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씨의 아들이 영훈국제중학교에 부정입학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교과성적이 155명 중 72위에 불과했던 이재용씨의 아들은 주관식 채점과정에서 엄청난 가산점을 받아 15위로 입학에 성공했다. 검찰 조사 결과 이 학교 행정실장 임 씨는 성적을 조작해 입학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학부모들로부터 수천만 원 상당의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고, 교감은 수사과정에서 자살했다.
영훈국제중학교사건의 전말과 비교해보면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일반의 시각이 얼마나 무딘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과 이재용 자녀 부정입학 사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사건이지만, 이것들의 <후원 - 수혜관계>는 꼭 닮아있다.
 |
<유사한 두 사건의 도식. 표:다람쥐주인> |
<이재용-이재용 아들-영훈국제중>의 관계는 <원세훈-박근혜-청와대>의 관계와 같다. 이 도식에서 이재용 부회장 부부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물리력을 이용해 '게임의 룰'을 어겼다는 점에서 같은 위치에 속한다. 이재용씨 아들과 박근혜 대통령 역시 사건의 가해자는 아니지만, 부정한 행위의 수혜를 입었다는 점에서 등치를 이룬다. 둘은 모두 자신의 '후원자'로부터 부정한 지원을 받았고, 영훈중학교 입학과 청와대 입성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
지난달 말 이재용씨의 아들은 부모가 저지른 부정행위 사실이 들통나자 망설임없이 자퇴했다. 아니,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입학을 하고도 학교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도식속에서 이재용씨 아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얼 해야 할까?
이재용씨 아들이 자퇴하자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아들이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부정입학이 밝혀졌다면 자퇴하는 것이 상식이고 순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재용씨 아들에게 한목소리로 자퇴를 요구했던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재용 씨의 아들이 영훈중학교 입학과정에서 부모의 부정한 도움을 받았듯, 박근혜 대통령 역시 선거과정에서 전 정권의 도움을 받았다. 부정행위의 수혜자라는 측면에서 이재용씨 아들과 박근혜 대통령은 처지가 같다. 그런데 한명은 순리에 따라 자퇴를 했고, 다른 한명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상한 가정
국정원사건의 몸통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인지 아니면 그 위에 누가 더 있는지 아직 분명치 않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전임 정권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선거 직전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의 날조된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아니었다면 선거결과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가정은 중요하지 않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만약 부모의 '부정한 도움'이 없었다면 이재용씨 아들은 영훈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누구도 저런 가정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재용씨 아들이 자퇴한 이유는 그런 가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부모의 부정행위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정행위라는 사건의 본질 앞에 '아들의 능력'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데, 똑같은 문제를 국정원사건에 대입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진다. 질문을 바꿔보자
"만약 국정원사건이 없었다면 박근혜 후보는 당선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앞의 질문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무거움은 영훈중학교 입학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부정입학과 같은 '작은 부정'조차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보다 수만배는 무거운 선거부정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상하다.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국정원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박근혜 후보는 당선됐을 것이다. 그러니 정권의 정통성과는 무관한 일이다"
만약 이재용씨가 대국민사과 대신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내 아들은 부정이 아니었더라도 영훈중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될 것 없다"
 |
<서울대 학생들의 시국선언 출처:오마이뉴스> |
현실에 여과된 주장들
분노한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 서울대 총학생회를 시작으로 이화여대와 경희대, 성공회대, 숙명여대, 동덕여대가 뒤를 따랐고 다른 학교들도 속속 동참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그들의 시국선언문 어디에서도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찾아 볼 수 없다. 시국선언문은 패기넘치는 거친 문장들로 가득차 있지만 사실 그들이 요구하는 골자는 엄정수사와 관련자 처벌, 재발방지대책요구 정도의 온건한 것들이다. 학생들의 시국선언문은 지난주 문재인, 안철수 등 주요 야권 정치인들이 밝힌 입장에서 조금도 더 나가지 못했다.
그나마 국정원사건과 관련해 가장 높은 톤의 목소리를 냈던 것은 어제 있었던 재야인사들의 공동선언문이었다. 도종환 시인, 표창원 교수, 조 국 교수, 진중권 교수 등 학계와 재야인사들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은 "대선불복이나 정권의 정통성 부정의 불행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는 경고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국민들의 분노와 민심을 외면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어느새 '엄정수사'와 '재발방지대책마련' 정도가 국정원사건에 대해 현 정권의 책임을 묻는 상한선이 된 느낌이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6월 17일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미 1월부터 국정원관련 제보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이 있었지만 이미 문재인후보가 승복선언을 했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가의 안정을 위해 민주당이 자제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려 지금까지 자제해왔던 것이다"
정치공학적 계산이 깔린 발언이겠지만, 듣기에 참 고약한 궤변이다. 저 의원은 민주당이 국정원사건의 진실을 은폐(?)해온 이유로 '대한민국의 미래'니 '국가의 안정'이니 하는 황당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고 있다. 이 발언은 그들이 국정원사건의 진실을 두려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민주당의 지도부는 국정원사건을 열어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이 시대의 미덕인가? 어떤 주장이 현실에 여과되어 순화된다면 그것은 이미 타협의 산물이며 찌꺼기다. 진실을 밝히는데 역풍과 혼란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좋은 정치인이 아닌게 분명하다.
타협하지 않을 권리
나는 그리 과격한 사람도, 급진적인 사람도 못된다. 예전에는 거침없이 급진적인 주장을 펴는 진보주의자들이 낯설기도 했고 멋져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박노자 선생의 글을 읽으며 스스로 날을 세우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가만 보니 내가 제일 과격하다. 적어도 국정원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그렇다.
나는 이미 드러난 사실로만 봐도 현 정권의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재선거를 실시하는 게 순리라고도 생각한다. 그런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한들 내 주장이 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 불의를 승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지만 모두가 그런 타협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을 갖는다. 이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주장을 할 수 있다. 나는 내 주장을 현실에 여과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내가 가진 특권이 아니다.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그 권리를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 시사블로거 다람쥐주인님이 21일 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필자의 동의하에 소개합니다 - 편집자 )
|
첫댓글 진실 밝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