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쿠바의 수복 건으로 신디케이트가 그에게 건 기대가 매우 컸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하였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가 이끄는 일단의 게릴라들은 마침내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넘어뜨리고 쿠바에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쿠바의 민중 운동가인 피델 카스트로는 그 동안 그가 계속 이끌어온 무장혁명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드디어 부패한 독재자인 바티스타와 그의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바티스타와 그의 정권이 무너졌다는 것은 그를 뒤에서 지원하던 미국의 대기업과 조직범죄단이 쿠바에서 가졌던 유력한 기득권 동조세력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련 이익 집단들은 쿠바 사태의 진전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사실은 쿠바에서 정권이 바뀐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으며, 새로 집권한 세력은 항상 미국측에 다시 추파의 눈길을 던져왔으므로 단순히 정권이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크게 부산을 떨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미국 대기업의 재산을 국유화해버리는 등 미국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는 미국을 등에 업은 제라르도 마차도가, 풀헨시오 바티스타에 의한 1933년의 혁명 이후에는 바티스타와 그 일당들이 집권하면서 쿠바는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로 완전히 변신하였고, 또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어 미국의 완전한 경제적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충고에 따라 바티스타가 권좌에서 내려오고 라몬 그라우에 이어 1948년에 소카라스(Carlos Prio Soccarras)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러한 쿠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변함이 없었다.
소카라스
1950년에 미 본토에서는 상원 케파우버 위원회가 소집되어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 전국민으로부터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키며 조직범죄의 실태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업에 약간의 차질이 빚어지자 신디케이트는 더욱 쿠바 오퍼레이션에 집중하였으며, 1952년 3월에 쿠데타를 통하여 바티스타가 다시 쿠바의 집권자가 되면서 그들은 더욱 대규모의 자본을 쿠바에 들여왔다.
1952년에 있을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이 승리할 것이 매우 유력하였는데, 마이어 랜스키는 1930년대 초부터의 동업으로 자기와 뜻이 잘 통하는 바티스타가 다시 대통령으로 되기를 원하였고, 무기의 지원 등 랜스키의 도움을 바탕으로 바티스타는 대통령 선거 이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또 한번 쿠바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 쿠데타에는 마피아뿐만 아니라 바티스타와 깊은 관계에 있었던 미국의 대기업들도 지원을 하였다. 쿠바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것은 마피아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살펴보면 당시 쿠바의 경제는 미국 기업들이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설탕은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품이었다. 설탕의 수출이 쿠바의 총 수출액의 80%를 차지할 정도였고 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향한 것이었으며,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은 거의 미국인 지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국부의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쿠바에서 원유는 생산되지 않았으나 원유를 정제할 정유공장 시설은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소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타 제조 산업의 미숙으로 대부분의 생필품들 또한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밖에 없어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높을 수가 없었다.
1958년 당시 쿠바 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자였고 500만 명이 자기 집이 없었으며, 문맹률은 43%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도인 하바나에는 300군데가 넘는 사창가가 모여 있어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쿠바의 젊은 여성들이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이곳에서 창녀로 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쿠바 민중의 희망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2년의 대통령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자 무력 항쟁의 길을 택하여, 쿠바 섬 중심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한때 바티스타의 군대에 체포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쿠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를 내쫓고 혁명을 성공시키게 된다.
카스트로는 정권을 장악한 후 5월에는 농지 개혁법을 제정하여 대지주의 토지와 미국계 기업들의 농장을 몰수하였고, 곧 석유법과 다음 해인 1960년에 대기업 국유화 법을 만들어 미국계의 설탕 회사, 석유 회사를 접수하는 등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미국 신디케이트가 장악한 카지노와 윤락가를 폐쇄함으로써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1954년부터 하바나에 상주하던 랜스키는 카스트로가 혁명을 성공시키기 얼마 전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본토로 나와 있었으나, 산토스 트라피칸테 주니어는 쿠바에 체류하다가 1959년의 새해를 맞았다. 카스트로는 트라피칸테를 체포하여 무인도와 다름없는 섬(The Isle of Pines)에 보내 가두어 버렸다. 30년 가까이 공을 들인 신디케이트의 쿠바 비즈니스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산토스 트라피칸테 주니어
쿠바에 집중 투자한 미국의 조직범죄단들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특히 오펴레이션의 주역이었던 마이어 랜스키, 프랭크 코스텔로, 카를로스 마르셀로, 산토스 트라피칸테 주니어 등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쿠바 비즈니스는 도박, 마약에다 매춘 등 모든 사업을 망라하여 총 1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호텔-카지노 사업만 보더라도 하바나의 리비에라 호텔(Riviera hotel)이 랜스키가 1,700만 달러를 투자하여 건설한 것이었고, 역시 랜스키의 소유이며 영화배우인 조지 래프트가 명목상의 주인으로 있는 카프리 호텔(Capri Hotel)이 500만 달러를, 클리블랜드의 모리스 달릿츠가 소유한 내셔널 호텔(Nacional Hotel)이 700만 달러를, 트라피칸테 패밀리의 소유인 산 수치 호텔(San Souci Hotel)이 100만 달러를, 그밖에 트로피카나 호텔(Tropicana Hotel)이 600만 달러, 빌트모아 호텔(Biltmore Hotel)이 400만 달러, 그리고 도빌 호텔(Deauville Hotel)이 250만 달러를 각각 마피아들이 투자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각 호텔의 지분은 뉴욕과 시카고 등지의 패밀리들이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탈리아의 찰스 루치아노도 산 수치 호텔과 리비에라 호텔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더욱이 새로 개척해 놓은 마약 운송 루트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것으로 이 루트의 소실과 새 반입 루트를 개척하는 데에 드는 비용, 그리고 그 사이 제때에 마약이 공급되지 못함으로써 입는 손해 등은 계산이 이루어지니 않을 정도의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랜스키는 조직의 모임에서 카스트로의 목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게 된다.
쿠바의 혁명으로 손해를 본 것은 쿠바에 투자한 미국의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석유 회사, 설탕 회사, 담배 회사, 전화 회사, 광산 회사, 금융 회사 등 쿠바에 자본을 투자했던 모든 기업들이 카스트로의 기업 국유화 법으로 인해 엄청난 손해를 보았던 것이다. 미국 기업의 국유화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미국 정부가 쿠바로부터의 설탕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여 나라의 유일한 수입원이 끊어지게 되자 카스트로는 소련, 중국 등 공산국가들과의 교역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미 국방성과 CIA도 쿠바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디케이트는 어떤 방법으로든 쿠바의 카스트로를 없애려고 하고 있었는데, 혁명 쿠바가 미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며 사회주의 국가 블록으로 기울자 미국의 CIA도 쿠바를 원상복귀시키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마피아와 CIA, 이 두 그룹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일치하게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오퍼레이션 언더월드로 이미 합동작전을 한 경험이 있었던 두 조직은 다시 합심하여 쿠바를 수복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쿠바의 수복을 위한 계획은 아이젠하워-닉슨 행정부의 집권 말기인 1959년 후반부터 CIA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이 실체화된 것이 바로 1961년 4월의 오퍼레이션 베이 오브 피그스, 즉 저 유명한 피그만 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처음 입안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감안하여 이 작전을 다음 대통령에게 넘기려 하였고, 계획 그 자체로부터 몸을 빼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쿠바 수복 작전은 현직 부통령이며 다음 번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하였던 리차드 닉슨이 일시적으로 총책임을 지게 되었고,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이 당선된 뒤에는 새 대통령 닉슨의 전권 아래에 작전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닉슨의 무난한 당선이 기대되었던 1960년의 선거는 놀랍게도 미국의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합을 보였고, 막상 그 결과가 발표되어 제3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인물은 부통령이었던 리차드 닉슨이 아니라 43세의 젊은 상원의원, 존 F 케네디였던 것이다.
케네디는 전임 행정부에서 물려받은 이 쿠바 수복 작전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이었고, CIA와 군부의 압력 때문에 작전을 승인하기는 하였으나 그에 대한 지원 규모를 대폭 삭감하여, 결국 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 작전의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과 CIA, 마피아는 매우 껄끄러운 사이가 된 것이다.
쿠바를 원상복귀시켜 신디케이트가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기회는 이제 피그만 작전의 실패로 완전히 물을 건너갔다고 보아도 좋았다. 케네디는 그에게 주어진 찬스를 보기 좋게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렇게 케네디 형제가 마피아의 은혜를 배반한 것, 그리고 쿠바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 마피아가 존 F 케네디를 살해하게 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첫댓글 케네디가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면 아마도.. 세계사에서 쿠바의 모습은 바뀌게 되었겠죠?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쿠바는 미국의 안마당이고 베트남처럼 싸우기는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