 만공 스님의 몸이…?)
소년을 털썩 주저앉아 만공 스님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살점들이 여기저기 뚝뚝 떨어져 흩어져 있었다.
“스님, 스님! 으흐흐흐, 흑.”
소년은 마구 울부짖으며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만공 스님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 뎅, 뎅, 뎅.
저 아래 가람 쪽에서, 아침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눈발을 뚫고 아슴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 사람이 죽으면 모두 저렇게 되는구나. 그래, 정말 그렇구나! 만공 스님의 말씀처럼 세상 만물은 모두 헛것이구나, 헛것!)
소년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만공 스님의 시체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영길아, 어서 내 가까이 오너라.
갑자기 어디선가 우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공 스님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눈발 저쪽 하늘 끝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누가 날 부르고 있을까?)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눈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눈발을 헤치고 환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영길아, 어서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 환한 햇살 속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울려왔다.
소년은 목소리가 울려오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햇살에 마구 눈이 부셨다. 눈부신 햇살은 소년에게 마구 잠을 퍼부었다.
소년은 눈 안에 별을 집어넣고 있었다. 큰 별을 하나 눈 안에 집어넣었다. 별은 눈 안으로 들어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여섯……….
소년은 깊은 꿈길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온몸이 햇살에 싸인 것처럼 포근했다. 누군가가 소년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눈발은 이미 걷혀있었다. 눈발이 걷힌 마알간 하늘에서 여린 햇살이 하느작 하느작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저것 좀 보아라.”
소년을 찾아 나섰던 젊은 스님 한사람이 옆 스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말했다.
만공 스님의 시체 곁에 소년이 꼿꼿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온몸이 꽁꽁 언 채 죽어 있었다.
“저 얼굴 좀 보게나.”
그들은 소년이 앉아있는 쪽으로 바싹 다가서며 이리저리 살폈다.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앉아 있었다. 얼굴에서는 금빛 찬란한 햇살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부처님의 얼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런 금빛 햇살이었다.
“만공 스님과 함께 부처님의 곁으로 간 모양이군.”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두 사람은 소년 앞에 합장한 채 경을 읽었다.
소년의 얼굴에서 번져 나온 금빛 햇살은 온 산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동문예』, 197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