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현감 옥천 전주 묘갈명(洪原縣監 沃川 全宙 墓碣銘)서문을 병기함
판관을 지내고 호가 설봉(雪峰)인 전공(全公)의 이름은 주(宙)요, 자는 태허(太虛)이니, 신라 정선군 선(愃)이 윗대의 선조가 된다.
고려 초에 이갑(以甲)은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견훤의 난리에 순절하니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유(侑)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지니 자손이 이로 인해 관향을 삼았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귀덕(貴德)이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를 지냈으며, 그 아들 예(禮)는 인가각부록사(印架閣副錄事)를 지냈고, 그 아들 희철(希哲)은 생원·진사시를 거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성삼문, 박팽년 등 여러 공과 울면서 작별하였고 옥천에서 영주로 이주하였다. 호는 휴계(休溪)이다.
그 아들 호(琥)는 생원으로 첨정(僉正)이었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덕유산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그 아들 사영(賜穎)은 사과(司果)를 지냈는데 무장(茂長) 유씨(庾氏) 부사 경(京)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옥천 양산리 집에서 홍치 신유 모월 모일 공을 낳았다.
재질이 영특하고 거동이 침중하여 이를 갈 무렵의 나이에 어른처럼 의젓한 면이 있더니 권면과 독려가 없어도 스스로 배움에 열중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경전의 뜻을 탐구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아 마애(磨崖) 권예(權輗)공으로부터 장려와 칭찬을 자주 받았다. 늘 시경의 ‘추우(騶虞)’장을 외기 좋아했는데 대개 어질고 후덕한 마음이 시의 뜻과 합치된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여가에 활쏘기, 말 타기도 두루 익혀 가정 계미(152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계사(1533)에 군기시첨사(軍器寺僉事)가 되었고 병신(1536)에 인의(引儀)에 임명되어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지방으로 나가 온성(穩城)의 원이 되었는데 남다른 치적이 있었다.
기해(1539)에 강릉판관으로 자리를 옮길새 맏조카가 후사도 없이 일찍 죽으니 공이 아우 안(安)에게 이르되 “백씨는 어질고 후덕한 분이라, 의리로 보아 대를 끊어지게 할 수 없는데, 나는 아직 아들이 없고 또한 벼슬살이 하느라 집에 있을 날이 없네. 이제 서너 마지기의 전토를 자네에게 줄 테니 자네가 효성스런 후사를 세워 힘써 제사를 받들게나.”라고 하고, 마침내 부임지에 갔다. 대개 아우는 아들이 있어 종통을 이을 만한 때문이었는데 여러 사람들도 그의 뜻을 따라 주었다.
얼마 후 임소에서 돌아와 영주 이곡리(伊谷里)에 터를 잡았다. 임인(1542)에 홍원 수령이 되어 우선 유술(儒術)로써 다스리니 선비의 기풍이 크게 진작되었더니 돌아옴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이후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쓰니 원근의 유생들을 맞이하여 성취시킨 바가 많았다.
기미(1559) 10월 3일에 작고하니 향년은 59세였고 묘소는 살던 곳 뒤쪽 시랑산(侍郞山) 남록 아래 남향의 둔덕에 있다. 전부인은 하음 이씨(河陰李氏)인데 묘소를 잃어버렸고, 후부인은 영천 민씨(永川閔氏)니 진사 우상(友商)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다고 칭송을 받았으며 묘소는 같은 둔덕에 있다.
아들이 없어 아우 안(安)의 아들 천기(天紀)로 뒤를 이었다. 천기는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지냈고 효성스럽더니 후에 사람들이 그가 시묘하던 곳을 이름하여 ‘빈소골’이라 하였다.
그 아들 광(洸)은 후사가 없고, 발(潑)은 승사랑(承仕郞)이고, 사위는 교수(敎授)인 이윤적(李允迪), 참봉인 금의순(琴義筍)이다. 발의 아들로 장남 유승(有承)은 병자년 이후로 은거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차자는 갑승(甲承)이다. 유승의 아들로 명열(命說)은 선비로서의 명망이 있었고, 명윤(命尹)과 명석(命奭)이 있으며, 명량(命亮)은 가문을 지킨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명열의 아들로는 성삼(省三), 계삼(戒三), 달삼(達三)이 있고, 명윤의 아들로는 경삼(景三), 우삼(友三)이 있고, 명석의 아들로는 덕삼(德三)이 있고, 명량의 아들로는 신삼(愼三)이 있다. 계삼의 아들로 수산(壽山)은 성삼(省三)의 뒤를 이었고 진사였으며, 그리고 수억(壽億)이 있다. 달삼의 아들은 수만(壽萬)이고, 견삼의 아들은 수악(壽岳)이고, 우삼의 아들은 기수(箕壽)이고, 덕삼의 아들은 수봉(壽鳳)과 수대(壽岱)이고, 신삼의 아들은 수태(壽泰)와 수성(壽聖)이다. 수산의 아들로 필구(必銶)와 필기(必錡)는 둘 다 진사인데 필기는 수억의 뒤를 이었으며 사람들이 소씨(蘇氏) 형제에 비교하였다. 그리고 필현(必鉉)과 필남(必腩)이 있는데 필남은 양자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가정을 다스림에 집안이 윤택해졌고 백성을 다스림에 풍속이 교화되었으니 기타 사적과 행실로 전할 만한 것이 필시 많을 테이지만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병화를 여러번 겪다보니 징험할 만한 문적이 모두 없어졌다.
또한 묘소 앞에 작은 비석도 오래전에 글자가 마멸되어 그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후손 우교(遇喬)가 이를 두렵게 여기고 형석(亨錫)과 상의하여 규욱(奎頊), 하석(夏錫), 규휘(奎輝), 영석(永錫), 귀하(龜河), 규철(奎轍), 후석(垕錫), 위하(緯河), 경하(景河), 용하(龍河), 정구(定九), 학구(學九) 등과 더불어 비를 다시 세울 것을 계획하고 가승(家乘) 및 견문한 바 약간의 자료를 모아 나에게 와서 비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기에 굳게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함에 마침내 이를 근거로 해서 서술하고 명문을 붙인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형이 죽으면 아우의 아들로 뒤를 이음이 관례건만
공은 이 관례를 따르지 않았네.
또한 쓸모있는 유생들을 널리 모아서
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네.
애석타. ‘추우(騶虞)’시의 어질고 의로운 뜻을 터득한 때문이겠지.
기록할 만한 옛 일이 아니 전하니
이에 새로 글을 지어 비를 세우노라.
숭정 기원후 다섯 번째 경신(1920) 단오날 통훈대부로 홍문관부교리지제교를 역임하고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동학교수를 겸임한 이만규(李晩煃) 짓다.
[原文]
洪原縣監 沃川 全宙 墓碣銘幷序
判官號雪峰 全公諱宙 字太虛 新羅旌善君諱愃 其上祖也 麗初諱以甲 佐太祖有勳 殉節於甄萱之亂 諡忠烈 諱侑 版圖判書 封管城君 子孫因以氏焉 八本朝 諱貴德 通禮門奉禮 子諱禮 知印架閣副錄事 子諱希哲 生進武科 官止司直 端廟遜位 泣別成朴諸公 自沃移榮 號休溪 子諱琥 生員僉正 戊午禍作 避居德裕山中 以終老 子諱賜穎 司果 娶茂長庾氏 府使諱京女 以弘治辛酉某月日 生公于沃川陽山里第 材質英敏 儀表凝重 髫齔屹然如巨人 不待勸督 向學無倦 窮尋經義 多所自解 亟蒙獎詡於磨厓權公輗 每好誦詩傳騶虞章 盖仁厚之心 有合於詩意也 講習之暇 傍通弓馬 嘉靖癸未 登虎榜 癸巳知軍器寺僉事 丙申拜引儀 歷宣傳官 出守穩城 治有異績 己亥遷江陵判官 時長侄旡子而夭 公謂弟安曰 伯氏仁厚 義不可絶嗣 而我姑無子 且有官守 在家無日 今以數頃薄田 付君 君其克勤孝祀 遂赴任 盖以季公有子 可系宗也 衆服其義 尋自任所 卜居于榮之伊谷里 壬寅遷洪原 治政以儒術爲先 士風丕振 及歸 民立石以頌 自後 更不向仕路一步 好獎進後生 招延遠近 多所成就 己未十月三日卒 享年五十九 葬所居後侍郞山南麓下向午原 配河陰李氏 失墓所 榮川閔氏 進士友商女 以婦德見稱 葬同原 旡子 以弟安子天紀嗣 禮賓寺奉事 有孝行 後人名其廬墓處 曰殯洞 男洸旡后 潑承仕郞 女李久迪敎授 琴義筍參奉 潑男有承 丙子後 隱居不出 甲承 有承男命說 有儒望 命尹命奭 命亮有護宗特行 命說男 省三戒三達三 命尹男 景三友三 命奭男德三 命亮男愼三 戒三男壽山 嗣省三進士 壽億 達三男壽萬 景三男壽岳 友三男箕壽 德三男 壽鳳壽岱 愼三男 壽泰壽聖 壽山男 必銶進士 必錡進士 嗣壽億 人比之蘇氏兄弟 必鉉必腩出 以下不錄 於乎 公以文武兼備之才 政家而家道肥 莅民而俗化 其他事行 心多可傳 而世代寢遠 兵燹屢經 並屬杞宋之無徵 墓前短碣 缺泐已久 不辨字形 後孫遇喬 惟是之懼 謀於亨錫 與奎頊夏錫奎輝永錫龜河奎轍垕錫緯河景河龍河定几學九等 爲改竪計 掇拾家乘 及聞見若干條 來余責銘文旣 苦辭不獲 乃依而叙之 系以銘 銘曰 旣不援兄亡弟及之俗例 以立宗嗣 又廣延可與有爲之蒙士 俾成善類 其有得乎騶虞之仁義也 可惜古蹟之無記 玆用新刻兮表隧
崇禎紀元後五庚申端陽月日 通訓大夫 前弘文館副敎理知製敎 兼經筵侍讀官 春秋館記注官 東學敎授 李晩煃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