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에 중3학생이 민든 내용 요약
문화 류씨
최근 수정 시각 : 2016-09-15 21:59:35+0900
문화류씨 (文化柳氏)
본관 : 舊 황해도 신천군 문화현 → 現 황해남도 신천군, 삼천군 일대
시조 : 류차달(柳車達)
인구 : 284,083명[1]
문과급제자 : 428명
상신(相臣) : 14명
문형(文衡) :6명
공신 : 20여명. [2]
청백리 : 12명
최근족보 : 무자보(武子譜)[3]
공식홈페이지 : 문화류씨대종회
목차
1. 개요
2. 역사
3. 항렬표
4. 파(派)
5. 차(車)씨와의 논란
6.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
1. 개요
대한민국의 성씨. 2000년 기준으로 본관별 인구 순위에선 29위. 더 자세한 것은 문화류씨대종회 홈페이지에 가면 더 다양하게 알 수 있다.
2. 역사
문화류씨의 시조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로 황해도 유주(儒州)[4] 출신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고 아울러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독자[5]인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 근데 나는 아니다 그리고 7세손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그 후손들이 현재 문화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 후 문정공(文正公) 류경(柳璥)[6], 정신공(貞愼公) 류승(柳陞), 장경공(章敬公) 류돈(柳墩) 등 수 대를 연이어 증시(贈諡)를 받아 문화류씨는 고려조에 소위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벌족(閥族)으로서 일찍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문화류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인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 등이 배출되었다. 시호(諡號)는 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문시(文諡)는 7장이다.
유명하신 분들로는 조선초에 청렴한 재상으로 유명한 하정(夏亭) 류관(柳寬), 사육신 낭간(琅玕) 류성원(柳誠源), 을사사화 때 강직한 대신이었던 송암(松菴) 류관(柳灌),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 문흥군(文興君) 류사원(柳思瑗), 실학자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 발해고를 쓴 영재(泠齋) 류득공(柳得恭) 등이 있다.. 그리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한 유현(儒賢)과 충의효렬(忠義孝烈)로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을 받은 분이 80여인에 이르고 무과 및 소과에 급제한 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난 뭐냐고
문화류씨는 고려 때 4대명족[7], 조선 때 8대성으로 일컬어져 왔다. 문화류씨의 족보인 영락보(永樂譜, 1423년)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지만, 실존하지 않아서 안동권씨 성화보(1477)가 가장 오래된 족보. 영락보 다음으로 편찬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는 현재 실존하는 족보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그 기록의 정확성이 여타 족보보다 꽤 정확성이 높다고 한다.
문화류씨의 관향인 황해도의 문화(文化) 고을은 고려 초 · 중기에는 유주(儒州)로 불렸고,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던 지역인데, 고종 46년(1259년) 위사공신(衛社功臣) 류경(柳璥)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개칭함과 동시에 현(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문화현으로 존속시켜 오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군(郡)으로 되었고, 그 이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3. 항렬표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根O, 寅O [근O, 인O] | O烈, O杰 [O렬, O걸] | 志O, 在O [지O, 재O] | O善, O鉉 [O선, O현] | 濟O, 浩O [제O, 호O] | O桓, O榦 [O환, O간] | 榮O, 煌O [영O, 황O] | O坤, O憲 [O곤, O헌] | 鍾O, 鏞O [종O, 용O] | O泳, O承 [O영, O승] | 來O 采O [래O 채O] | O熙 O魯 [O희 O로] | 膺O 增O [응O 증O] | O鎬 O銶 [O호 O구] | 溫O 濬O [온O 준O] |
4. 파(派)[편집]
문화류씨의 파(派)는 14개로, 그 중 충경공파, 좌상공파, 하정공파, 검한성공파, 중문지후사공파가 인구수 탑5. 다음은 2008년 문화류씨세보에 기재된 317,845명의 파별 인구 비율. 세계도 순으로 배열.
시랑공파 2.94% 9,348명
문숙공파 1.94% 6,163명
하정공파 18.42% 58,560명
장령공파 0.77% 2,461명
곤산군파 5.34% 16,962명
문평군파 2.79% 8,874명
(중문)지후사공파 7.03% 22,360명
좌상공파 15.75% 50,059명
검한성공파 10.28% 32,662명
정숙공파 2.63%. 8,366명
판사공파 1.37% 4,357명
수사공파 0.05% 163명
부윤공파 0.94% 2,983명
충경공파 29.69% 94,355명
5. 차(車)씨와의 논란[편집]
조선 중후기부터 연안차씨 문중에서는 박팽년이 어명에 의해 찬술했다고 주장하는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寃記)」를 근거로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의 장남이 연안차씨의 시조 차효전이고 차남이 류효금으로, 류씨와 차씨는 한 핏줄이라고 주장해왔다.
차원부설원기에 따르면, 중국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의 후손이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살았는데 후손 왕몽(王夢)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으로 7남 림(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면서 왕씨(王氏)를 전씨(田氏)로 고쳤다가 신씨(申氏)로 고쳤고, 마지막으로 차씨(車氏)로 성을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라 태조박혁거세 강제 태조行 일수도 있지만 태조 성한왕과 관련될 수도 있다가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공훈(功勳)으로 시중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 성을 받게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무일의 32세손인 차건신(또는 차건갑)이 신라39대 소성왕 때 승상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이 죽은 뒤 그 태자그 당시 신라는 후계자를 태자로 불렀다. 가 12살로 애장왕이 되었다. 근데 그 애장왕을 숙부 김언승이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니 헌덕왕이었다. 그래서 차건신의 아들 차승색이 아들과 더불어 헌덕왕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해, 조모의 성인 양씨(楊氏)와 뜻이 같은 류씨(柳氏)로 바꾸고서 살았다. 이 때 차남 차공도가 강남으로 피신, 옛날 성인 왕씨(王氏)로 성을 바꿨는데, 이 사람이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증조부인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 때 차씨는 왕씨와 똑같은 왕족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류씨(柳氏) 6세인 류해(柳海)가 통일에 기여한 바로 삼한통합 벽상2등 공신에 봉하고, 차달(車達)이라는 호를 내렸다. 장남 류효전(柳孝全)도 개국 수공자로 대광지백(大匡之伯)의 벼슬이 제수되었고, 연안군(延安君)으로 칭하였다.
그리고 장남 류효전은 다시 차씨를 잇게 되고 본관을 연안(延安)으로 하게되니 연안차씨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 류효금이 문화류씨를 잇게 되었다. 거의 신화수준 그러나 알고보면 고대로 갈수록 신화 아닌게 없음
하지만 이러한 차원부설원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무하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아무 곳에도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이 어명으로 박팽년에 의해 저술되어졌다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류씨 초기 족보에서도 차씨와의 연관성은 어디에도 저술해놓지 않았다.(특히, 외손 6~7대까지도 적어놓은 가정보(嘉靖譜)에도 아무데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된 건 1689년에 발간한 문화류씨 족보인 기사보(己巳譜)로, "망매(茫昧: 흐리터분하고 밝지 못함)하지만 실어서 훗날 연구하게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아마 이 때부터 차원부설원기가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차씨 문중에서 <차원부설원기>라는 위서[8]가 퍼진 것은 조선 중후기이고, 이 때 처음에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이건 뭐지?"라는 반응이었다. 즉 류씨 입장에선 그런데 뭔가 황제의 후손이고 신라 건국공신의 후손이고 태조왕건과 같은 집안이고 하는 그럴듯한 포장에 거의 사실처럼 여겨져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류/차 논란)
하지만,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2008년 무자보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류씨와 차씨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문화류씨대종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차(車)씨 입장의 반론도 있다. 이곳에 있던 반론 글은 → 류/차 논란에서 볼 수 있다.
문화류씨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는 문서인만큼 내용이 방대해서 새로운 문서를 작성했으니, 기존의 작성자님께서도 헤아려주시고, 이 문장은 확인후 삭제바람
6.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편집]
•류덕환
•유득공[9]
•류준열
•류현진
•류혜영
•유희열
•이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
추가바람
자세한건 추가바람 [10]
[1] 2000년 기준
[2] 자세한 수는 추가바람
[3] 2008년 간행
[4] 훗날 문화현(文化縣)
[5] 자세한건 [아래 차(車)씨와의 논란틀 참조
[6] 고종(高宗)45년 (1258) 3월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재직 중에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축출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7] 영조(英祖) 때 홍봉한(洪鳳漢) 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에는 『 고려 사인(士人)에 명망 있는 씨족과 높은 재상으로는 류 · 최 · 김 ·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하여 고려 4대 명족 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다.
[8] 물론 차씨문중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9] 원래라면 '류득공'으로 표기해야겠지만 워낙 '유득공'으로 유명하셔서...
[10] 문화류씨 자손으로서 나무위키 등재가 시급
첫댓글 중학생이 만든 자료입니다.
지금도 차문이 큰집이라는 분이 보시고 차문과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자료라서 소개합니다.
뿌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