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 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 리이나 되나 몇 리나 되나 몇 리나 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2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아버지는
고추나무를 심었다
밤 깊으면 공사장 인부들이
고추를 따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고추나무 키 위에
머뭇거렸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엉켜붙었다
내버려두세요 아버지
얼마나 따가겠어요
보름 후 땅 주인이 찾아와, 집을 지어야겠으니
고추를 따가라고 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낄길 웃었다
3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랐다 물을
따라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1932년 단밀 보통학교 졸업식
며칠 전 장날 아버지 떡 좀 사먹어요
그냥 가자 가서 저녁 먹자
아버지이......또! 이젠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네 월사금도 내야 하고 교복도 사야 하고......
아버지, 아버지는 굶었다 그해 모심기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어지러워 밥도 못 잡숫고
그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약 한첩 못 써보고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
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심어야 할까요 살아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4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왕 책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벌레들은
더 많은 구멍을 파고 고운 나무 가루를 쏟아냈다 보자 누가 이기나,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막았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수색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쉬었다
그만 하세요 어머니, 이젠 연세도 많으시고......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뒤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약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