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진족의 나라「金」의 기원과 흥망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을 지칭하는데, 시대에 따라 중국 사가들은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나라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代에는 말갈(靺鞨), 송·명代에는 여진(女眞), 청代에는 만주족 등이었다.
6세기말 수·당시대 이후 만주지역 주민들은 말갈로 불리웠다. 속말·백산·백돌·불열·호실·흑수·안차골 등이 큰 부족이었으며, 이중 속말·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후에 발해를 구성하고, 흑수부족은 발해북부지역에서 발해에 대항하다 발해 멸망 후 거란에 복속하여 여진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대체로 발해 멸망 후 그 지역은 여진으로, 살던 사람은 여진족이라 불리웠다. 여진은 10세기초 이후 요나라(遼: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遼의 호적에 편입된 요양 일대(요령성) 부족은 숙여진, 편입되지 않은 송화강 이북(흑룡강성) 및 두만강유역(길림성) 부족은 생여진이라 불렸다. 이 시기 200년간 여진은 역사에 눈에 띠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12세기초 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생여진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영걸 아골타(阿骨打)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금나라(金)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금태조 아골타는 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고 1120년 宋과 동맹을 맺은 후 만주에서 遼를 쫓아내고 북경까지 진출했다. 1125년 2대 태종때 마침내 遼를 멸망시켰다. 金은 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이었던 宋과 마찰이 일어나자 1127년 宋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황제를 사로잡고 宋을 강남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金은 만주·내몽골·화북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1153년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천도하여 중국 중심부를 장악했다. 남쪽으로 간 宋은 이후 南宋으로 이어지면서 金의 신하국이 됐다. 12세기 말 전성기를 구가하던 金은 남송·서하·몽골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1234년 몽골과 남송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금나라 지도와 금태조 아골타
2. 금나라시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흐름 金은 발해멸망(926년)후 약 90년이 지난 1115년 발해영역에서 건국해서 120년간 존속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는 宋(960~1126)·南宋(1126~1279), 만주·몽골·화북지방에는 遼(916~1125), 한반도에는 高麗(918~1392)가 세워졌다. 이 시기는 돌궐족(투르크)이 위구르에 멸망 후 서진하여 셀주크투르크를 건국했던 때다(1037~1194). ① 여진(金)-거란(遼)의 관계 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지역에 있던 여진은 여러부로 나뉘어졌지만 대체로 거란과 속국관계에 있어 거란의 착취와 여진의 반발이 이어졌다. 아골타는 金을 건국한 후 遼에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만주각지에서 遼를 격파했다. 이때에 宋과 金은 요나라 협공을 위한 조약을 맺었다. 金은 遼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상경·중경·서경을 함락하고 수도 연경에 입성(1122년)한 후 1125년 부패로 국력이 쇠잔한 遼를 멸망시켰다. ② 여진(金)-宋의 관계 宋은 거란과 대치하는 가운데에도 여진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지속했으나 여진을 큰 세력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아골타 등장 이후 강성한 金이 遼를 격파하고 만주를 장악하자 宋은 과거 거란이 차지한 연운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들고 나왔다. 金과 宋이 연합하여, 金은 長成以北의 중경을 차지하고 宋은 長成以南의 남경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金은 대군을 동원하여 遼를 전면 공격했으나 宋은 출병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금태조는 이에 대해 대규모 배상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남진정책의 빌미를 얻게 됐다. 1125년 金은 宋을 공격했다. 宋은 나약하게 대항하다 모든 방어기회를 놓치고 1127년 왕실이 포로가 되면서 멸망했다(정강의 변). 그러나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 살아남아 남경에 도읍하여 이후 南宋으로 이어졌다. 남송시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지속됐다. 남송은 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출한 장군 악비를 모함 끝에 처형하는 등 국력을 낭비한 끝에 1141년 金과 화의하고 종속됐다. ③ 여진(金)-고려의 관계 당초 여진은 고려와 거란에 귀속하였으나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 했다. 고려와 여진은 두만강변 등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윤관은 金 건국 이전인 1107년 천리장성을 침입하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金 건국후 遼가 멸망하고 金이 만주를 차지한 후에는 金과 고려 사이에 긴장과 마찰이 생겼으나 金은 거란을 무력 정복한 것과 달리 고려에 대해서는 회유의 방법으로 접근했다(요동사, 김한규). 金과 고려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金나라를 정벌하자는 서경천도운동을 일으키나 김부식의 관군에 진압된 이후 金과는 큰 전쟁없이 사대관계를 지속했다.
3.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한민족의 관계 고조선 이래 만주에 거주하는 다수 주민은 조선민족이었다. 부여, 고구려도 그러하며 발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이들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가 멸망한 이후가 문제다. 발해 멸망후 그 지역과 사람들은 여진(족)으로 불리웠으며, 여진인들이 金을 세웠다. 그러면 金나라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900년대 들어서까지도 金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에서 다루었다. 「신단민사」(1923, 김교현)에서는 발해·遼·金·淸까지 포함해 민족사의 흐름을 밝히고 있고, 「배달민족정사」(신태윤, 1928·1945)에서도 遼史·金史·淸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민족정사」(윤치도,1968)에서는 제6장 남북조시대사의 제1절 北朝史에서 발해사·遼朝略史·淸朝略史를, 제2절 南朝史에서 고려·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유기」(권덕규, 1941)·「조선사」(권덕규, 1945)및 「조선역사」(세창서관 편집부, 1945)에서는 朝鮮歷代傳受圖에서 고조선으로부터 韓(마한·진한·변한 →백제·신라·가야→신라·고려·조선), 夫餘(북부여·동부여·북옥저·동옥저→고구려·발해), 肅愼(읍루-물갈-말갈, 여진→금·청)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쓰고 있다. 여진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할 기록이 있다. 「金史」는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했다”고 썼다. 또 금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로 고려에서 왔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고려에서’라는 표현은 다른 역사서나 신라·고구려의 구별이 잘못된 사례 등에 비추어 볼 때 신라인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金志, 大金國志, 三朝北盟會編 등은 초기 여진 추장이 신라인이라 밝히고 있다. 고려사 등에서는 이를 김준이라 전한다. 종합하면 신라유민이며 신라종실인 권행(權幸:본명은 金幸)의 둘째아들 김함보(=김준)가 여진 완안부의 추장이 되어 주변을 통합해가다 흑수말갈까지 장악하고, 이에 발해유민이 가세하여 건국한 것이 金이다. 즉 金은 지배층인 황실은 신라계 유민의 후예며, 발해인들이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여기에 흑수말갈도 구성원이 된 국가인 것이다. 여진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고구려·발해 등 한민족국가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우리와는 형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후 고구려 유민이 건설(698)한 나라이고, 신라 멸망(935)후에는 신라유민들이 발해땅(926멸망)으로 다수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金이다. 金은 宋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고려와는 대체로 큰 전쟁없이 형제국가로 지냈다. 여진은 金 건국전에는 고려를 부모나 형으로 여겼고, 金 건국후에는 스스로 형이라 칭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도 많은 여진인이 귀화했고 통혼도 했는바, 이는 서로 남이 아니라는 역사적 인식의 공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여진은 만주에서 일어나 걸출한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단기간내에 대통합국가를 건설했고, 중원까지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다. 현대의 기적을 일구어 낸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목이 여진史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