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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10일(화). 여행 4일차 아침이 밝았다. 07시40분 니스 호텔을 출발한다. 나오기로한 현지 가이드가 늦는 바람에 버스에서 한참을 기다린다. 08시45분 생 폴드방스에 도착 했다.
생 폴드방스. 생 폴드방스는 코트타쥐르의 유서 깊은 중세 마을중의 하나로 근대와 현대 미술을 동시에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생 폴드방스는 언덕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365도 모든 방향이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뷰 포인트 이다. 때문에 하루종일 햇볕이 들고 16세기 화가들이 결집을 하고 문화 예술인들이 교류하는 곳이었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이 활동하고 무덤이 있는 곳이다. 1960년대에는 배우 이브몽땅,시몬 시뇨레, 리노벤투라,와 피카소도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마을에 도착하자 파라솔 소나무라고 불리는 지중해 회송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입구에 별3개 짜리 호텔 콜롬보도(황금 비둘기 라는뜻)가 있다. 이 콜롬보도 호텔은 그당시 여인숙 이었고 샤갈이 살았던 집이다. 그당시 배고픈 화가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헐값에 그림을 수집하여 훗날에 큰 부를 축적하고 현재의 호텔로 변신 하였다. 이브몽땅과 시몬시뇨레가 만났던 장소 이기도 하다. 호텔 문앞에 생 폴드광장이 나온다. 광장 에는 그당시 빽당크라 불리던 구슬치기 하던 조형물이 설치 되어 있었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는 조약돌로 태양을 표현한 조형물이 새겨져 있었다. 누가 그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했는지... 열정을 느끼게 한다. 언덕위에 생 폴드방스교회가 나온다. 12세기경 지어진 이 교회에서는 이브 몽땅과 시몬 시뇨레가 결혼식을 올린 곳 이기도 하다. 이브몽땅의 고엽과 에디띠 피아프의 라비앙로즈 음악이 들려 오는듯 하다. 17세기 전후에 지어진 갤러리와 상점들이 모여있는 그랑비아 거리를 걸어서 시청, 구종탑,장터, 큰우물,등을 거쳐서 샤갈의 무덤에 도착한다.
마르크 샤갈(1887~1985). 샤갈은 1887년 러시아 제국(현,벨라루스)에서 태어난 유태인 이다.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그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표현주의 및 초 현실주의 화가로 성장하여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린다. 종교에 심취 했었고 밝고 몽환적이 초현실주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전망 좋고 앞이 확 트인 조그마한 공동묘지안에 샤갈의 무덤이 있었다. 러시아 유태인게 출신 이라서 묘지에 십자가가 없다. 샤갈(1887~1985)의 무덤에 부인 바바(1905~1995). 바바의 남동생 그러니까 샤갈의 처남 미쉘 브로드스키(1913~1997)가 나란히 묻혀있다. 특히 처남이 함께 묻히는 경우는 드문데 처남이 평소에 샤갈을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다시 그랑비아 거리에 있는 갤러리들의 작품을 감상 하면서 사진도 찍는다. 가끔씩 작품의 가격을보고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멋진 작품들이 많았다. 괜스리 눈만 높아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작품들을 둘러 보다가 자기의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고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여인동상을 보고 입담 좋은 후배가 형남 저 작품 제목이 뭔지 알아유? 하고 묻는다. 모른 다고 했더니 후배님 왈 ! "나좀 어떻게 해줘!" 라고 해서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명작에 멋진 해설 이라고 생각 한다.ㅋㅋㅋ 10시20분 생 풀드방스를 출발 한다. 트램 건설공사로 한창 레일공사를 하는 니스 시내를 거쳐 모나코 가기전 산 꼭대기에 있는 마을 에즈에 11시13분 도착한다.
에즈(Eze). 중세시대 유럽을 휩쓸었던 공포의대상 흑사병이 있었다. 그당시 유럽의 주거 환경이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된다. 노르웨이에 가면 오따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흑사병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산 높은 곳으로 피신을 하였으나 살아 남은 사람이 겨우 8명뿐 이어서 숫자 8을 의미하는 오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 에즈도 흑사병을 피하기위해 산 꼭대기로 사람들이 모여서 생긴 마을 이다. 유럽의 산 중턱에 아름답게 보이는 집들 이면에는 그런 슬픈 사연도 숨겨져 있다. 남 프랑스의 보석 이라 불리는 에즈에 그라스 라는 마을이 있다.
그라스(Grasse).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 위치하며 향수의 메카라 불리는 도시이다. 일교차가 적고 따뜻한 기후 때문에 향수의 원재료가 되는 꽃들이 자라기 좋은 환경 이다. 라벤더를 비롯한 각종 꽃들이 우수한 향수의 원료로 생산되어 유명 향수 제조 업체에 납품을 하고 있다. 갈리마르,프라고나르,몰리마르를 그라스의 3대 향수회사로 꼽는다. 그라스는 중세시대 부터 모로코의 페즈와 함께 가죽 무두질과 가죽교역이 발달한 곳이었다. 여름철 뜨거운 날씨 속에서의 가죽 무두질은 냄새 때문에 상당히 고된 작업 이었다. 그 가죽 무두질의 책임자 였던 갈리마르는 가죽의 악취제거를 위해 가죽 장갑에 향을 사용 하였다. 향을 뭍힌 가죽 장갑은 헨리2세의 왕비인 카트린드 메디치의 큰 관심을 끌게 된다. 왕비의 관심으로 16세기 부터 그라스의 향수 산업은 본격적으로 발전 한다. 20세기 들어 패션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의 패션의 마지막을 향수로 마무리 하기 시작한다. 그 선두 주자가 샤넬의 창시자인 코코 샤넬 여사 이다. 1921년 여름 샤넬은 그라스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여기서 그녀는 샤넬향수의 대표작품인 샤넬No5 를 탄생 시킨다. No5 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샤넬이 5라는 숫자를 좋아 하였고 조향사가 5번째로 제시한 샘플 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향사를 Ne(코 라는뜻) 라고 부른단다. 조향사는 약 3000여가지의 향을 구분 할수 있고 그 향을 구분 하기위해 담배,술,향신료 섭취등을 금지 하여야하고 수영장의 염소 성분 때문에 수영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와인의 맛을 평가하는 소믈리에나 이런 조향사나 그 명성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희생이 따라야 하는가 보다. 아이고 ! 나는 될 자격도 없지만 안하고 말어 ! ㅋㅋㅋ 프랑스 파리와 그라스 2곳에 조향사 학교가 있으며 7년간의 수업이 필요 하단다. 전세계에 약 500명의 조향사가 있고 갈리마르에 2명의 조향사가 근무 하고 있단다. 장미 향수 1리터의 향수가 생산 되려면 무려 1톤의 장미꽃잎이 필요하다고 한다.
11시17분 갈리마르 향수 공장의 시설들을 둘러보고 향수와 향수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이용해서 만든 질 좋은 비누를 사가지고 12시10분 갈리마르 향수 공장을 나온다. 12시20분 5유로를 내고 하늘위의 식물원인 열대정원으로 입장 한다. 그 높은 곳에 그렇게 많은 선인장및 열대 식물들을 키워 놓았는지...전방으로 보이는 해변도 일품 이었다. 향수 공장에서 시간을 지체 하는 바람에 그 좋은 경치를 그저 증명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이 에즈의 땅 거의다를 쉐브르도 호텔과 에즈성 호텔이 차지 하고 있었다. 12시55분 에즈를 출발하여 13시20분 모나코에 도착 한다.
모나코(Monaco). 프랑스 동남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세계에서 바티칸시티에 이어 2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면적이 2km2로 여의도 면적의 1/4 이다. 서쪽으로 니스가 14km이고 동쪽으로 이탈리아가 8km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본래 페키니아 인들이 거주 하였으나 로마에 정복 당하고 13세기에는 이탈리아 지배하에 있다가 1793년에 프랑스에 합병 되었다. 나폴레온 전쟁후 1861년1월1일 독립 하였다. 1919년 베르사이유 협정으로 주권과 독립이 인정 되었으나 국방과 외교권을 프랑스가 행사한다. 1993년 UN에 가입 하였고 2007년3월에 한국과 수교 하였다. 입헌 군주국 이며 정식 명칭은 모나코공국 이다. 인구는 38,000명이고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 8000명 정도이다. 언어는 프랑스어 이고 화폐도 프랑스와 동일해서 프랑스의 부유한 도시 같은 인상이다. 1인당 GNP가 64000$로 부유한 국가 이다. 풍족한 카지노 수입 만으로도 국가운영이 가능 하기 때문에 납세과 병역의 의무가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는 나라이다. 외국 기업에 까지도 세금이 없기 때문에 유럽의 부호들이 모나코로 몰리면서 조세 천국 같은 곳이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국가에서 거의 생활을 책임져 주기 때문에 시민권 따기가 무척 어렵다고한다. 첫번째가 모나코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결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3대에 걸쳐서 모나코에서 거주를 해야만 시민권을 준다고한다. 현재 모나코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생활하고있는 한국인은 4명 이라고 한다. 그보다 모나코가 더 유명해 진것은 모나코의 레이니 대공 3세와 미국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세기의 결혼식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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