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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 秋享 獻官 및 諸執事 分定 | ||
薦 望 | 姓 名 | 備 考 |
初獻官 | 全 鍾 得 | 全氏中央宗親會長 |
亞獻官 | 全 夏 洙 | 全氏中央宗親會 代議員會 議長 |
終獻官 | 全 炳 文 | 釜山地區宗親會長 |
執禮 | 全 燦 鐸 | 宗親會副會長 |
祝 | 全 先 集 | 江陵 |
謁者 | 全 桂 先 | 全氏中央宗親會 事務局長 |
贊引 | 全 燦 均 | 江陵地區宗親會長 |
奉香 | 全 相 煥 | 서울 |
奉爐 | 全 炯 燮 | 釜山 |
奉爵 | 全 仁 杓 | 서울 |
奠爵 | 全 柳 集 | 江陵 |
司樽 | 全 東 旭 | 서울 |
陳設 | 全 永 錄 | 旌善 |
山 神 祭 | ||
獻官 | 최 양 진 | 정선 남면 문체위원장 |
祝 | 全 今 杓 | 三陟地區宗親會長 |
執事 | 全 在 善 | 江陵 |
모든 행사를 마치고 全鍾得 全氏中央宗親會長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중시조께서는 신라 성덕왕때 외교사절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곳은 우리종친들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축문과 홀기를 촬영하고 해석하여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전선집 축관을 만나 축문은 촬영하였으나, 전찬택 집례를 만났으나 홀기 가지고 계신 것 같지 않았습니다. 홀기 촬영 의사를 말씀드리니 도포 자락에서 홀기를 꺼내 보이셨습니다. 나의 예상을 반전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홀기는 촬영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워낙 길기도 하고 비가 조금 내려서 땅이 축축하게 젖어있어서 펼칠 수가 없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墓 祭 祝
維
歲次 丁酉 九月庚辰朔 十五日 甲午
後孫 鍾得 全氏中央宗親會長 敢昭告于
皇中始祖考 奉翊大夫 副智密直司事 典法判書 旌善君府君
皇中始祖妣 貞敬夫人 奈城辛氏 之墓
新羅天朝 褒崇積德 封 旌善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感慕益至 粢盛庶品
謹以 酒果脯醯 恭伸 奠獻 尙
饗
【아뢰옵건대 1년이 지나 정유년 9월 15일 시향날이 다시 돌아옴에
후손 종득(전씨중앙종친회장)은 감히 고하나이다.
중시조고 봉익대부 부밀직사사 전법판서 정선군부군
중시조비 정경부인 내성신씨의 묘
신라조정에서 헌신한 공덕으로 정선군을 봉받았습니다.
한 해가 지나서 돌아가신 날이 다시 돌아와서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해져서
정갈한 곡식(粢盛)과 여러 가지 물품을 갖추고
술과 과일과 포와 혜를 삼가 정성으로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행사가 끝나고 전희경 국회의원의 부친인 전창종 부회장님을 만나서 인사드렸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점심 도시락을 배부 받았습니다. 보통은 밥이 한 개, 반찬이 하나 이렇게 두 개로 구성되는데, 하나의 도시락에 밥과 반찬이 있어서 밥과 반찬의 양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선으로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시향 참가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내려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묘소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왕릉이어야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강릉지방에도 강릉김씨 시조인 김주원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은 강릉시 성산면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명문성씨들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묘소는 손꼽을 정도로 희박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대화를 하며, 중시조의 실묘(實墓)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매우 희유한 사례라는데 전부 동의하였습니다.
전찬균 강릉지구종친회장은 강릉지방 유력 풍수연구가들이 전국 유명한 명당을 돌아본 사람들의 감평을 전해 주었습니다. 앞좌석에서 이야기해서 잘 들리지 않아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명한 명당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좋은 곳이다.’라는 평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앞으로 대통령이 한 분 더 나올 명당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답니다.
나의 선친은 ‘휴전선 이남에서 좋은 명당대지중의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늘 하였습니다. 그때 들을 때는 조선8대 명당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 묘소, 신안동김씨 공조정랑(工曹正郞) 김번(金璠) 묘소, 청주한씨 중시조 한란(韓蘭) 묘소, 대사간 광원군(光原君) 김극뉴(金克忸)<沙溪先生 5代祖><일명 말명당, 天馬登空形局>, 동래정씨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묘소<일명 鄭墓><玉女側臥形局>, 반남박씨 시조 반남호장(潘南戶長) 박응주(朴應珠) 묘소<일명 벌명당>, (羅峴마을)-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 묘소,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묘소】
이 있는데 하면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습니다.
어떤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정선의 429번 지방도로를 따라 낙동리에, 전씨 묘역의 입구 하마비(下馬碑)에 이르니 사방으로 산이 겹겹이 싸여 있어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웠다. 단지 마을 앞 낙동교 밑으로 흐르는 큰 개울, 동남천이 호수처럼 보였다. 후손이 마련해 놓은 계단을 따라 묘역에 이르니 이 호수처럼 보이는 강은 등잔의 받침대에 고여 있는 들기름처럼, 주산으로부터 길게 뻗어내려 결인된 꽃가지는 등잔대로 형상화되었다. 바로 괘등혈(掛燈穴)이 아닌가.
본래 괘등혈은 등잔불이 환하게 앞으로 비치도록 형상화되어야 하므로, 안이 없어야 하며 득수 너머에 촛불처럼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놓여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해는 서산에 걸려 있으므로 나경(羅經)을 꺼내어 좌향을 볼 필요가 없었다. 뾰족한 봉우리로 줄을 탱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간좌(艮座原)였다. 간좌는 서남향이기 때문에 겨울의 살을 에는 북서풍을 등질 수 있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득수(得水)까지는 거리가 멀어 발복(發福)이 느리지만 안산이 겹겹이 싸여 지기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마련이다. 혈처의 앞을 에워싸는 조산의 모양으로 보아 많은 인물이 배출되리라.』
또 다른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인 대덕산(大德山)에서 건방(乾方)으로 발조(發祖)한 주룡(主龍)이 노목산(櫓木山), 지억산(芝億山)으로 초초 원행(迢迢 遠行)하여 주산(主山)에 도달(到達)하는 중간 중간에 운소봉황(雲宵鳳凰)이 운중(雲中)을 비래(飛來)하는 듯한 용약고룡(聳躍高龍)이 굴곡(屈曲) 기복 활동(起伏 活動)을 활발(活潑)하게 행룡(行龍)하였다.
좌우 지각(左右 枝脚)을 원원 회포(遠遠 廻抱)하고 홀연 대단 과협(忽然 大斷 過峽)을 형성(形成)한 후 좌우 영송 지각 긴밀(後 左右 迎送 枝脚 緊密)후 충천 자기 목성(衝天 紫氣 木星) 등 오길 존성 탁립(五吉 尊星 卓立)하여 존엄 기상(尊嚴 氣象)을 형성(形成)하였다.
사수 단취(沙水 端聚)하여 내외 수구 중중긴긴 관쇄(內外 水口 重重緊緊 關鎖)를 이루었다.
안산 조산(案山 朝山)이 다정(多情)하여 사면봉만(四面峰巒)이 개면 공립(開面 拱立)함이 가히 명당(明堂)으로 손색이 없다.
주산(主山)에서 전후 참치 개장(前後 參差 開帳)한 중출맥(中出脈)은 정선전씨 중시조 묘(旌善全氏 仲始祖 墓)로 입수(入首)되었다.
개장 좌우 양각(開帳 左右 兩脚)은 진출(進出)하는 용맥(龍脈)을 근거리(近距離)에서 다정(多情)하게 협보(挾輔)하였다.
좌청룡(左靑龍)은 안쪽으로 수조(數條)의 지각(枝脚)을 분출(奔出)하여 중중 회포(重重 廻抱)하였고,
우백호(右白虎) 역시 우선(右旋)하면서 혈처(穴處)를 회포(廻抱)하면서 좌청룡(左靑龍)과 상교(相交)하여 수구(水口)를 중중 관쇄(重重 關鎖)하여 내당수(內堂水)가 소수(消水)함을 불허(不許)하고 있다.
입수 도두처 혈성(入首 到頭處 穴星)을 보면 생고 취래세 웅급자(生股 嘴來勢 雄急者)로 복장형(覆掌形)의 음룡(陰龍)이고 혈처(穴處) 역시 복장고취자(覆掌股嘴者)로 음룡(陰龍)이다.
즉 음래음수(陰來陰受)하여 태음지혈(太陰之穴)을 결지(結地)한 곳이다.』
또 다른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봅니다.
『9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九龍爭珠)으로 첩첩산중이고, 圍繞 한 산줄기는 萬疊을 이루어져 開面環拱하니, 수구는 重重關鎖 曲曲緊塞하였으니 가히 “ 兵禍不入之地 ”이다.
높이 솟은 봉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佳穴大地이요, 어찌 예사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靑龍이 如意珠를 물고 등천할까!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당대에 크게 발복하여 9대에 걸쳐 장상(재상)이 연출하고, 부마도 당연히 나온다.』
정선전씨대동보의 기록도 인용해 보겠습니다.
『공이 일찍 석문을 통해 나아가 높은 곳에 올라가 마침 채운(彩雲)이 서남쪽 맥산(麥山)의 양지 바른 산록에서 일어나 덮개처럼 울창하게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은 이를 두고 하늘이 나에게 주신 가묘라고 하며 기뻐하며, 묘자리를 정하여 영험함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자손에게 명을 내려, 제수(祭需)를 갖추고 정성을 다하라고 일렀습니다.
대대로 석문의 안쪽 양지촌에 살게 하고, 이곳을 서운동으로 부르도록 일렀으며, 구름이 일어난 곳을 채운휴장봉(彩雲休杖峰)으로 부르게 하였다』
『公嘗就采邑由旌善 而進登高而 望適有彩雲起於西南麥山 陰薈蔚如盖 公喜曰 此天錫我壽藏遂定基墓塋 遺命子孫 使莫世居 于石門內 陽地村 乃名其山曰瑞雲 洞名因之雲起處曰 彩雲休杖峰 曰鎻雲盖識喜也』
풍수전문가의 의견은 발복(發福)은 느리지만 지기(地氣)를 오랫동안 유지한다고 하였고, 앞으로 미래시대에 우리나라를 이끌 큰 지도자가 배출되리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우리 종중의 인물이 몇 분이 떠올랐습니다.
1. 고려시대 전오륜(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인용하겠습니다.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 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2. 조선시대 전백록(全百祿)
강희섭씨의 글을 인용합니다.
『북방 호걸 전백록(全百祿)을 아십니까?
여기에 지역차별을 딛고 황해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전백록의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태조가 서북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말라고 한 이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500년 동안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혹 과거에 급제해도 현령 정도였고, 무장 중에는 정봉수와 전백록 두 사람이 유일했다. 전백록은 북방 호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풍당당했고, 청렴결백하고 충직해서 지역적인 차별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 사람이었다. 청렴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어머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한 여인이 시집 온 지 몇 해 되도록 임신을 못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고 있는데 별안간 흰 사슴 한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와 쓰러졌다.
여인은 틀림없이 무엇엔가 쫓겨 온 것이라 짐작하고, 사슴을 뒤뜰 안에 데려가 물을 먹인 뒤 입고 있던 치마를 덮어 숨겨 두었다. 얼마 안 있어 포수 2명이 헐레벌떡 들어와 사슴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베틀에 앉은 채로 태연하게 “사슴은 온 적도 없거니와 아낙네 홀로 속옷차림으로 일하고 있는 집에 뛰어드는 무례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포수들은 황급히 사과하고 집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여인은 사슴을 몰래 놓아주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옥동자를 얻으리라”고 전했다.
그 후 그토록 기다려마지 않던 아이가 생겼고, 낳고 보니 꿈대로 사내아이였다. 흰 사슴이 주고 간 선물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백록이라 지었다. 그 백록이 자라 현종 임금 시절에 경흥부사가 되었다.
어느 날 백록이 잠을 자는데, 어머니가 몹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너무 놀란 나머지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깨어났다. 날이 밝자마자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여러 하인들이 가마를 탄 그의 뒤를 따랐다.
온성 집에 도착한 그는 “어머니, 백록이 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어머니를 찾았다. 곧 열릴 줄 알았던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한 백록이 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으나, 어머니는 문을 열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 에미를 보겠다고 이렇게 바쁜 모내기철에 숱한 하인들을 거느리고 올라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몹쓸 놈 같으니”라는 호통만 들었다. 백록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공직자로서 제 분수를 지키라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바로 백록의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우리 온성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훌륭한 분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 들으며 자라왔다.』
3. 조선시대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 1532∼1585) 선생
심후섭씨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근면성실, 안과 밖이 다 부지런하다면 -계동 전경창 선생의 선비 정신
파동에서 용계동으로 나가는 다리인 가창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면 얼마 오르지 않아 양지편에서 무동재(武洞齋)라는 재사를 만날 수 있다. 이 재사는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 1532∼1585) 선생을 비롯, 전유성(全由性), 전순손(全順孫), 전익견(全益堅), 전복견(全復堅), 전연(全璉), 전침(全琛), 전응창(全應昌), 전계신(全繼信) 등 옥산전문(玉山全門)의 여러 선현을 모신 재사로서 처음에는 파산재(巴山齋)라 불렀다고 한다.
계동 선생은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사 당호는 어떻게 무신(武臣)의 느낌을 주는 무동재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함께 모셔진 전연(全璉) 선생이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였고, 전계신(全繼信) 선생 또한 병조판서로서 무신 성격이 더 강해서였을까? 어쨌거나 당초 파산재에서 지금과 같이 무동재로 불리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武’는 ‘무예’와 더불어 ‘굳세다, 용맹하다’는 뜻을 함께 품고 있으니, 의지가 굳세고 용맹한 분들을 함께 모신 재사라고 해석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손처눌(孫處訥) 선생이 찬(撰)한 계동 선생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선생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과 약포 정탁(藥鋪 鄭琢), 판서 윤국형(尹國馨)과 판서 권협실(權鋏實) 등이 상여를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 무동(茂洞) 등성에 장사지내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동재는 무동(茂洞)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계천 동쪽에 산다 하여 계동(溪東)이라는 호를 얻은 선생은 대구 지방의 많은 선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리학자였다. 향토사학자 구본욱 님은 당시 계동 선생과 교류한 여러 선비들의 문집 등에서 선생의 당시 위상을 밝혀낸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계동 선생은 채응린(蔡應麟), 정사철(鄭師哲)과 더불어 조선 중기 대구 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로서 노력하였다. 특히 계동 선생은 퇴계 문인으로서 손처눌, 이주, 곽재겸, 류요신 등을 문하로 하여 성리학을 전수하는 한편, 채응린을 통해서는 서사원에게, 정사철을 통해서는 그의 아들 정광천에게 성리학을 전하게 하여, 대구 성리학의 중심인물로서의 그 기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동 선생은 학문의 나눔을 실천하였다. 서사원에게는 ‘심경(心經)’을, 곽재겸에게는 ‘근사록(近思錄)’을 주면서 “학문의 이유는 과거(科擧)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심양성(存心養成)에 있다”고 하여 먼저 인격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선비마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라든지 ‘역학도설(易學圖說)과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얻어 손수 베껴 쓰고, 그 이치를 찾아 사색하는 즐거움을 누렸다’라는 구절로 보면 선생은 서로 나누는 삶의 일부로 학문에 임했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은 부지런하면서도 모든 일에 성실하였다. ‘의관을 엄정히 하는 것은 바깥 닦음을 말하고 행실을 순결히 하는 것은 안 닦음을 말하니 안과 밖이 함께 닦이면 누가 귀하게 여기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키며 평생 근근성실(勤謹誠實)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계동 선생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 우의를 아주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철은 계동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자신과 계동 선생간의 관계를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타고난 성품 또한 강직하면서도 단호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선생은 백부에게 나아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백부가 누명을 쓰고 관가로 끌려가자 옥리(獄吏)와 맞서 그 억울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굳건한 심조(心操)로 학문을 선구적으로 열고 이를 후학에게 전하였다.
계동 선생의 선비 정신은 더욱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
4.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전형필(全鎣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인용하겠습니다.
『정의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정3품) 계훈(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명기(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 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년),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郎)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 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覽)의 경지로 향상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 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화성(畫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선(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 자료인 중국 역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 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 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6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1954년),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아직까지 중시조묘소 시향을 참석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꼭 참석하여 정성껏 참배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중간에 이슬비가 내려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300여명의 후손들이 여법하게 시향에 참석하였습니다.
중시조의 업적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후손으로서 존경심과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묘소의 장엄함도 깊은 인상으로 남는 하루였습니다.
(주1) 褒 기릴 포, 모을 부
1. 기리다, 칭찬하다(稱讚--)
2. 크다, 넓다
3. 넓고 큰 옷자락
a. 모으다 (부)
b. 모이다 (부)
(주2) 粢 기장 자, 술 제
1. 기장(볏과의 한해살이풀)
2. 곡식(穀食)
3. 떡(치거나 빚어서 만든 음식)
a. 술 (제)
(주3) 내성[奈城]
신라시대 영월군의 명칭
(주4) 자성[粢盛]
제사에 올리는 정결한 곡식. 보통 서직(黍稷)인 기장이나 쌀을 의미함. 조선 시대의 경우 종묘나 사직과 같은 국가대제에 사용되는 자성은 임금이 적전(籍田)에서 직접 밭을 갈아 심은 곡식을 이용하였음. 조선 시대에는 적전의 곡식을 관장하여 제사에 올리기 위해 전농시(典農寺)를 설치하였음.
※黍稷(서직)
黍 기장 서
稷 피 직, 기울 측
찰기장과 메기장(옛날 나라 제사(祭祀)에 날것으로 썼음)
(주5)서품[庶品]
①제사에 쓰이는 여러 가지 물건. 제사를 드릴 때 쓰는 생(牲)•폐(弊)•예제(醴齊)•자성(粢盛) 등에 쓰이는 물품을 말함. 태묘(太廟)의 제향을 섭향(攝享)할 때의 축식(祝式)에 생(牲)•폐(弊)•예제(醴齊)•자성(粢盛)•서품(庶品)이라고 모두 갖추어 썼으나, 황단 축식(皇壇祝式)에서는 간단히 생예서품(牲醴庶品)이라고 썼음.
②여러 가지 계급의 관리를 일컬음. 아주 높은 관직이 아닌 일반적인 관리를 지칭함.
(주6) 諤 곧은 말할 악
1. 곧은 말하다
2. (기탄(忌憚)없이)바른말을 하다
(주7) 遵 좇을 준
1. 좇다, 따르다
2. 따라가다
3. 거느리다
4. 지키다
5. 높이다, 공경하다(恭敬--)
(주8) 薈 무성할 회
1. 무성하다(茂盛--), 우거지다
2. (가려다)덮다
3. 막다
4. 가리다
5. 모이다, 모으다
6. 무성(茂盛)한 모양, 우거진 모양
7. 구름 피어오르는 모양
8. 숲
(주9) 錫 주석 석, 줄 사, 다리 체
1. 주석(朱錫)
2. 구리
3. 석장(錫杖: 승려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
4. 가는 베, 고운 삼베(삼실로 짠 천)
5. 성(姓)의 하나
6. 주다, 하사하다(下賜--)
a. 주다, 하사하다(下賜--) (사)
b. 다리(여자들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었던 딴 머리) (체)
c. 가발(假髮) (체)
(주10) 塋 무덤 영
1. 무덤, 분묘(墳墓)
2. 산소(山所)
3. 장지(葬地)
4. 매장하다(埋葬--)
(주11) 杖 지팡이 장
1. 지팡이
2. 몽둥이
3. 장형(杖刑: 죄인의 볼기를 큰 형장으로 치던 형벌)
4. 창(槍) 자루(끝에 달린 손잡이)
5. 짚다
6. 때리다
7. 의지하다(依支--)
8. 잡다
(주12) 鎻 쇠사슬 쇄
1. 쇠사슬
2. 자물쇠
3. 항쇄(項鎖: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 수갑(手匣)
4. 가두다
5. 잠그다
6. (얼굴을)찡그리다, 찌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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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 종종 들르곘습니다. 先集
종중행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종중 발전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 습니다
늘 건강 하십시요
내성지[奈城誌 ]
정의
조선 후기에 김수민(金壽民)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
몽유록(夢遊錄)계 작품으로, 작자의 문집인 『명은집(明隱集)』 권18에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몽유자인 무명자(無名子)는 평소 춘추를 즐겨 읽었는데, 명산대천을 유람하여 가슴을 넓혔다.
내성(奈城 : 지금의 영월)에 이르러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비분한 마음으로 시를 짓다가 관풍루(觀風樓)에 이르러 입몽하게 된다. 꿈 속에서 단종(端宗)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르며, 뒤이어 명나라 건문황제(建文皇帝) 역시 신하들을 데리고 온다.
참고문헌
『한국몽유소설연구』(신재홍, 계명문화사, 1994)
『명은집』(김수민, 보경문화사, 1986)
「내성지 주제의식의 연원과 그 전개」(신해진, 『한국고소설학회 제36차 연구발표회 발표요지문』, 1997.2.4.)
「명은 김수민의 내성지 검토」(신재홍, 『국어국문학』105, 1991.5.)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내성지 [奈城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수민의 한문소설에 대한 해설을 보면 '내성'을 지금의 영월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성신씨" 가 지금의 "영월신씨" 라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旌善君 全愃 묘소 :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산 120-7
瑞 雲 齋 :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233-3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남창길22)
奈城辛氏는 영월신씨로 추정됩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영월의 역사를 보면 신라시대에 "내성"이라고 불리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월군[寧越郡 ] 역사
장수왕 때에 고구려는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그 세력을 남으로 뻗쳐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어 백월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통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생현을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9주 5소경 중 명주(溟州)에 속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군 [寧越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유년, 우리 중시조 정선군 시향제 관계자 일원으로서 금년 시향제 봉행준비에 부실했음을 자인하며 매우 부끄러운 처사로 생각합니다. 향후 시향제는 준비를 좀 잘 해서 전국에서 멀다않고 오시는 종친님들께 편하고 즐거운 참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묘소를 수호하고 매년 정성을 들여 시향제를 준비하시는 정선종친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