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으로부터 지난 2006년 12월에 이광호 목사님의 에세이 산상수훈에 대한 질의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칭의론적 구원관과 성화론적 구원관에 대한 이견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한 바 있습니다.
본 게시판에 올려진 '분별'님의 성향과 비슷하여서 당시 답신한 내용을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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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영찬입니다.
복된 주님의 은혜가 형제님께 교회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미처 답변을 드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미뤄오게 된 것을 먼저 사과드립니다.
사실은 뭐라고 답변을 드려야 할지 잘 몰라서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제 자신이 아직 칭의론적 구원관과 성화론적 구원관에 대해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순서상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칭의와 성화를 과연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서정은 신학적인 사고를 위한 논리적 순서를 따를 뿐이지 소명과 칭의와 성화를 결코 구별지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형제님의 질문에 대해 꼭 집어서 답변하지 못하는 것도 이 점 때문입니다. 구원론의 핵심은 성령께서 일하심에 초점을 모으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많은 사고의 영역에서 성령께서 일하심에 대한 명확한 이해보다는 상당히 개연적인,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적인 경험에 근거한 가정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신론, 기독론, 구원론에 대한 논의는 사실 많은 영역에서 개인차가 너무 심하다는 점에서 항상 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좀더 심각하게 말씀드린다면 신론, 기독론, 구원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대부분 누구에게 배웠는가에 따라 각각의 이해 정도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신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답변을 드리는 것에 많은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너무 변명이 많아서 송구합니다. 사실 신론, 기독론, 구원론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이해를 많이 하고 있는 조직신학자들조차도 뉘앙스가 다른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안타까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좀더 성경신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적 신론, 기독론, 구원론은 신학에 대한 지식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교회론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고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목회하고 설교하고 성도들을 가르치는가를 보게 되면 과연 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신학적 지식이 정당한 지 의심을 가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신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한 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교회관을 더 분명하게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론, 기독론, 구원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며 신학적 식견이 높다 할지라도 그들이 속한 교회가 과연 개혁교회인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개혁교회의 전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정치 모범, 예배모범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를 통해서도 충분히 밝혀진 바 있습니다. 또 하나 감사한 것은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김홍전 목사님의 가르침이 다양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개혁교회적인 삶의 정형에 대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칭의와 성화에 대한 신학적 구별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명, 칭의, 성화에 대한 나름대로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답변이 지루하고 현실적이지 않아서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형제님께서 이광호 목사님의 성경해석에 대해 구원론에 있어 특히 세부적인 성화론에 있어 저의 생각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궁금히 여긴신다 하셨는데, 그 점에 있어 제가 꼭 집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이 에세이 산상수훈에서 관심을 가지는 내용 역시 칭의와 성화를 그다지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제님께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란 말을 칭의론에만 국한시키고 그의 영으로 말미암는 성화론적인 적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론적인 삶을 윤리로 밖에 볼 수 없는 듯합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목사님은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 교회의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글을 써나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제님께서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 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칭의론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성경을 오해해서 율법주의에 빠져서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는데 너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의 앞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를 통해 구원얻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는 칭의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당연히 성화도 포함되어야 하며 소명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어느 쪽에 좀더 강조를 두는가 하는 정도 차이로 여겨집니다. 또한 헤르만 리델보스나 캠벨 몰간 같은 학자들의 성령 안에서 삶은 당연히 '기독교 윤리'에 근거해야 하고 그것은 성화라고 하는 신학적 용어로 단정하기보다는 교회의 삶, 즉 '교회의 거룩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독교 윤리는 교회관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거룩한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실 개혁주의 성화론적인 삶의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말하느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교회로 생각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은 칭의나 성화에 대한 식견이 아니라 과연 "어떤 교회를 이루고 있는가?"로 이야기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엇이 교회인가?" 하는 교회관에 대한 논의가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알아야 그 안에서 소명, 칭의, 성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알지 못하고 조직신학적 논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현상은 부끄럽지만 한국교회가 초창기 형성될 때부터 개혁교회의 지체로서 세워지지 못했고, 지난 120년 동안 개혁교회의 실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집필자가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주제를 중심으로, 다시 말하면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저술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때로는 어떤 면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을 강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문제들은 이광호 목사님이 다른 책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는가를 보신다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세이 산상수훈은 저자가 산상수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허락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설령 성경을 눈 여겨 읽는다 해도 결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즉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 혹은 경험을 도구로 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인간들에게 지적인 만족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경청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들음은 자의적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가 소유해야 할 찬송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교회의 상황을 살피고자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광호 목사님의 해석이 칭의론적 해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칭의론적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성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칭의가 앞선다면 당연히 성화도 뒤따라 나와야 하기 때문이며 이 둘은 결코 분리되어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답변이 형제님의 의견과 달리하고 순전히 이광호 목사님을 편드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광호 목사님의 성경해석에 대해 매우 자상하고 앞뒤를 너무도 세밀하게 관찰하는 분으로 이 점에 있어 항상 부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그런 아량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제가 쓰고자 하는 주제만을 따라 열심히 앞으로만 나가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면서 설명하시는 이광호 목사님의 성격 때문에 어느 한 편만을 보면 그 내용이 너무 강조되는 것 같지만 전체를 아울러 보게 되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님의 질문에 속시원한 답을 드리기보다는 장황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 놓았습니다.
교회의 한 형제로 삼아주시고 그 안에서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작은 힘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은혜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형제님의 열심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많은 유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06년 12월 22일
송영찬 올림
첫댓글 편집인님의 수고에 대해 감사드리고 이 일에 대해 질문자 등의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적절한 답장이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