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435-14의 조각공원,
애기봉 전망대 가는길.(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 59-13)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민족의 현장,
거동이 불편해도 쉽게 오를수있게 만들어 놓은 계단길.
행주대교 남단에서 78번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전망이 탁 트인 곳을 만나게 된다.
바로 김포 애기봉전망대다.
애기봉은 서울에서 서측방의 최북단인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해발 154미터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애기봉은 북쪽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이곳에 오르면 1.8킬로미터에 거리에 위치한 북한 개성시 판문군 조강리 일대를 최단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
때문에 국민 안보 관광지로써, 또한 실향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23킬로미터 떨어진 개성의 송악산도 볼 수 있다
그리움으로 손꼽은 만남의 약속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애기(愛妓)다.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인조 14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선봉은 마부태였다. 마부태는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밤낮을 달려 10여 일 만에 한양에 첫 발을 디뎠다. 인조는 왕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가 성을 포위 압박하고, 각지의 근왕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삼전도에 나가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싸움에 이긴 청군은 수많은 사람을 인질로 잡아 돌아갔다. 평양감사 아무개도 그중 하나였다. 평양감사는 인질이 되어 잡혀가는 왕세자를 시중하며 모진 바람을 헤치고 심양으로 끌려갔다. 애기는 평양감사의 사랑하던 애첩이었다.
청국으로 끌려가기 전날 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로 이별했다. 애기는 나를 두고 어딜 가냐며 통곡했다. 차라리 함께 가든지, 나를 죽이고 가라고 매달리는 애기를 평양감사가 타일렀다.
“내가 가지 않으면 함께 잡혀가는 세자마마를 누가 돌볼 것이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야 한다.”
애기가 대답했다.
“나라의 일에 어찌 아녀자가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겠습니까. 단 한 가지 약속만은 꼭 지켜 주십시오. 반드시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암, 약속을 지키고말고.”
그날 두 사람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결국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말았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지금의 애기봉) 정상에 올라 님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님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고, 기다리다 지친 애기는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죽기 전 애기는 유언을 남겼다.
“님이 오시는지 볼 수 있도록 내 시신을 바로 세워 북녘으로 묻어 주오.”
애기의 유언에 따라 동네 사람들은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愛妓峰)이라 불러왔다. 1968년 애기봉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기의 한(恨)과 가족과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한이 같다고 하여 ‘애기봉’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그래서일까? 매년 추석 때면 이곳에는 가족과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찾아 조상들에게 제를 올리고 통일을 기원한다. 예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라 하겠다. 퍼온글.
전망대에서 북한의 실상을 바라볼 수 있는 민통선 구역이다.
남,북이 구분 되는것은 산을 보면 확실히 알수있다.
북한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다.
북한쪽 임진강(예성강)과 남한의 한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 나가는 두물머리.
전망대에서 북한마을 약 600~700m
서울 올림픽도로->행주대교->제방도로->태산 가족공원->출입 검문소에서->1.5km휴계소 주차장->100m지점 서울에서 승용차로 40분거리
애기봉 은 북녁땅과 한강을 경계삼아 강화 대교 못미쳐 한강 임진강 물이 섞여 흐르는 분단의강
유휴히 흐르는 강 기슭 건너편에 눈 앞에 보이는 북녁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단거리(약600m) 전망대로서 병자 호란때 평양감사와 애첩인 애기와의 슬픈 일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애기봉" 이라 정식 명 하였고 선전마을은
1960년대 흙벽돌과 스레트로 지은 북한의 전통적인 촌락 마을로서 집단 농사를 짖는것을 망원경으로 한눈에 볼수있다.
마을 주민들은 앞의논과 뒤쪽의 과수원을 경작하여 당에 상납하고 배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는 문구도 있다
1982년도에 북한당국이 우리 북한인민들이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전용 위장마을.애기봉을 찾는 방문객이 알게 됨에따라 90년도에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지금은 건물의 70%만 거주한다는 안내가 있습니다..
몇 백 년을 기다려온 애기와의 만남
“애기, 애기는 어디 있는가? 내가 왔소. 내가 돌아왔소.”
남자의 목소리가 애기봉을 메아리친다.
“저, 여기 있어요.”
남자를 발견한 애기가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안긴다.
“왜 이제야 오시었소?”
애기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흐느낀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남자는 변명할 틈도 없이 애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두 사람은 조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자리를 옮긴다.
“저기 좀 보아요.”
여자가 아득한 북녘 땅을 손가락질한다.
“저곳이 송악이군요?”
“그렇지. 조금만 더 올라가면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던 평양이오.”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죠.”
“그렇소. 통일이 된다면 당신과 다시 만나질 수 있겠지만.”
남자가 애기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꼭 껴안는다.
애기는 헤어지던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해야 했던 순간, 차라리 애기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믿고 매일같이 애기봉 정상에 올라 멀리 북녘을 바라보았다.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영혼은 애기봉을 떠나지 못하고 애타게 남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군하리에서 택시로 10여분 거리 30분간 다 돌아보는 조건으로(애기봉 주차장에서 대기) 왕복 료금 15.000원
다시 버스로 강화도에서 점심을 먹고 마니산을 가려고 했다가 내일 산행을 생각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 순무를 7개(5.000원).
순무는 생으로 먹는게 맛이 좋았는데 김치로는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