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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陽 南氏 上系圖
시조 南敏........君甫-公若-備-星老-有孫-輝珠-敏生 約生
敏生- 富良-元貴-敬身 (와룡면 일원) 亨貴-敬仁 貞貴-敬彛-軾-藎臣-致利 女 裵三益-龍吉 遂良-伯庚 義良-致英-八凱-處昆-健-應元-興達 (일직면 일원) 隆達-磼-天漢 (풍산 신촌) 天澤 연-守元-太別 (일직면 일원) 女 李中立 八俊-薰-舜孝-女 鄭士誠 女 李福老-수경 女 柳公權-景深-成龜 致晶-恒年-瑞龜-好仁-復圭 (일직면 일원) 昌年-瑞龍-好問-煌-士㙉 女 李弘祚 佑良-致恭-義元-漢 溟-龜壽-女 金欽 (봉화 일원) 致儉-中淸-琚-世佑-灝-盡忠 (의성 윤곡) 普良-致剛 女 黃裁 女 裵楠 約生-女 李擔-暿-女 李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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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영양 남씨의 대부분은 셋째 남의량의 후예들이다. 남의량의 손자 남팔개․남팔준 형제가 일직면 안망실로 이거 정착한 후 또 다른 손자 남창년 형제들도 송리리 광연리 일대에 집성 세거함으로써 영양 남씨는 일직면 일대의 제일 거족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남팔개의 증손자 南應元(1539-1611)은 양친이 별세하자 6년 동안 시묘살이로 효자로 旌孝되었다.
남응원의 차자 南隆達(1565-1652)은 풍산 신촌으로 이거하여 나갔는데, 손자 남천한과 천택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현달하였다.
南天漢(1607-1686)은 1646년 문과에 급제, 1674년 2차 예송때 사헌부장령으로 남인들의 기년설 주장에 앞장섰으며, 송시열의 유배와 송준길의 관직 추탈을 주장했다. 승지를 거쳐 호조참의 재직 중 경신대출척으로 벼슬을 박탈당하였다. 풍산 봉암서원에는 남응원-남융달-남잡-남천한 4대가 배향되어 있다. 동생 南天澤(1619- 1684)도 1648년 식년문과에 급제, 호조참의․충청도사․경주부윤을 역임했다.
남팔개의 고손자로 임란을 맞아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청천 남태별(1568-1635)과 남태백 형제는 안망실 公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남팔준의 사위 합천 이씨 李福老의 후손들이 일직면 명진동에 계거하고 있고, 풍산 류씨 柳公權(1485-1539)도 남팔준의 사위가 되었는데, 사헌부지평 류공권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던중 사망하자 처 남씨가 3년 守廬 후 따라 죽으니 열녀로 旌閭되었다.
고성 이씨 편에서 李增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학덕있는 안동 선비 12명(안동 권씨 3명·흥해 배씨 4명·영양 남씨 4명·안강 노씨 1명)과 함께 1478년 우향계를 조직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 우향계원으로 참여한 영양 남씨 4명은 남부량의 손자 南敬身과 南敬仁, 남의량의 차자 성균생원 南致晶, 남우량의 아들 부사직 南致恭이 그들이다.
남치정의 고손자 南復圭(1559-1615)도 1600년 문과에 급제 형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으며, 광해군때 지난 날 직언을 한 것이 대북 일파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남치정의 또 다른 아들 屯齎 南昌年(1463-?)의 증손자가 南煌(1595-1666)이다. 한산 이씨 안동 입향조 수은 이홍조는 서애의 외손으로 남황의 사위가 되어 안동에 정착하게 된다.
남우량의 후손으로 부사직 남치공의 증손자 南龜壽는 봉화 황전에 살았는데, 황전마을은 원래 영양 남씨 마을인데 의성 김씨 예안파의 김흠이 남귀수의 사위가 되어 입향 하면서부터 의성 김씨가 융성한 마을이 되었다는 일화는 의성 김씨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영양 남씨는 대부분 남민생의 셋째아들 남의량의 후손들이다. 입향조 남휘주가 와룡면에서 시거한 후 남의량의 손자대에 일직면으로 이거하여 집성 계거하고 있는데 다시 그 일파가 풍산으로 전거함으로써 오늘날 안동 곳곳의 영양 남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영양 남씨는 입향이래 3대 7명이 무관으로 입신하여 세력을 떨쳤고, 우향계 조직, 임란 창의 의병활동, 효자 열녀, 남복규 남천한과 같은 직신을 배출함으로써 안동 남인계열의 유력 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명문이다.
남우량(南佑良) 1394(태조 3, 갑술) ~ 1472(성종 3, 임진)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영양(英陽). 자는 천여(天與). 호는 의의정(依依亭). 공조참의(工曹參議) 민생(敏生)의 제4자로 와룡(臥龍) 서지(西枝)에서 출생했다. 1419년(세종 1)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쌓았다. 세종조에 병조(兵曹)․공조(工曹)의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고, 단종조에는 주문사(奏聞使)로 뽑혀 명 나라를 다녀왔다. 또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회령절제사(會寧節制使)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튼튼히 하는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 永嘉誌․安東鄕土誌(宋志香)
남치리(南致利) 1543(중종 38, 계묘) ~ 1580(선조 13, 경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영양(英陽). 자는 의중(義中). 호는 비지(賁趾).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부량(富良)의 후손. 진사(進士) 신신(藎臣)의 자.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독학역행(篤學力行)하여 문과(文科)에 응시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하고는 수양을 위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계문안자(溪門顔子 : 퇴계 문하의 안자)"라고 불렸다. 이황이 죽었을 때 동문의 추대로 상례(喪禮)를 맡아보았으며, 1578년(선조 11) 정구(鄭逑)와 함께 유일(遺逸)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남선(南先) 노림서원(魯林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비지문집(賁趾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永嘉誌․陶山及門諸賢錄
남복규(南復圭) 1559(명종 14, 기미) ~ 1615(광해군 7, 을묘)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영양(英陽). 자는 여용(汝容). 일직(一直) 출생. 수의교위(修義校尉) 의량(義良)의 후손. 호인(好仁)의 자.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1604년(선조 37) 평안평사(平安評事)․형조좌랑(刑曹佐郞)․경상도사(慶尙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으며, 1600년(광해 원년) 광해군이 등극하자 지난 날 직언(直言)을 한 것이 대북 일파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갑산(甲山)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
남천한(南天漢) 1607(선조 40, 정미) ~ 1686(숙종 12, 병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영양(英陽).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수의교위(修義校尉) 의량(義良)의 후손. 현감(縣監) 잡(磼)의 자의 자로 풍산(豊山) 매곡(梅谷)에서 출생했다. 1630년(인조 8)에 생원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46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금성현감(金城縣監)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한 후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거리낌없는 직언(直言)을 하다 외직으로 밀려 현풍현감(玄風縣監)․청도군수(淸道郡守)를 역임했다. 1660년 다시 정언(正言)․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나 곧은 성품으로 인하여 권신(權臣)들의 꺼림을 받아 10여 년간 향리에 물러나 있었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예론(禮論)에 밝았으며 예송(禮訟)에 깊이 관여하였다. 1674년 2차예송(二次禮訟) 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재직하면서 남인(南人)들의 기년설(朞年說) 주장에 앞장섰으며, 송시열(宋時烈)의 유배와 송준길(宋浚吉)의 관직 추탈을 주장했다. 승지(承旨)를 거쳐 호조참의(戶曹參議) 재직 중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벼슬을 박탈당하였다. 저서에 『고암집(孤巖集)』이 있으며, 풍산(豊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嶺南人物考
남천택(南天澤) 1619(광해 11, 기미) ~ 1684(숙종 10, 갑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영양(英陽). 자는 소우(蘇宇). 호는 태암(苔巖). 풍산(豊山) 출생. 수의교위(修義校尉) 의량(義良)의 후손. 현감(縣監) 잡(磼)의 자. 1642년(인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1654년(효종 5)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울산부사(蔚山府使)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호조참의(戶曹參議)․충청도사(忠淸都事)․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했다. 효종(孝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1676년(숙종 2)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만년에 당쟁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으며, 저서에 『태암집(苔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 孝宗․肅宗實錄
첫댓글 늘~ 좋은글 올려주시는 할배 감사!!~ 잘지내셨고요?~
네, 감솨합니다...
안동에서 세거하는 영양남씨와,영덕,울진에 세거하는 영양남씨
1世祖가 다르다, 안동에 세거하는 영양남씨는 1世祖가 의령남씨
1世祖와 같은 君甫자손들이며.영덕,울진세거하는 영양남씨
맏집인 洪輔후손들이다
맞습니다...시조 남민은 신라 경덕왕때 사람이고, 홍보 군보 광보 삼형제는 고려 충렬왕때 사람이니 5백년의 시차가 있는데 충렬왕 당시에 남씨가 이 3형제만 있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영양 남씨에서 의령 남씨,고성 남씨로의 분파 시기도 충렬왕때가 아니고 더 아득한 훗날에 일부 후손들에 의해 분관되어진 까닭에 군보 후손은 모두가 의령 남씨로, 광보 후손은 모두가 고성 남씨로 분관되었다라고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영해 괴시리에 집성세거하는 영양 남씨와 안동 일원의 영양 남씨와의 관계는 더 연구해야할 과제네요
안동 남인세력 명문가 시리즈를 체계적으로 접근 하셨는데, 어떤 자료를 인용 발췌 하였는지? 아니면 석규님께서 연구하여 작성한 논문인지 궁금합니다. 안동 남인 명문가라면 결국 안동일원의 名閥들을 일컷는 다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고문님 이거 논문도 아니고요 그냥 주워들은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표현한 것으로 어떤 자료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끼리 이야기이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제가 안동고등학교 24회 출신입니다. 영양 남씨를 예로들면 남동국, 남태종, 남상덕 등 안동 출신 영양남씨 내 동기들에 묻고 인터넷 검색하고 족보 열람해서 나름대로 검증을 거친 내 나름의 자료입니다. 한편 쓰는데 2달이상 걸립니다. 안동고등 24회만 480명입니다. 제가 동기회에서는 호적계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 동기들이 우리 선김은 모르더라구요 영주에서 제일가는 명문이라고 해도 알아주질 않으니...
안동 영주 예천 봉화 + 영양 청송 영덕 의성 군위 + 문경 요거이 옛날 안동부이거든요 요 10개 지방이 영중지방인데 다행히 안동고교 동기들은 요지방 명문 자제들이 구색대로 다 모여 있어서리... 여기서 한가닥 해야 명벌인데 ...
그럴거예요동기분이 해박한 지식이 없어서 그럴거예요 . 남이 알아 주질않아도 우리는 宣金 이지요 ...많은 자손은 없지만
영양남씨 맏집 洪輔의 5世孫 奕의 長子후손이 錄事公派(承敬)이고, 셋째 승고(承顧)의 孫子代에서,萬戶公派 (顥),縣監公派 (頤).攀松公派 (領).松亭公派 (須)4파 나누어 졌고 ,水使公派 (禧)는 5세 삼기(三起) 후손들이며 영덕,울진을 중심으로 6개파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최근 인물로는 송정공파에서 전육군참모총장 남재준장군,현감공파에는 남해일 전해군참모총장 있으며,영덕군 일원에 세거하는 영양남씨들은 대부분 송정공 須의 자손들로 창수면 인량리 송정공파 종가를 중심으로 원구리에 송정공 6세손 난고 남경훈 불천위 종가가 있고, 가산리 일때에도 난고 자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영해면 괴시리 일명 호지마을도 송정공파 후손들이 세거하며 최근 영양남씨 대표적인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참 대단 하십니다. 나중에 책 나오면 한권 사서 볼랍니다.
約生-女 李擔-희(暿)- 계반(繼潘) - 식(湜)-사균(思鈞)- 정(侹)-女 李寗(진성이씨 온계선생 次子 ) 瓜葛관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