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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I. 머릿말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그 어떤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뚫고 들어와 일어난 실존의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문화속에 들어오셨듯(Incarnation),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아래 영향을 받?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접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역시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특수상황속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서구 교회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 교회와 그외의 나라의 선교활동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것을 다시 국내에 정착된 교파(Domination)에 촛점을 맞춰 심도 깊은 연구를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때(kairos)와 문화적 제약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살피고, 이러한 복음과 문화의 이중구조속에서 형성되어진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서구(유럽) 교회의 선교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서구형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파형의 미국적인 기독교와는 달리 국가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있어서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과 결속면이 강조되고, 따라서 공동체의 신학과 교회론적인 신앙의 의식이 훨씬 강했다.
이렇게 한국선교를 시도했지만 언제나 바닷가만 지나간 서구교회의 선교에 대해, 선교사들의 모습과 실패의 원인,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교사들
먼저 벧트브레(John.J.Weltvree)와 하멜(Handrik Hamel)은 서양의 사람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으나 한국의 기독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 바질 홀(Basil Hall)
1816년 서해안 측량을 목적으로 배를 탔으나, 그해 9월 1일 황해도 백령도, 청도 근방에 상륙하여 물품과 한문 성서를 나누어 주었고, 군산으로 가서 관리들을 만나 선물과 성서를 전했다. 전라도 다도해 근방을 10일간 순항하면서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다.
2) 칼 구츨라프(karl A.F. Gutzlaff)
프랑스 신부 바텔레미 브루지에가 최초의 한국 신부로 임명받던 1832년에 한 사람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도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의 이름은 칼 구츨라프이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으로 상로 탐색차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전(전)네델란드 선교회(The Netherland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서구교회의 선교사였다.
그는 모리슨의 영향으로 동양에 눈길을 돌렸고, 중국에 와서 사이암어로 신구약을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들러 충청도 홍천 길대도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었으나, 상륙은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안되어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했다.
그는 선교사다운 열의와 함께 상역(상역)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이양선(이양선) 문제에 대해서는 근대사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3) 로버트 토마스(Robert J.Thomas)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웨일스의 라야더 Rhayader, Radnoshire)에서 태어나서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ge
University of London)를 졸업하고,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한 상해의 런던 선교회 총무인 무어헤드(Wm. Muirheard)와의 불화로 선교사 사직원을 제출하고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 조선에 대한관심을 갖게 되고, 알렉산더 월리엄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에 서해안자라리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를 나누어준 뒤 북경으로 돌아간다.
얼마후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편승하여 1866년 8월 대동강입구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함으로 결국 모든 선원이 살해되고, 토마스 목사는 칼로 그를 치려는 사람에게 성서를 주려했으나, 받지 아니함을 보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순교하였다(1866. 8. 3). 토마스 자신의 행동과 선교방법론에는 엄연히 서구적인 교회신학이 그 기초가 되고 있었다.
4) 알렉산더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66년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한국인 상인들과 그리고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그는 토마스 목사 순교후에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만주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고려문에 와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성서를 팔았다. 또한 한국 선교에 대한 열의로 해서, 한국에 대한 서구 기독교 여러나라의 무력 간섭을 꾀하였고 그 무력의 시위로써 개국을 강요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5)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스코틀란드 선교사인 존 로스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1872년 만주에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때마침 의주 청년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를 만나 신문화를 가르쳐주고 한국말을 배웠다. 그들은 1875년에 성서번역의 대업을 착수했으며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1883년에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884년에 마태복음이 발간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다.
2. 실패원인과 의의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되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 이유는 서구형의 교회 생리가 기독교국(Christendom)의 관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 카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 두드러졌고, 그에 따라 시대적으로나 교회론적으로 조선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러모로 단절된 순수한 형태의 복음,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부흥회 타입의 교파적 교회에서 가능성이 열릴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을 가진다.
이렇게 한국정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성서를 보급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은 점에서 한국교회사 최초의 장(page)에서 길이 빛날 공헌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 서삼륜과 함께 한국말 성서 번역을 한 것과 그들과 관련된 한국인 전도자들을 한국 민족 교회사의 첫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III. 정착된 프로테스탄트교회 유형
1.미국 교파형 교회선교.
1) 미국 북 장로교.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중에서 처음으로 주재 선교사를 파송한 영예를 가진 교회는 미합중국 북장로교회 였으며, 한국에서 체재하면서 일한 최초의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알렌(Horace Newton Allen안련 1858 - 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1883년 10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지내던 중 중국 산둥성 주재 미국 선교사 레이드가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회고하자 한국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다.
알렌은 1884년 6월 22일 서울에 들어왔으나 선교사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미국 영사관의 공의로 일하면서 전도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민영익이 상처를 입었으나 알렌의 의술로 치료하여 왕실의 시의관으로 임명되고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정하게 되어 미국 선교사의 선교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후 1885년 4월 5일 복음 선교사로 언더우드가 들어오게 됨으로서 본격적인 선교가 추진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는 해방전까지 300명의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에서 장로 교회가 가장 큰 교세를 차지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2) 미국 남장로교.
미국 장로회의 외지 선교는 1861년까지는 단일 사명으로 추진되었으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장로회가 따로 조직됨으로 외지 선교도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외지 선교회의 목적은 '기독교의 전파와 교회의 조직'이라 하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8년 늦게 시작 되었다.
그것은 1891년 10월에 안식년으로 귀국한 언더우드가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선교를 위한 신학교 협의회에서 조선선교를 호소함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트(L.B.Tate), 존슨(C.Johnson), 레이놀즈W.D.Reynolds)등이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내한하였다. 이것이 남장로교의 한국교회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후 그들은 최초의 선교지부를 전주에 세웠고 1898년 목포에 지부를 세웠다.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 남서부지방은 사실상 한국에 온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남장로교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선교하였는데 해방전까지 178명이 내한하였다.
3) 미국 북감리교.
미국 북감리교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정식선 교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선교부 개설은 그보다 1달 늦게 내한한 스크랜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부인과 함께 왔다가 국내사정이 어수선하여 일본에 갔다가 두달 후에 다시 내한하여서 1886년 배재학당을 세우고 교육사업과 함께 성서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스크랜톤은 1885년 5월 3일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서 병원사업으로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 학당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을 시작한 공로를 세웠다.
4) 미국 남감리교.
남감리교의 한국선교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1887년) 후 미국에 유학하여 남감리회 본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했던 윤치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한국선교는 895년 10월 13일 중국에 있던 리드(C.E.Reid)가 내한 함으로 결실을맺게 되었다. 남감리회는 서울과 개성 및 춘천 이북의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2. 그외 교파형 교회의 선교
한국선교에서 비록 미국계의 교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이해에서 교파적 형태의 신학을 취하는 교회의 선교가 여럿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교회는 다음과 같다.
1) 호주 장로교.
미국에 이어 그 다음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한 선교회로,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해외 선교회였다. 1889년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목사와 그의 누이동생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열은 왕성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삼아 선교하면서 한국선교에 체계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너무나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이 무리가 되어서 병약하던 중 아깝게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입국한지 1년이 되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호주 전체 장로교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한 열기가 높아져 이후 해방 전까지 77명이 내한하여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호주교회는 경남지방에서 농촌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2) 영국 성공회.
영국 성공회(The sowety for Propaagation of the Gospel in Forign parts 약칭 S P G) 는 영국 해군 군목이던 코르프 (C.J.Corfe) 신부를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한국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9월29일 내한함으로 성공회의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성공회의 한국에서의 첫 교회는 1891년 5월 17일에 서울 충무로(지금의대연각 건물이 있는 지역)에 선교본부와 함께 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부활의 집"이라 하고 공동생활을 개시했다.
초기의 선교방법은 엄격한 청빈과 기도생활을 하면서 서울과 인천에서 의료사업과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 및 출판을 통한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동시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성서 번역사업도 연합적으로 진행시켰다.그리고 선교초기부터 성공회는 한국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 내리려는 열망으로 "토착 "에 힘썼으며, 한국학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14년 4월에와서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기관인 성 미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5년 12월 21일에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김희준씨가 서품되었다.
3)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의 한국선교의 시작은 특수했다. 캐나다인으로서 처음 한국에 온사람은 맥캔지 목사 (William John McKenzie, 1861 - 1895)였으나 그는 그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한 열정의 청년이었다. 1893년 12월에 오직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안고 선교회의 배경 없이독립적으로 선교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몇달을 보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가서 한복을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례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청일 전쟁을 앞둔 시기에 그는 한때 일본을 위한 정탐군으로 오인되어 신분이 위태로워진 사건도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다. 맥켄지 목사가 가는 곳곳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한 다음에 다른집과 구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한국 북부지방에서 십자가 표식으로 교회당을 구별하는 방법이 퍼진 것이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성심성의껏그리스도를 전한 생활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그는 너무나 피로한 몸에 일사병까지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895).
이 죽음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정식 한국선교를 결의하였고 이에 1898년 9월 그리이슨(R.Grierson), 푸트(W.R.Foote), 맥레(D.M.Mcrae)
등이 내한함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1925년 본국에서 감리교회등 다른 교파등과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회가 된 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의 활동무대는 함경도와 간도지방이었다.
4) 침례교회.
침례교회의 한국선교는 펜 위크(Malcolm C. Fenwick)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Toronto) 출신으로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아무런 선교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자격으로 왔다(1889년). 그는 서울에서 10개월 정도 우리말을 공부하고는 황해도 솔내에서 자리잡고 그 곳 주민들과 의식주를 같이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많은 개종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도에 힘쓰다가 재정문제로 한국선교를 중단한 미국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흡수 하였으나, 이 지역(충청도 일대)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토인 한국사람들 자신이 지도하도록 하였다. 펜위크는 경험을 통하여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보다는 본토인 한국 사람들 자신에 의해 증거되어야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 러시아의 동방 정교회.
1898년 1월 암브로시 신부가 내한하여 러시아 공사관 안에 성당을 마련하 고 선교를 시작했으나 공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소극적 종교행위에 국한 되었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까지 확장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노일 전쟁(1904 - 5)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본국 귀 환을 거부한 선교사들에 의해 정동에서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본국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남으로서 러시아 정교 회의 한국선교는 사실상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널리 시베리아 쪽에서는 가난 때문에 이민간 숱한 우리 조선 사람 들이 러시아의 동방정교회에 입교하고 있었다. 얀치히(Yantchihe)라는 마을 에서는 4백여 가구가 교회에 등록하고 있었으며 우리네 가난한 이주민들은 제정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교회에 입교해서 그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자 한 동기는 비탄한 것이었다.
6) 구세군.
민중 지향적 교회인 구세군은 1908년 10월에 영국인 선교사인 허가두 (R.Heggard) 정령이 그 일행과 함께 서울에 와서 서대문 평동 96번지(지금 의 고려병원 뒷쪽)에 자리 잡음으로 그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노 방에서 전도하고 옥내집회는 허가두의 집에서 보았으나, 참가인원이 늘어남 에 따라 한달 후 부터는 지금의 구세군과 새문안교회 중간에 서울 1영(교 회)을 개척하였고, 이어서 12월에는 서울 제 2영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군복차림으로 노상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을 모은 다 음에 열심으로 전도하였다. 한일 관계가 험악한 그 시절에 군복 차림 때문 에 오해를 받아 종종 변을 당하기도 하였고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1909년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주력을 하였으며 1910년에는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본영(본영)을 확립하였고 구세군 본 래의 사명인 빈곤과 사회악을 제거하는 일과 또한 복음의 전달을 위하여 적 극적 공헌을 사회를 위해 남기기 시작하였다.
7) 성결교회.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었다. 다만 초교파적 인 동양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경화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성 결교는 1907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두 선교사, 즉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상준과 정빈은 일본 동양선교회(The Orient Missionary Society)가 경영하는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무교동에 집 한채를 매입하여 복음 전도관을 개설하여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교파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악대를 동원 한 노방전도와 호별방문을 통한 전도로 얻은 결신자들을 인근 교파 교회로 인도하였다. 1901년 일본에서 설립된 동양선교회는 그 설립목적을 동양지 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전도표제로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하였다. 이 전도표제는 매우 간결하여서 대중전도 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마찬가 지로 성결교 선구자들도 그런 정신으로 전도만을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러 다가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한 정도로 신도의 수가 확장되자 교단을 형성하 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9월에는 정식적으로 성결교라는 이름을 사용하 였다. 김상준과 정빈이 무교동에서 전도하기 시작한지 3년만에 영국사람 토마스 (John Thomas)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1921년 9월 동양선교회 창설자 길 보른(E.A.Kilborne)이 서울에 머물렀다. 특히 길보른은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하여 감독제에서 고문제로 바꾸어 발전을 꾀하였다. 최초의 고문은 이명 직, 이명헌, 부릭스부인등 세명이었다. 이들은 1911년 3월 서울 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을 세워 교직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22년 축호전도 를 경상남도에서부터 함남 혜산진에 이르기까지 실시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 시켰다.
8) 일본교회.
한일합방을 전후로 하여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한국에 진출해 있 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이고, 둘째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이다. 당시 일본의 3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조합교회, 일본 메도디스 트 교회, 일본 기독교회가 전자의 경우인 한국내 일본인을 위한 교회설립 및 전도활동을 모두 추진하였다. 그러나 후자인 한국인 전도는 일본 조합교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한국병합이 노골화되면서 합병이야말로 한일 양국국민의 행복을 누리는 유 일한 길이며 이것을 '조선전도'의 기본정신으로 삼았다던 일본 조합교회내 의 극우파 에비나, 와다세는 1909년 4월 내한하여 한국선교 기틀을 잡았고 1911년 와다세의 한국 진출로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선교가 실현되었다. 조 선 총독부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추진된 조합교회의 한국전도는 1919 년 이후 조선 회중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되기 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였 다. 이 외에도 1910년 이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그 리스도의 교회,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등과 반선교사 운동으로 이루어 진 한국교회라 할 수 있는 자유교회, 자치교회, 하느님의 교회 그리고 한국 적인 신앙의 유산으로 이루어진조선 기독교회, 조선 복음교회, 예수교회 등 도 각기 교단 조직을 갖추고 해방전 복잡한 개신교회 종파의 한 부분을 차 지하였다.
3. 1907년 대 부흥운동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구현한 대전환기적인 위치에 서있다. 특히 민경배교수는 1907년의 대 부흥은 신앙의 내연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외연 참여하게 된다는 신앙의 원형이 설정된 해로서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전환기라고 강조한다.
1) 원인
1895년 이후 한국교회내에 진행되는 민주주의적 자각과 그것을 믿고 나 가는 교인들을 향해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교사들이 외치게 되자 교회는 선 교사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을 뿐 아니라 일부에서는 '반역자' 구실까지 한 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좌절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국가의 비운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과 만약 선교사들 이 계속 비정치화를 외칠 경우 오는 후유증을 염려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도를 통한 '성령의 힘'만이 해결점이라고 믿은 원산의 '하디'선교사는 선 교사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고 여기서부터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렇 게 볼 때 1907년의 부흥운동이 외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내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경건주의적 신앙형태를 고수하기 위한 정교분리의 비 정치화가 근본 원인이다.
2) 결과 및 평가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 결과가 평가되어 질 수 있다. 첫째, 외적으로는 내연적인 신앙이 갖추어지면 그에 따른 외적변 화는 자동으로 수반된다는 신앙의 원형설정과, 둘째는 좀 더 깊은 내적의미 로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비정치화로 인해서 민족교회로서의 전통 약화이 다. 이때의 부흥회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신앙 유형은 '부흥회적 열정'으로 특정지워지며, 미국 선교사들의 전 천년왕국설에 근거한 종말적인 타계지향 의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4. 한국내 프로테스탄트의 교단 형성 과정.
위에서 1910년 이전 국내에 선교를 개시한 각 교파 선교를 간략하게 살 펴 보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내에 들어 온 개신교회는 철저한 교파형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종 교파 선 교부들이 다른 교파 선교부들과의 연합이나 대화 없이 독자적으로 한국선교 를 실시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교파적 종교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 개신교회는 그 초기부터 선교 의 주체가 되는 선교부 및 선교사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는 교파형 교회로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선교작업의 연결에서 교단형성도 이루어지 게 되었다.
1) 장로교.
한국에 선교한 장로교회는 미국의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 일리아 장로회의 4개 장로교회였다. 이들 네 장로교회는 본국의 해외선교부 조직 밑에 한국선교회(The Korea Mission)를 두어 선교사업을 추진케 하는 한편 한국 안에서의 다른 선교회 선교부와 연합전선을 펴 나갔다. 1889년 이같은 장로교 선교부 연합조직이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북장로회 선교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가 연합하여 <미국 북장로회선교 및 빅토리아 선교 연합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약칭 장로회 공의회로 알려진 이 조직의 초대 회장은 헤론이었고, 서기는 데이비 스였다. 약칭 장로회 공의회는 1890년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자연 폐지되었 고 1893년에 이르러 남장로회 선교회와 연합하여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 공회>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의 설립목적은 "조선지에 갱정교신경 장로회정치를 사용하는 연 합교회를 설립" 하는데 있었다(조선지 갱정교신경 장노회정치 사용 련합교 회 설립). 처음에는 미국의 남북장로교 선교회만으로 이루어졌으나 캐나다 장로회 및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에서도 가입하게 됨으로 명실공히 선교연합 협의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 정치적 기능은 사실상 없었다. 이 조직이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되기는 1901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로 조직을 확대하면서부터 이다. 이 공의회는 비로소 한국인도 그 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01 년 초대 공의회 회원에는 1900년 장로로 안수받은 김종섭과 1910년 장로 안 수를 받은 길선주 방기창, 한국인 조사 6명이 참여하였고 선교사는 25명이 었다. 이 공의회는 다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구분되었고 교회자치권은 <영어를 사용하는 회>에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공의회 안에 두 종류의 소회를 두어 가던 중 먼저 오스트레 일리아 장로회에서 모든 선교회를 통괄하여 처리할 수 있는 자유 장로회 설 립을 건의하여(1902), 이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준비작업을 거쳐 1905년 각 선교회는 본국 교회에 독립된 하나의 장로회 설립을 요청한 바 각 선교 부는 <조선연합 자유 장로회> 설립을 승낙하기에 이르렀고, 1907년 마침내 한국인 7명이 목사로 안수받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 (일명 독노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독노회는 1912년 7개 노회로 발전 분립되면서 비로 소 교단조직이랄 수 있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된 것이다.
2) 감리교.
감리교의 경우는 장로교보다 훨씬 늦은 속도로 교단 형성이 이루어졌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선교회> (The Korea Mission)를 통해 선교 및 치리기능을 행사하였고, 이것이 1905년에야 <한국 선교회> (The Korea Mission Conference)가 되었으며, 1908년 비로소 <조선 연회> (The korea Annual Conference)가 되어 사실상 독립된 교회 정치체제 를 갖추었다. 남감리회는 1897년 한국선교를 개시하면서 <한국선교회>를 조직하여 중국 연회의 관할 하에 두었고, 1914년 비로소 <조선선교연회>가 되었으며 1918 년에야 <조선연회>가 되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공식적인 선교회 연합기구는 갖지 못하고 있었으나,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던 남북 감리회는 1924년부터 두교회 합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1930년 12월, 마침내 통합된 교단 조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라는 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3) 성결교.
교회조직보다는 순수한 전도에만 주력했던 '동양선교회'는 조직없는 선교 단체가 크게 성장할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1년까지의 15년간 교회수는 불과 33개 밖에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양선교회의 탈 바꿈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동양선교회는 그 이름을 1921년 9월 에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고 길보른 총리가 한국 감독 과 경성성서학원 원장직을 겸직하면서 본격적인 교회조직을 하게 되고 교리 도 확장하게 된다. 1929년 감리교회 조직을 본 딴 <조선연회>를 다시 1933 년 4월에는 "조선성결교회총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4) 침례교.
펜위크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는 1906년 미국북침례교의 엘라딩 기념선 교회의 사업을 인수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이 교 단 이름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하고 1933년에는 다시 "동아기독대"로 바 꾸었다가 1940년에는 "동아기독교"로 변경시켰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 가 전국을 그들의 선교지로 분할하자 펜위크는 "대한기독교"의 선교지역을 국외로 과감하게 옮겼다. 그리하여 그는 만주일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몽고 에까지 선교한 것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동아기독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이 지 않았으므로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교단은 강제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에는 1949년 총회에서 미국 남침례교와 관계를 맺고 비로소 그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라 고치면서 침례교단으로 출 발하기에 이른다.
5) 그 밖의 교회들.
구세군은 1910년 10월 한국인 21명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으로 처음 임관됨으로 구세군 총회를 그해에 조직할 수 있었다. 1918년부터는 구세군 특유의 사회 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주로 본영보조와 독지가들 의 헌금과 그리고 정부의 보조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12월부터 유 명한 "자선남비"가 등장한 것이다. 1928년 시작된 자선남비 전통은 우리나 라 뿐만 아니고 구세군이 있는 나라마다 계속되고 있다. 성공회는 선교시작 때부터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로 코르프 신부를 임 명하였고, 처음 선교 시작할 때에는 <대영종고성교회(대영종고성교회)>란 조직하에 선교하다가 후에 <조선성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성미 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6년 5월에는 교구회가 조직되고 조선성공회의 기본교리와 전례에 관한 선언이 있었고 헌장 법규도 제정하였다. 1941년 외국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로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세시 주교의 귀환으로 조선성공회가 재건되었다.
5. 프로테스탄트의 성공요인과 정착의 문제점.
1) 정착의 성공원인 시기의 적합성 (갑신정변, 문호개방, 청일전쟁)
1876년에서 부터 1896년간의 우리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예로 1882년 에 임오군란, 1884년에 갑신정변, 1894년에 갑오경장, 그리고 동학혁명, 청 일전쟁(1895)과 민비시해사건, 1896년의 아관파천과 같은 해의 독립협회 창 립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시련 후에 대권을 잡은 대원군이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민 비정권은 일본의 무력하에 타율적인 수호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1876년 강 화조약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 리고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과 청일전쟁으로 인한 서양문물의 우수성 입증등은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 좋은 외적인 요소들을 제공하였다고 할 것 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진공상태 이 당시 개신교의 정착의 성공의 원인 중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요인 이 한국인의 종교적 상태인 것이다.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심 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국 역사를 통해 한때 전성했던 선(선)이나 불교 및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하고 그 형식과 명분으로만 되풀이 되던 근대는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없는 진공기라고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정책 개신교 선교사들은 과거 카톨릭교회 선교 전래시의 박해 상황을 잘 알 고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확장을 위하여 자신들이 카톨 릭교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교분리 정책을 표방하게 된다. 물 론 이들의 정교분리정책은 카톨릭의 상황을 고려한것 외에도 이미 자신들이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경건주의적인 신앙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 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이러한 정책은 당시의 집권자들에게는 안심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성서번역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은 압도적으로 성서의 전파와 연결되어 있 다.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인천에 상륙할때 이미 한국어로 번역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은 '이수정'이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세례를 받고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복음서를 번역하여 1885년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가 요꼬하마의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일천부 간행된 것 을 언더우드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또한 만주에서도 이미 존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성서 를 번역 간행하여 전파하여 언더우드가 왔을때 이미 서상륜이 번역된 성서 를 전파하고 다녔으며,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들어 온지 얼마 안되어서 세 례를 베푼 사람들이 이미 성서의 교훈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 는 뜻깊은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2) 정착된 프로테스탄트 유형의 문제점
교파 중심 및 교파이식 이는 처음부터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교파 교회라는 특수한 조직과 제도가 신앙보다 중요시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 고,다른 하나는 서구교회의 배경에서 생성된 특수교단의 이식 때문에 자립 적인 민족 주체적인 신앙형성이 위축되고 따라서 이질적인 사회배경의 작용 요소들이 생소한 토착교회에서 빗나가 구속할 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의 상황만은 아니다. 아시아 교회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대하여 강근환 박사님은 서구의 교회들이 교단적인 선교업적 에 급급하여 선교지에서 서로 헐뜯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분열을 초래 했으며,특히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신학의 결핍성 한국교회의 병폐라고 지적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유산인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축자영감설을 바탕으로 하는 청교도형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다. 즉, 이것은 근본주의라는 특수성으로 비롯된 것으로, 신학의 부재를 야기시키게 되었다. 교회론적인 측면에서의 문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앙공동체이다. 그러나 초기 교회 의 교인의 입교동기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지향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측면과 아울러 기독교문명이라는 거대한 힘을 빌리고자한, 정치나 개화에 목적을 두었던 부수적인 동기도 동일하게 작용하였다. 곧 성서 신앙과 함께 개화 지향 정치 구원이 그것이었다.
IV.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
앞에서 이미 보았듯, 유럽교회는 스쳐만 갔고 미국형 교파 교회만 정착되 고 말았다. 따라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형태는 당연히 미국적 교파형 교 회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그들의 생리가 한국인의 심성에 투영되었다.
1. 이기적인 개인주의적 신앙형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19세기 말의 근본주의 신학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경건주의, 복음주의, 내세 지향적 신앙을 소유했다. 물론, 이러한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신학의 부재, 교회론의 약화, 사 회부재의 영혼구재, 정치무관의 정숙주의, 합리성의 결여, 그리고 이원론적 신앙의 전제자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은 기복주의적 정서를 많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 본 래의 정신적 유형과 많이 상통했고, 세상에 어울릴 수 없었던 정신적 귀족 성의 형이상학적인 기질에 신통하게도 호소력을 가지고 있어서 잘 부합되 었다. 즉, 그들의 부정적 요소와 우리 한국인 심성의 부정적인 요소가 상합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형태는 초기 선교사들의 puritan적 신앙형태와 한국인들의 이원론적 사상과 맞물려서, 공동체 의식 을 상실하고 자기 중심적인 기복신앙이 출현하게 되었다.
2. 타계주의적 신앙형태.
한국 개신교인들의 경건성은 선교사들의 신앙성격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경건성은 1907년을 기점으로 타계주의적 성향을 띠게되는 계기를 마 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앞에서 언급된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의 비정 치화 또는 정교분리 정책에 의해서 교회를 사회 내지는 국가에 대한 관심으 로부터 멀리하게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또 하나의 영향은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에서 부터 초래 되었다. 그 중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데 '자립, 자치, 자 급'의 3대 원칙을 중심으로 차세적 생활에서 탈피하여 일상생활에서 구체적 으로 실천하는 참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현실 도피적인 현상을 초래한 것이 이 정책의 阮÷潔駭? 결과적으로 교인들은 개체교회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됨으로 그들의 신앙성격은 다분히 개인주의 적인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
3. 율법주의적 권위주의.
개신교가 이 땅에 소개될 당시, 사상적으로 볼때 우리나라를 지배한 사 상은 유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사서삼경)을 암 송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요, 정치의 이상이며, 실천도덕의 최종 목표로 여겼다. 즉, 이들은 인(인)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보 다 형식에 치우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 의 바탕이 되었던 Puritanism의 율법주의와 부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의 정신보다 문자에 집착하여 여자적(여자적)으로 해석된 율법의 원리와 실 행에 지나치게 의존하므로, 내용보다는 형식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율법주 의적 권위주의 신앙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V.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서구교회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 교파형 교회와 그외 교 파형 교회 그리고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한반도에 정착되어진 교단을 중심 으로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착유형에 관하여 대략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복음전파가 가능하기 까지는 초대교회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었던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한민족 에게도 동일하게 무르익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곧 갑신정변, 문호개방, 청일전쟁의 시대적 여건과 그 당시 한국에서 성행 했던 선(선)이나 불교, 유교의 정신적 고갈로 인한 종교적 진공상태, 그리 고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착과정에서는 신앙보다 교파의식 이 중요시되고 선교사들의 신앙적 배경으로 인한 신학의 부재성 , 그리고 진정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의 약화라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민족에게 투영되어지고 형성되어진 신앙의 유형은 이기 적 개인주의적 신앙, 타계주의적 신앙, 율법주의적 권위주의적 신앙형태로 나타났다. 우리는 지난날 한민족의 교회사를 복음과 문화라는 이중구조의 견지에서, 과거를 현재를 푸는 열쇠로, 온고지신(온고지신)의 지혜를 배워 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