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족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이 공사를 시작한 지 144년 만인 2026년 완공될 예정이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대표작으로 ‘가우디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뒤에도 언제 끝날지 기약없는 공사가 진행됐다.
성당 건축 책임자인 조르디 파울리는 “가우디가 사망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26년 공사를 끝낼 것”이라며 “현재의 속도를
유지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재단은 완성될 성당의 가상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성당 일부는 2010년 11월 미사를 위해 개방돼 개관식에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단다.
성당은 고딕과 아르누보가 조화된 독특한 양식과 어마어마한 규모로 완공 전에 이미 세계적 명물이 됐다. 관람객 연인원은
약 3000만명으로, 건설의 주요 재원인 입장료 수입이 연간 2500만유로(약 363억원)에 달한다고...
미완성인 채로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성당 지하로 가면 납골당에 가우디의 유해가 있다.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승화된다. 1883년 가을. 교회 감독직을 수락하고 사망할 때까지 40년간 건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작업에 몰두했다. 그가 가진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 그리고 종교적인 신성이
함께 피워 올라 성가족성당을 탄생시켰다.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평소처럼 저녁 산책에 나섰다가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성가족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Antonio Gaudíy Cornet.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 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