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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라비아에서 10년 정도 살면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본다. 우스운 일, 희한한 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아직도 그곳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기억나는 대로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제는 자국인 조종사로 차츰 교체하고 있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전문 기술 부족으로 미국인이나 유럽인 조종사들을 기장으로 많이 고용했었다.
미국에서 비행기로 떠나 13시간던도 지나면 사우디 제다 공항에 도착한다. 비행기 착륙 전 기장이 기내방송을 한다.
"여러분, 사우디아라비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 현재 시간은 밤 11시 35분이며 기후는……. 여러분들은 시계를 8시간 뒤로 돌려주시고, 생활방식은 500년 뒤로 돌려놓으시면 되겠습니다.”
정말로, 장난꾸러기 기장이 영어로 기내방송을 그렇게 했다고 함께 비행을 했던 남편의 증언이다. 영어를 알아들은 사람들은 죄다 웃었을테고 물론 아랍어로는 통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 공항에서 비행기 탈 때에 일반 옷을 입었던 아랍인 여자들은 까만 가운에 까만 머리수건을 두르고 남자들은 흰옷에 흰 두건으로 모두들 변복을 한다. 외국인들 중에서도 더러 옷을 바꾸어 입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입국할 땐 별 탈이 없었는데 한번은 큰일이 있었다한다. 사우디를 경유해서 유럽 어디로 가는 어느 비행기가 한 시간 정도 거기서 주유를 하며 대기한 경우였다. 사우디를 입국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사전지식이 있어 옷차림을 무난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통과 여객들은 못 들어서인지 아니면 무신경인지 늘씬한 미녀 셋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공항안에 있었다한다.
갑자기 나타난 빨간 수염 밀가루 푸대들이(종교경찰들은 수염을 빨갛게 염색한다) 미녀들의 다리를 막대기로 마구 때리면서 아랍어로 떠들어댔다.(종교 경찰들이 영어 쓰는 걸 못 봤다.) 이 유럽 여성들이 깜짝 놀란 데다 화가 나서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자리에서 대판 싸움이 나고 비행기는 떠나는데 이 세 여자는 감옥행(진짜임),
물론 다음날 비행기로 떠나기는 했지만 이게 무슨 헤프닝이란 말인가.그 나라의 풍습을 어긴 승객들도 문제겠지만 승객들을 격리수용했다가 보내든지 아니면 국제공항의 특성상 이해를 해주든지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여자들을 위해 준다는 그들의 방법은 우리 눈에 잘못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몇 가지의 특정 직업(교사,간호사,의사등) 외에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부족한 일손은 모두 제삼국인 남자들에게 맡겨졌다.
여자는 고등교육을 받았어도 생활에 활용할 수가 없었고, 어린 아가씨들은 이쁘고 날씬한데 결혼하고 몇 년 안에 거의 다 푸짐해지는 게 할 일 없음이 아닐까? 운전수에, 정원사에, 유모에, 식모에, 남편 또한 몇 년 못 가서 제2, 제3,을 구하니..... 좀 산다는 집이 그렇고 돈 없는 남자들은 결혼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 제일 불쌍한 여자들을 외국교육을 받은 아랍계 여자들이다. 이슬람교도는 절대로 타종교와 결혼 할 수 없고,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여성 딸들은 비행기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삶을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검은 베일을 씌우고 옛 생활을 강요하는 그들의 종교는 과연 바른것일까??
2-
여러분은 혹시 70년대에 새벽 단잠을 깨우던 새마을 노래를 기억하는가? 아침 일찍 동네 어귀마다 메어놓은 확성기를 통해 일어나 일하라고 떠들어대던 그 소음. 사우디의 새벽은 그렇게 시작된다.
걸프전 때나 아니 요즘도 중동이 매스컴을 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 교회가 많이 있는 것처럼 그 나라에도 모스크라는 회당이 곳곳에 널려있다. 성경의 다니엘서에 보면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그들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데 이 사람들은 매일 기도를 다섯 번 한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 정오쯤, 오후 네시 경, 일곱시 경, 밤 아홉시 반경. 정확한 시간을 모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월력을 사용하며 시간이 조금씩 변경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일 년이 열세달이 되어 월급을 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선 새벽을 깨우는 아침 쌀라-기도시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었지만 깊은 잠을 못자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되어 겨우 잠이 들어도 한번 잠이 깨면 더 잘 수가 없다. 모스크 탑 네 벽에 스피커를 달아놓고 5분 정도를 시끄럽게 읊어대는데 노래도 아니고 시조도 아니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엄청 크게 질러댄다. 더러 잠을 깼다가 다시 잘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또 다른 불편은 꼭 쇼핑을 가면 -쌀라-에 걸린다. 티브이 방송을 보고(기도시간 일정을 알려줌) 그 시간을 비껴가도 쇼핑 도중에 걸려서 가게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가 쇼핑을 마치든지, 시간 맞춰 갔는데도 문을 안 열어서 한참씩 찜통 더위에서 시간을 버려야한다.
남편은 비행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니 쇼핑도 한꺼번에 몰아서 해야 하는데 쇼핑도중에 -쌀라-에 걸려서, 20분가량을 밖으로 쫓겨나 밤시간이라도 푹푹 찌는데서 기다려야 한다면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그것도 새까만 베일로 머리를 가리고 또한 긴 팔 긴 치마의 도포같은 가운을 입고서 말이다. 게다가 오후 열 두시 반부터 네시 반 까지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때에 가게 문을 닫고 쉬든지 잠을 잔다.
이래저래 우리 남편들의 귀한 시간은 사라져간다. 여자들이 운전을 할 수가 없고 또 남정네 없이 다니는 게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여자 셋이서 까만 거 안입고 쇼핑 나갔다가 시비가 생겨서 경찰서 신세를 진 일도 있었다.) 부인한테 무슨일이 생기면 그 책임이 남편인 까닭에 가능하면 부부가 함께 다닌다. 덕분에 사우디에서 몇 년을 살다온 부부들은 자동적으로 애처가가 된다니 그건 찬성할 일이다.
대개의 아랍인들 열심은 그 도가 지나쳐서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해도 정말 이해가 안된다. 쇼핑센터 구석에 병풍치고 카펫트 깔고 간이 기도처를 마련하고 병원 구석에서도,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신의 조그만 카펫을 펴놓고 기도를 한다. 우리는 승무원 가족 특혜로 일등석을 자주 이용하는데, 어느 지역 상공을 날든지 그곳 시간이 어찌되든지 사우디 시간으로 기도 시간이 되면 기내방송을 한다.그리고는 기장실에서 두 기장이 모두 나와 그들의 성지인 메카를 향해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며 기도를 한다. 비행기는 오토 파일럿트(자동장치)를 걸어 놓았다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모든 사우디의 비행기 천정에는 메카쪽으로 화살표가 나침반처럼 표기되어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기도할 때에는 은밀히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고 배운 것 같은데....
나도 그 시간을 이용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주님의 뜻 안에서 이들의 영혼을 변화시켜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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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제다 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신고서를 작성한다. 종교-기독교 당당하게 나의 종교를 적었다. 그들도 외국인 개인의 종교는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서적의 반입은 금지되어 있고 모임 또한 금지되어있다. 사우디 생활 10년 동안 나는 세분의 목사님을 모셨다. 처음 모시던 한목사님은 건축일로 사우디에 오셔서 건축 현장 콘테이너방에서 몇 명의 현장 인부들과 예배를 드리시다가 지금의 교민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금요일-그곳의 주일-아침 저녁으로 천주교와 번갈아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분은 오랜 사우디 생활의 스트레스와 종교 탄압으로 그곳에서 순교하셨고 목사님의 시신은 몇분의 집사님들이 사모님과 함께 대구 본가로 모셨다. 그후에 리아드(사우디 수도)에서 목회하시던 김목사님이 오셔서 3년을 시무하시다가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시고, 한국교단 선교본부에서 권목사님을 보내주셔서 내가 그곳을 뜨기까지 그분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교 모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몰래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성경 찬송을 들고 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었고 주보에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모두 복사해서 그걸 의존해 예배를 드려야했다. 물론 모든 자료는 전부 모아서 탈나지 않게 잘 처리 해야만 했다. 리아드에서는 종교경찰이 예배드리는 현장을 습격해 목사님과 성가대원들을 잡아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성가 대원들이 가운을 입고 있어서 대단한 지위의 사람들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성가대원들은 시말서를 쓰고 풀려나고 그 목사님은 강제 출국령을 받고 귀국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곳에서는 위장하기 위해 무슨 교육을 받는 것처럼 자료 사진들을 사방에 붙여놓기도 하고 운동복을 입고 테니스채나 골프채를 들고 교회에 가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는 치외법권인 영사관 산하 교민회관을 빌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했지만 그들의 넘치는 열심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때때로 특별단속이 있을 때에는 예배를 중지하든지 외국인 단지 내에 있는 개개인의 집을 빌려 구역 예배식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어느 집으로 모이기로 계획을 했다가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취소하고 한두 분이 근처에 남아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장소가 작아 복도까지 사람들이 앉고 여자들은 서서 설교를 들어야 했지만 불편하고 힘들수록 우리들의 신앙의 불은 더욱 뜨거워졌다.
우리 교회는 설교 테이프로 타 지역에도 선교를 했다. 자동차로 두 시간 반 떨어진 공사 현장에 테이프를 보내고 선교팀이 정기적으로 찾아가 직접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먼 길을 왔다고 갈 때마다 그분들의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지 메카 앞으로 뚫린 큰길을 두고 경찰의 단속 때문에 험한 돌짝길로 빙 돌아 가야 하는데, 그래서 오히려 은혜를 받기도 한다. 그 땅이 모세와 백성들이 40년을 방황하던 땅이 아닌가. 또 '사막이 꽃이 피어 향내 나리라'는 말을 눈으로 실감할 수도 있는 멋진 경험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막은 모래사막이지만 그곳은 물이 없어 메마른 삭막한 광야로 어쩌다 한번씩 오는 비는 허허벌판 너른 들녘에 잔잔한 야초를 활짝 피워 낸다. 떼 지어 다니는 낙타와 염소들를 볼 수 있고 오리지날 베드윈족의 사는 모습도 간간히 만날 수 있었다. 또 비행기로 두시간 거리인 복숭아 꽃이 별나게 아름다운 산악 지대인 카미스에도 목사님을 모시고 세번이나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공산당과 다름없는 나라가 그곳 사우디이다. 자기가 사는 지역 밖으로 여행하려면 같은 사우디 국내라해도 여행증명서와 사유서를 경찰서에서 받아와야만 국내선 비행기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사람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교통법규 위반이라도 마찬가지라니 운전을 못하는 여자들은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할까? 카미스에는 미군부대(한인가족)와 농사를 짓는 한국인들이 조금 모여서 산다. 지대가 높아서 기후가 선선하고 햇빛이 좋아서 채소 농사와 과일 농사가 잘 되는 것 같다. 오가는 길에 검사가 매우 심하고 또한 경찰들이 영어가 짧아 말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해야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신앙에 있어서 특히 안일무사는 오히려 신앙의 적이라는 걸 이곳에 살면서 깨달았고,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신앙은 더욱 견고해지고 크게 자란다는 것을 배웠다. 특별히 바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태해질 수도 있지만 한편 성경을 많이 읽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첫댓글 혹시 기독교신학을 얼마나 배웠습니까? 전 기독교신학을 잠시 배웠고,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프로테스탄트는 십자군과는 다릅니다. 어떤 이해를 하셨는지 몰라도, 막스의 공산당이론(토대상부구조론)을
사우디에 곁해서 말하는 것은 웃깁니다. 가관입니다. 신앙. 믿음. 성경. 전도서 좀 많이 읽으시죠. 아, 두바이 여행에 대한 견해라면 이해합니다.
이거 무슨 소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