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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에 앞장섰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거대한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뜻 모를 시청 방화사건에 휘말려 공권력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노조 상집간부가 구속되고, 다행히 피해있던 현중노조 총무부장 동지가
조합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항의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한 25~30명이 흰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나타났다.
현대엔진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쳐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무차별 폭행하여
실신케 한 뒤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이에 엔진노조 임원들이 봉고차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동지와 여러 명의 조합원들이 합세하였다.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봉고차는 미친 듯 계속 앞으로 나가려 하였고, 동지가
봉고차 앞면에 들이 받치면서 쓰러졌다.
동지는 병원에서 612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82년 대학에 입학한 뒤 민주화 투쟁을 하였고, ’85년에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2년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88년 하반기부터 조선대 교지 편집위원장으로서 「민주조선 창간호」를 발간하는 등
통일운동과 사상, 표현의 자유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북한 바로알기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교지에 ‘미제침략 10년사’를 쓰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동지는 ’88년 초부터 ’89년 사망 전까지 학원 및 사회민주화를 지향하는
호남대 활동가들의 학습모임을 지도하였다.
동지는 ’89년 5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던 중 광주 제4수원지 삼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피해 도망친 후 5월 10일 수원지에서 익사된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동지를 검문한 북부경찰서 수사과 경찰관들 외에
제3의 공안기관에서 검문 도중 도망친 사실을 알고 동지를 찾기위해
수색활동을 벌인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일 제3의 공안기관에서 동지를 미행 또는 감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80년 당시 대동고학생으로 5.18항쟁에 참여하여 정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호남대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환경이 어려워 학교를 자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운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하남공단에 있던 신흥금속에 입사해 활동하면서 미국과 군부독재가 저지른
광주항쟁의 만행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러던 ’87년 3월 6일 동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캐로신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후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달리다 쓰러졌다.
이때 행인이 발견하고 불을 끄려고 했으나 못 끄고, 교통경찰이 불을 껐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사에게 “나는 광주 사람이다. 광주호남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어서 그만두고 하남공단에 있는 신흥금속에서 근무 중인 노동자다.”라고 말하며
집 전화번호와 유서를 인근 다방에 놓아두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분신당시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라는 쪽지와 슐츠의 방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신문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
고 박선영 열사 묘비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85년 서울교대에 입학한 후 수학과 학회와 교내 서클 UNSA, 학보사에서 활동하였고,
학교 측의 학회와 서클의 해체 조치 이후에는 선배를 통해 소개받은
청담교회 대학생부 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서울교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다른 학교보다도 더 악질적인 교육 관료들의
횡포로 인해 학내에 지하 취조실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에 맞서기 위해 동지는 부단한 자기 노력을 거듭했다.
어느 날 일기에 적힌 “이 땅 한반도에 사는 신종속국의 모든 백성이여!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어 후세에게 떳떳이 자랑할 수 있도록 일어나자.
일어나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힘찬 행진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하여”라는
글과 같이 살아가고자 했다.
동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가족들에게 미칠 영향으로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죽어 다시 깨어나라. 진정 역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힘을 길러 나오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투쟁을 승화시켰다.
이후 학교 당국은 그런 그의 죽음조차 이성관계에 의한 자살로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고(故) 이한열 열사(1965년8월29일~1987년 7월5일)
어린 시절
이한열은 1966년 8월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이병렬과 배은심의 2남 3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배은심은 동자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 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국민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벌어진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됐다.
그 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였다.
그 뒤 1년간 종로학원에서 재수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였다.
1987년6월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
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해 중앙일보, 뉴욕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조된 학생운동의 분위기는 6.10민주항쟁과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1986년4월28일오전 신림사거리. 두명의 서울대생이 3층 건물옥상에서
전신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댕겼다.
당시 21살의김 세진군과 22살의 이재호군은 서울대생의 전방입 소반대 시위를 주도하던 중이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들은 각각 5일과 28일 후 숨을 거뒀다.
이들은 죽는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불과 20년 전 한 줄기 희망도 찾아볼 길 없는 암울한 세상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은 민주화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내던졌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민주화의 길을 걷게된것이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용기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김세진, 이재호군은 그날의 행동에 앞서 각각 부모에게 글을 남겼다
“. …대학에 들어와우리의역사와사회에대한고민으로밤을새웠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올바르게 사회에봉사하는 의연한 삶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들을 잊고 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대체로 알고 있는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한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 아래에서 이 군과 김 군의 분신(焚身)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으로 봐야 할 측면도 있다.
다만 그들의 격렬한 반미(反美)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느냐는 것은 시각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시 중앙대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 동지는 8·15 민족해방일 기념식을 앞둔
89년 8월 14일 오전에 학교로 찾아온 도연주, 백승희 등과 동승하여
남해안 절해고도 거문도 앞바다에서 8월 15일 변사체로 떠올랐다.
도연주는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이고, 거문도 주민들의 증언으로 이내창 동지와
도연주, 백승희와 같이 있다가 감쪽같이 섬에서 사라진 사실이 밝혀졌다.
그후 경찰은 이씨의 죽음을 단순 익사로 결론지었으나, 총학생회장으로서
매우 바쁜 일정에 쫒기던 동지가 거문도까지 생명부지의 사람들과 동행해서 간 점,
단순 익사에서는 보기 힘든 7군데의 피하출혈의 흔적 등으로 인해
목적의식적 유인 타살이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어려서부터 중국집 배달원, 가방공장 공원 등의 노동일을 하였다.
’89년초 대학출신 현장 활동가를 만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 인식하게 된 동지는,
서울 민주화직장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활동하기에 이른다.
동지는 평소에 망월동 참배를 원했으며, ’91년 5월에는 5월 9일 국민대회에 맞춰
광주로 갔고, 5월 9일 분신해서 투병 중이던 박승희 동지에게 문병을 가기도 했다.
’91년 5월 10일 동지는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한점 불꽃으로 산화하였다.
분신 이틀 후인 12일, 동지는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운명하였다.
김철수 열사의 삶과 죽음
열사는 주관이 뚜렷하고 의사표시가 분명하며 성취의욕이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교내 수학 경시대회, 영어경시대회 등에서 1등을 하고 한글을 모르는 친구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많은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학생이었다.
열사는 교내 풍물 동아리인 ‘솔개’와 봉사동아리‘인터렉트‘ 활동을 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다.
또한 부모님에게 타가는 납부금이 누구의 배를 불리는지 모르겠다며 학교의 비민주적 운영,
학생 자치 활동 탄압 등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던 1991년 5․18민중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를 치르던 도중
학교 건물 뒤편에서 미리 준비한 신나를 몸에 붇고 불을 붙인 체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열사는 화염에 휩싸인 체 운동장으로 달려가면서‘노태우정권 퇴진’과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는 ‘우리의 소원’을 친구들에게 불러 달라고 했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동지는 화마와 싸우는 동안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라는
육성 유언을 남기고 소생의 염원을 뒤로 한 체 참교육의 불꽃으로 운명하였다.
1987년 시위 도중 전두환 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수많은 이름들을 열사라 호칭하며 오열했다.
또 하나 열사라 불러야 할 이름, 박승희가 있다.
전남대 학생이던 박승희는 1991년 당시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경대 열사의 죽음 앞에 청년학생들이 앞장서서 싸워야 할 것’을 호소하며
분신하여 투병하다 21일 만에 사망한다.
박승희의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수많은 분신투쟁이 뒤를 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가장 큰 희생을 가져온 ‘분신정국’의 시작점이 된 이가 바로 박승희이다.
이렇게 수많은 죽음의 항거로 군부 공안통치는 종식되고 비로소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로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민주화유공자로 인정했다.
박승희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세례를 받았고 미션스쿨인 목포정명여고를 다녔다.
고교시절에는 와이엠시에이 고교클럽 ‘이슬’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고교 3학년 때는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을 막기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였다.
대학에선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
의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았던, 짧지만 생각과 행동이 분명한 일관된 삶을 살았다.
박승희는 의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죽어서 부활한 예수의 삶을 실천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열사이다.
동지의 삶과 죽음
’91년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투쟁 집회에 지지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총학생회장이 불법 연행되자, 명지대 학생들은 즉각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압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4월 26일,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학교 안팎의 상황을 연락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동지는 제일 늦게 철책으로 된 담을 오르게 되었는데,
백골단 5~7명이 동지의 다리를 붙들고 끌어내리면서 쇠파이프로 전신을 구타하고 도망갔다.
잠시 후 오른쪽 머리와 얼굴이 피범벅이 된 동지가 담을 넘어 올라오고 학우들이 부축하자 실신하였다.
그러나 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 운명하였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당시에도 명동성당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활동을 하는 등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대 입학 후 바로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에서 제대하여 ’87년 대선 당시 부정선거 규탄을 위한 ‘구로구청 농성’에 참여하여
구류 10일을 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던 ’88년 5월 15일 당시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이었던 동지가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투신하였다.
동지는 투신 후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투신 때 입은
두개골 손상으로 인해 오후 4시 30분 뇌사상태에 빠져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맺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7시 30분 끝내 운명하였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우리에게 ’8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지는 고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입시위주 교육에 반대하여 자퇴를 하고
대학 입학 후에도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배포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 다시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고서 동료 15명과 함께 체포돼
8개월여의 투옥을 경험했다.
학교에서 제적된 동지는 고향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진혼가’, ‘잿더미’ 등
시를 써 등단하였다.
이후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열고, 다시 귀향해 후일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79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으로 투옥돼 9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한
동지는 길지 않은 평생을 반외세ㆍ반독재 투쟁에 헌신하였다.
동지가 감옥에서 우유곽이나 밑씻개용 휴지 등에 쓴 시들을 묶은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은 그 누구의 시보다도 ’80년대
폭압적 현실의 한복판을 날카롭게 꿰뚫는 절창으로 애송되었다.
’88년 12월 석방된 뒤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및 한국민족 예술인 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아왔다.
그러던 중 오랜 감옥생활과 석방 뒤의 과로 등이 겹쳐 얻은 췌장암으로 투병 끝에 운명하였다.
동지의 삶과 죽음
고 정광훈 의장은 해남 출신으로 광주전남지역에서 20여 년간 농민운동을 주도했으며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민주노동당 고문 등
민중운동 지도자로 살아왔다.
5.18 당시 시위 주도, 농민대회 주도, 한미FTA저지 등으로 3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특히, 고인은 2003년 WTO 멕시코 칸쿤회의 당시 [DOWN DOWN WTO, DOWN DOWN FTA] 등
DOWN DOWN 시리즈 구호를 처음으로 외쳐, 현재 전 세계 노동자 농민 등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시위에 대중적 구호로 자리 잡게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고 정광훈 의장은 지난 4월 26일 화순 보궐선거 지원유세 후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조선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72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열사의 삶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 남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7 남매의 장녀인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동지는 버스안내양, 가발공장 공원 등으로 일하다 부평 작전동 한독산업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가정 살림과 동생들 학비를 뒷바라지 해주었다.
그 후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가정 형편이 매우 힘들었고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정성껏 효도를 하며 살아 나갔다.
그러나 불행은 연이어 닥쳐왔다.
그는 최선을 다해 시댁과 가정을 뒷바라지했지만 세상은 그런 그에게 시련만을 안겨주었다.
그는 남편과 이혼한 뒤 식당 일을 하면서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학원에 나가
한식, 중식, 일식 조리사 자격증까지 땄다.
그는 평소에 공부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는데 동지의 그런 탐구력과 생활력은
어려운 시련에서도 그를 끊임없이 공부하게 했다.
그는 평소에 노트 같은데다 많은 글과 시를 썼는데 분신 뒤 그의 방 동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의 희생정신에 대해 깊이 감화 받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무엇일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 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경 강경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공안통지 종식, 노태우 퇴진 을 외치며
불덩어리가 되어 투신하였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대 풍물패 천둥 활동에 참여했다.
동지는 ’96년 3월 29일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한 후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종로 5가에서 5시 35분경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는 매우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이 내세운 “대선자금 공개”, “등록금 인상저지”등의 구호는 전 국민적인 호응과
공감을 받고 있었고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전혀 들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초반부터 강경진압으로 일관했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52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당시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 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의 시신에서는 경찰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96년 조선대에 입학해 과소모임인 지방자치제 연구반 활동을 했고,
이듬해 연구회 분과장으로 활동했다.
동지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인 부정, 부패, 부도덕, 폭력성에 입각한 반민족 반민중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남총련 주최로 ’97년 3월 20일 오후 2시에 조선대에서 열린 개강선포식에 참가했다.
전경과 학생의 대치 중 녹두대에서 깃발을 들고 있던 동지가 후배에게 깃발을 넘긴 후
맨 앞에서 전경과 대치해 투석전을 전개하던 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운명했다.
그러나 사망원인에 대해 병원과 경찰 측은 심장쇼크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했고
동지의 시신은 2개월 여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영안실에 보관되었다.
이후 한총련은 ‘시위도중 사망 시인할 것.
몸에 칼을 대지 않는다는 전제로 모든 사인진상 규명을 위해 나설 것.
도청 노제를 비롯한 모든 장례행렬을 보장할 것.
검문, 원천봉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 전개했고 경찰 측은 시신에 대한
부검 없이는 장례식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장례식을 방해했다.
결국 동지는 사망한 지 64일 만에 부모, 친지, 조선대 학우 7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동지의 삶과 죽음
고 박종태 열사가 몸담았던 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대표적인 특수고용노동자 조직이다.
현대판 노예로 불리는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헌법이 정한 노동3권마저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가 바로 특수고용노동자다.
고 박종태 열사는 특수고용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앞장서 투쟁해 왔으며,
대한통운과 금호그룹 자본에 맞서 헌신적인 활동을 펼쳐 왔다.
하지만 대한통운은 운송료를 인상키로 한 노사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삭감하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을 오히려 집단해고 했다.
이 와중에 경찰은 업무방해와 집시법 위반 등의 명목으로 고인을 상대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며, 항의집회에 나선 조합원들을 연일 수 십 명씩 줄연행 했다.
법도 없고, 상식도 없이 오로지 연이은 탄압뿐이었다.
두 아이의 아빠인 고인이 죽음에 이르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대한통운․금호그룹 자본과
폭력경찰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 합시다’,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됩니다’,
‘길거리로 나선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고인이 유서를 통해 밝혔듯이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헌법이 보장한 단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나라,
길거리로 내몰려 아무리 외쳐도 자본과 정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라가
이명박 대통령이 통치하는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비극을 넘어 재앙이다.
양영진 동지는 88년 10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이땅의 올바른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며, 8월15일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 선전부 활동을 가열차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군입대로 인해 군의 폭력적 지배 방법, 법적 표현에 미제국주의의 복종,
예속의 한반도 수탈 구조를 실감하고 인간의 뜨거운 피와 순수한 생존 원동력인 열정으로
민족 통일을 조국산하에 뿌리 박기 위해 88년 10월10일 부산대 재료관 옥상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 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하였다.
열사가 전사에게
(최준/글 김성민/가락)
1. 꽃무더기 뿌려 논 동지의 길을
피 비린 전사의 못 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 온데도 그 길 가리라
2. 그 길가다 피눈물 고여 바다 된대도
싸우는 전사의 오늘 있는 한
피눈물 갈라 흐르는 내 길을 가리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