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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시인으로부터 지리산에 함께 가자는 연락이 왔다. 지금껏 지리산엘 한번도 가보지 못한지라 반가운 마음에 따라나섰다. 여류시인 네명이 떠나는 지리산 여행. 그 전날 지리산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지리산에 관한 예습을 하고 나니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서울을 출발했지만, 우리 일행이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함양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마중나오신 지리산 문학관 관장님과 함께 점심식사을 했다. 그분의 안내로 오도재에 위치해있는 지리산문학관에 도착했다. 오도재로 올라가는 길은 지그재그로 길이 이어졌는데, 뱀이 누워있는 듯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저만치 지리산이 첩첩이 사진기 속으로 들어왔다. 지리산을 보면서, " 어디에 있는 산이든 산은 다 똑같은 산이 아닌가?'라는 서울 깍쟁이 같은 생각을 했다. 경상도에 있든 제주도에 있든 충청도에 있든 산에는 흙이 있고, 산돌이 있고 나무가 있고 바위와 계곡이 있는 것이 아니든가? 그렇다, 전국에 있는 산은 다 똑같다. 그러나, 지리산은 가도가도 지루하게 끝이 없다하여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거대한 산,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산. 야생동물이 아직도 살고 있다더니, 가는 곳마다 "야생 동물 주위 "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야산에서 동물들이 튀어나오나 보다. 그렇다면 등산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지리산 문학관에 도착하니, 주차장 입구에 매어둔 하얀 개 한마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제법 등치가 큰 녀석이었다. 관장님의 안내를 따라 본관에 들어섰더니, 여러 시인들의 시와 사진이 액자 속에서 우리를 또 반겨주고 있다. 여느 문학관들은 한 문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작가의 문학작품과 생애와 유물 등과 관련 재료들을 전시하는 것이 천편일률적인 양태다. 그런데, 이 문학관은 주인공이 꽤 여렷이다. 전라도 남원, 구례뿐 아니라 경상도 함양, 산청, 하동에 이르기까지 지리산권 12개 시군의 지리산자락과 연관이 깊은 문인은 누구나 전시하고 있다. 지리산의 흙을 밟고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지리산문학인이며 지리산 문학관의 주인이 되는 모양이다. 낯익는 시인의 시와 사진을 보면서, '이분도 지리산 문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근현대의 지리산의 산기운을 받은 사람만이 이름을 얹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신라시대 최치원을 시작으로 조선의 김종직, 김일손, 조식, 서경덕은 모두 지리산에 오른 후 글을 남겼다고 한다. 해서 그들의 문집과 작품이 문학관 유리관 속에 보물로 간직되어 있다. 이 모든 재료들을 김윤슝 관장님께서 몇년 동안 모았다고 한다. 함양 출신의 김윤숭씨는 시인으로 등단하여 漢詩를 연구하고 문학에 사랑이 깊은 분이다. 문학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김일훈 名醫의 세째 아들인 김윤숭 관장. 부친의 뚯을 받들어 지리산 산마루에 문학관을 낸 것은 2009년 6월의 일이었다. 폐교 된 곳을 그의 부인 최은아(인산죽염촌 사장이 사들여 남편과 뜻을 모아 문학관을 건립한 것이다. 요즘같은 상업주의 시대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즉각적인 수익성이 없는 일에 많은 재정과 시간과 열정을 쏟는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몇몇 뚯있는 사람들만이 가끔씩 찾아올 법한 곳. 사람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지리산 산줄기 한 곳. 일년에 몇번 있는 문학행사를 위해, 가끔 들르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지린산 문학관은 지리산 속에 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지리산과 관련된 문학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다. 특히, 최치원의 작품과 고대 문인들의 재료들이 서예가의 손에 의해 기록 전시되어 있는 것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리산 문학관은 지리산과 관련된 문학 자료를 수집, 보존, 정리, 연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또한, 매년 인산문학상, 이병주문학상, 시낭송 축제 등의 행사를 통해 문인들로 하여금 지리산에 사랑과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계간 <시낭송>을 발간하기도 한다. 문학관을 둘러보는 내내 관장님으로 부터 들은 설명 중에 특히 놀라운 것이 또 있다. 시조 <고무신>의 작가 장순하 옹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유리관 안에 펼쳐진 책 옆에 놓여진 고무신 한켤레가 인증샷처럼 눈길을 끌었다. 장순하 옹이 자신의 집필 거처를 춘천에서 지리산 함양 땅으로 옮기면서 2만여권의 장서를 이곳에 기증하여 지리산문학관의 명예관장으로 추대된 바 있다.
전체가 목재로 된 문학관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난 돌 계단. 그곳에 올라가면 뭔가 심상치 않은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우리 일행이 후다닥 올라가 보니, 머리를 길게 기르고 개량 한복 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분이 우리을 맞아 주신다. 장규재 학예사였다. 김윤승 관장이 모아들이는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실재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장규재 학예사는 사람이 그리웠는지 네 여류들을 보더니,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이곳에 5만여 권의 장서가 보관 되어 있다는 것. 좁은 공간에 많은 책을 보관하려니 벽돌로 기둥을 세우고 나무를 얹어 선반으로 활용하여 최대한 책을 꽂는다는 것. 책을 눕혀서 보관하면 최대한 많이 보관할 수 있다는 것 등. 인근에 있는 학생들이 가끔 들러서 책을 빌려가기도 한다고. 그런 학생들 중에 문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 나올 수도 있고, 대문호로 길러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장규재학예사. 나무를 직접 대패를 밀어 책꽂이를 만들어 책을 정리한다는 장규재 학예사야말로 문학의 "큰바위 얼굴"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찾는 이 드문 지리산에서, 말 걸어주는 이 없는 고적한 시간에도 책장을 만들어 책을 정리하는 사람. 그 일이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보다 못한 일일까?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내리는 일보다 못한 일일까? "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 말든, 좋은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이 노래 구절이 입에서 맴맵 돌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비현실적인 일일텐데, 밥도 되지 않고 쌀도 되지 않는 글을 쓰고 있는 우리 문인들처럼 문학에 꽂힌 사람들을 지리산문학관에서 만나고 왔다.
일본이 처들어 올 것이니 10만명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현자. 그의 예언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평생 책만 읽고 학문을 연구했던 배고팠던 학자. 그는 죽어서 장례를 치룰 비용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대에 착복하고 含哺鼓腹했던 배부른 돼지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외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그 정신의 향기가 더 길게 남는 자는 누구일까 생각해보게 하는 여행이었다. 누군가 어딘가로 여행을 갈 경우, 걸어서 가는 방법,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 기차를 타고 가는 방법,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 운전을 해서 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든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가는 게 옳다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그게 곧 행복의 길이고 기쁨의 길이 되리라. 뜻있는 일을 하고 있는 문학관 관계자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의미있는 일에 all in하는 이들. 때로 글을 쓰다가 지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생각할 것이다. "팔리지도 않는 시집을 왜 내느냐" 고 언성을 높여 만류하던 시인의 아내. 아내 앞에서 반박하던 老詩人.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팔리지도 않는 시. 어찌 한 시인의 정신을 팔고 살 수가 있겠는가? 외면당하는 게 맞는 일이다. 돈을 벌 생각이면 붓을 꺾고 배추장사라도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툼한 지갑을 자랑하며 어디를 가든 비지니스석을 타고 비행기로 편하게 여행을 가야하는 것이다. 좋은 음식과 비단옷을 입고 화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썩는 것들이다.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박목월의 '국화 옆에서' 는 죽지도 썩지도 않고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지 않은가? 참으로 irory한 일,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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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을 보신 모양입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는데, 꽃보다 더 귀한 꽃을 찾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