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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14일(토). 보스니아 네움의 아침이 밝았다. Neum은 영어의 New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도를 놓고 설명을 해야 이해가 빠르지만 이곳 네움은 보스니아에서 유일하게 아드리아해에 접해있는 도시이다. 이곳 네움의 약 20km되는 해안이 없었다면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에 쌓여있는 내륙국가가 된다. 크로아티아로서는 이곳 네움의 20km 해안만 자기네 땅으로 만들면 두브로브니크 까지 편하게 움직일수 있을텐데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행 하게도 이곳 네움의 해안 20km가 보스니아의 영토가 되는 바람에 두브로브니크를 갈려면 2번의 출입국 절차를 밟아야 갈수가 있다. 그러니까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의 영토중 섬처럼 떨어진 곳이 되어 버렸고 보스니아 로서는 내륙국가가 될뻔했는데 이곳 네움 때문에 해양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본 네움은 아드리아해안 위에 있는 깨끗한 도시였다. 휴양지로서 별장들도 많이 보이고.. 07시25분 오르카 호텔을 출발한다. 버스를 타고 조금 달리는데 나의휴대폰 전화가 울린다. 받아보니 의외로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데우랄리(해발3200m)에 있는 구릉의 전화이다. 우리가 만들어서 기증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4계절 운영되던 소수력 발전소가 고장이 나서 재건설을 추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온 전화였다.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서 발칸반도 끝에 위치한 네움까지도 전화가 통하는걸 보면서 이제 지구는 정말 이웃동네가 되었구나 하는걸 느끼는 시간 이었다.
07시30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에 도착 하여 보스니아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한다. 이어서 바로 07시45분 크로아티아에 입국 한다. 오른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끼고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달린다. 이곳 크로아티아의 스톤 지역은 해안이 노르웨이의 송네 피요르드 처럼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기 때문에 파도도 없고 청정 지역 이라서 굴양식이 잘 된다고 한다. 08시35분 큰 유람선 까지도 정박 할수있는 두브로브니크의 신항구를 지나친다. 08시45분 두브로브니크의 여행이 시작되는 성벽옆 버스 주차장에 정차한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ck).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를 끼고있는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휴양도시이다. 짙푸른 아드리아해 옆에 높이 25m, 길이 2km에 이르는 흰색의 석조 성벽인 두브로브니크 성이 있다.
플라챠거리. 베네치아어로 큰길 이라는뜻의 스트란둔 이라고 불리는 플라챠거리는 13세기경에 조성되어 1667년 지진 발생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문을 잇는 길이 약 300m의 길에 바닥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밤과 낮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 한다고 한다. 거리 양끝 루사광장과 필레문 부근에 16각형의 기반위에 돔으로 씌워진 오노폴리안 분수대가 있다. 크기가 다른 이 분수대 에서는 지금도 식수가 나오고 있었다. 플라챠 거리에서 맥심커피의 CF가 촬영 되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를 기다리다가 800년전에 세워진 성벽위를 걷는 옵션관광을 시작한다. 성벽위에 올라가면 성밖으로 파란 아드리아해가 펼쳐지고 성안에는 여러가지 건물들이 보존 되어있다. 성벽을 내려와서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지난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두브로브니크에 정착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1317년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 이다. 입구에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피에타상이 있으며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인 Mala Brace(말라 브라체)가 있다. 10시에 대성당을 지난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영국의 리처드 1세가 로쿠롬섬에서 조난 당했다가 무사히 구조된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192년경 완공된 성당이다. 현재의 모습은 1667년 지진 이후 재건된 것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돔 모양의 지붕에 첨탑이 세워져있다. 성모승천 대성당으로도 불리는 이 성당은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대표적인 성당이다. 10시에 옵션 관광인 유람선 투어를 시작한다. 유람선을 타고 아드리아해에서 절벽위에 세워진 흰색의 두브로브니크성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어떻게 해안가 절벽에 높이 25m의 석조성벽을 쌓았는지.... 10시50분에 두브로브니크의 구 시가지의 올드타운에 있는 올드포트에 도착한다. 두브로브니크의 옛정취를 느낄수 있는 곳이었다.
11시에 역시 옵션관광인 두브로브니크의 스르지산의 전망대에 오르는 케이블카역에 도착한다. 케이블카는 약 7분 이면 정상에 도착 한다. 스르지산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두브로브니크는 무척 아름다웠다. 전망대에서 오른쪽으로는 신항구가 예쁘게 보이고 배를 타고 돌아본 아드리아해와 흰색의 두브로브니크성이 무척 깨끗하게 보였다. 증명사진을 찍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서 루자광장을 지나 12시05분에 스폰자궁전에 도착했다.
스폰자궁전.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가 설게하여 1516년 시작하고 1522년 완공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모두 적용된 건물이다. 은행,세관등 경제와 재정 관련 업무를 보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역사적 기록물과 고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는 국립 기록보관소로 운용 되고있다. 1667년 지진에도 건재한 건물중의 하니이다. 유고 내전에 관한 기록과 사진등이 보관되어있다. 12시10분 올드 포트 옆에 있는 식당에서 부실한 점심을 먹는다. 물도 주지 않는...ㅉㅉㅉ 13시07분 바로 옆에 있는 렉터궁전에 도착 했다.
렉터궁전. 두브로브니크의 최고 지도자가 머물렀던 궁전이다. 렉터(Leder)와 같은 뜻을 가진 크로아티아어로 크네쥐브 궁전 이라고도 불리는 궁전이다.1272년 처음 건축된 이후 화재,폭발,지진 등으로 훼손 될때마다 재건하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등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수 있다. 내부에 프란체스코회에 많은 기부를한 자선가 미호프라카타의 흉상이 있다. 13시24분 두브로브니크를 출발 한다.
14시20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도착 하여 보스니아에 입국 한다. 14시25분 아침에 출발했던 보스니아 네움에 있는 오르카 호텔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14시45분 호텔을 출발 한다. 14시53분 다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착하여 크로아티아에 입국한다. 15시17분에 크로아티아 출입국 관리소를 출발하여 15시46분 또다시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모스타르로 넘어가는 국경에 도착 했다. 그곳에 다녀오시지 않고 이글을 읽는 분들은 도대체 어느나라에서 어느나라로 넘어갔다가 다시 어느나라로 넘어 오는건지 헷갈리시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영토와 국경이 복잡하게 되어 있다. 생활하기에 상당히 비 효율적인 나라들이다. 특히 이곳 보스니아 국경은 보스니아가 EU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몇일전 이탈리아 베로나의 노벤타 아울렛에서 구입한 물품들의 세금을 환급 받아야 하는 곳이라서 수속이 더욱 복잡 하였다. 구입한 물건과 영수증을 일일이 들고 신고 하느라 더욱 시간이 걸렸다. 세금 환급 신고와 입국 수속을 마치고 16시30분 국경을 출발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보스니아의 정식 명칭은 위와 같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라 칭함)이다.유럽 동남부와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해있고 동쪽으로 몬테네그로와 경게를 이루고 있고 3면이 크로아티아에 둘러 싸여있다. 그중에 두브로브니크 북쪽에 해안 20km가 보스니아 영토라서 해양국가 이다. 수도는 사라예보 이고 국토는 남한의 55%, 인구는 387만명,GNP는 6000$ 정도 이다. 치안상태는 불안하고 여행 유의 지역으로 구분되어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이 40%, 동방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31%, 로마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7%의 인구 분포를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후 유고연방의 일부 였다가 1991년 유고연방의 해체후 독립 하였다. 티토 사망후 유고연방이 붕괴하고 세르비아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힘을 합쳐서 독립을 선언하자 유고연방을 주도하던 세르비아 연방군이 사라예보를 침공하여 1992년4월 부터 1995년 12월까지 3년반 동안 민족간 분쟁인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한다.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을 무차별로 학살한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 되었다. 특히 1995년 7월에 발생한 사라예보 동북부에 위치한 스레브레니차 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도 집단 학살 사건은 제2차 세게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가장 잔인한 만행으로 기록되었다. 세르비아군에 의해 이슬람교도 8500명이 집단 학살 되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 발칸반도의 도살자라 불리는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있다. 400만명의 인구중 27만명이 사망하고 23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57개 도시가 파괴되고 500개의 마을이 불탔다고 한다. 내전으로 인해 보스니아에는 수없이 많은 묘지들과 장애인들이 있었다. 17시12분 모스타르 시내에 도착 했다.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대표하는 이슬람풍의 중세도시이다.길에 예쁜 조약돌을 박아놓은 조약돌 거리에는 중세식 터키건물들이 서있고 전쟁의 흔적인 탄피들로 만든 장식품들을 팔고 있었다. 조약돌 거리를 지나 17시23분 모스타르 다리에 도착 했다.
모스타르 다리. 1566년 스타리 모스트라는 다리가 세워지고 모스타르 다리라고 불렸다. 이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기도 하였으나 1993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후 2004년 세계각국의 지원으로 재건되어 현재에는 보스니아 민족간의 화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밀랴츠카강위에 폭 5M, 길이 30M로 만들어진 다리 주변에는 캐톨릭 성당과 이슬람의 모스크가 자주 눈에 보였다. 모스타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건물 벽에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총알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이 모스타르 에서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 국제학교에 다녔다고 한다.18시05분 모스타르를 출발하여 캄캄하고 도로상태가 안좋은 도로를 달려서 20시20분에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이곳 사라예보는 1973년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낸 이 에리사 선수가 우승한 곳이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우리가 묵을 호텔이 5성급으로 변경 되어서 사라예보에서 아주 최신 건물인 Hills호텔에 도착했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 이라서 보스니아에서 힘깨나 쓰는 집 자식이 결혼식을 하였는지 5성급 호텔의 넓은 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호텔이 떠나갈듯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씁쓸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피곤한 하루를 마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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