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진의 거장, 카쉬(KARSH)展 윈스턴 처칠, 오드리 햅번, 파블로 피카소… 세계 유명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초상 사진가, 카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의 성공적인 전시에 이어 2009년 3월, 드디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글:이문자 편집장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상 사진 작가 ‘카쉬(KARSH)전’은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000여 장의 카쉬의 작품 중 총 70여 점의 작품들로 엄선되었으며, 오드리 햅번, 윈스턴 처칠,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20세기 유명 인사들의 살아있는 표정을 오리지널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사진 속 명사들의 일대기 및 카쉬가 직접 기록해 놓은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가 사진과 함께 소개해 카쉬의 작품 세계는 물론 문학과 시대적 역사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대통령도 움직이게 한 젊은 사진 작가의 열정 카쉬는 아주 짧은 순간, 즉 치켜 뜬 눈썹이나 놀란 표정 등과 같은 무의식적인 행동 등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기고자 노력했으며,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직접 찾아가 주변의 시대적 환경까지 작품 속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카쉬의 남다른 철학과 사진에 대한 열정은 20세기 수 많은 인사들로 하여금 그의 카메라 앞에 서게 했으며,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은 촬영 당시 얼마나 카쉬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는지를 말해 준다.
그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감상자로 하여금 사진을 보고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진 안의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전시회를 본 수많은 관람객들이 바로 이와 같은 카쉬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성공은 어떠한 미적 가치관이나 비평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카쉬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 존 H. 가로(John Garo)는 늘 그에게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눈 앞에 있을 때 기록으로 남겨 놓아라. 예술은 절대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카쉬는 위대한 인물들과 촬영할 때마다 그들과의 매 순간순간을 기록해 둠으로써, 작품 속 인물과 카쉬,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유기적으로 얽힌 또 다른 20세기 역사물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이번 전시의 포인트다. 카쉬가 직접 기록한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 준다.
Yousuf Karsh, WinstonChurchill,1957,gelatinsilverprint
Yousuf Karsh, AudreyHepburn,1956,gelatinsilverprint
Yousuf Karsh, AlbertEinstein,1957,gelatinsilverprint
1.포트레이트(Portraits) 인물사진(Portraits)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피사체를 바라보는 카쉬만의 창조적인 시각이다.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명사의 초상을 촬영할 때 카쉬는 전통, 상징, 이야기를 조화시킬 수 있는 아이콘을 포착하여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모델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사진을 완성했고, 그만의 ‘영웅’을 창조해냈다. 즉, 인물들의 손짓, 얼굴의 움직임, 몸짓 그리고 응시 방향은 그가 창조한 영웅의 타입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카쉬는 초기의 스튜디오 조명효과에서 벗어나, 인물의 머리 뒤에서 비추는 태양광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백라이트 조명을 사용하는 등 조명 실험을 통해 표현하고 강조하고자 했다.
Yousuf Karsh, Ernest Hemingway, 1957, gelatin silver print
Yousuf Karsh, PabloPicasso,1954,gelatinsilverprint
Yousuf Karsh, PabloCasals,1954,gelatinsilverprint
Yousuf Karsh, JessyeNorman,1957,gelatinsilverprint
2.1950 사회의 얼굴(On Assignment) 1952년 카쉬는 캐나다의 시사주간 <맥클린(Maclean)> 잡지에 2차 세계 대전 전후 캐나다의 경제 개발을 기록하기 위한 다큐 작업을 시작했고, 17개월 동안 총 8,334장의 흑백 사진 작업을 완성했다. 이 작업은 포토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인물 작업과 마찬가지로 휴머니즘이 녹아 든 다정한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캐나다 역사의 일부분이 되어 현재 캐나다 국립 문서국에 보관되어 있다.
Yousuf Karsh, SophiaLoren,1957,chromogenicprint
Yousuf Karsh, MotherTeresa,1957,gelatinsilverprint
10.Yousuf Karsh, JacquelineKennedy,1957,gelatinsilverprint
3. 초기의 작업들(The Early Years) 당시 카메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던 젊은 사진 작가였던 카쉬를 위해 20대 여학생부터 연극배우, 전위예술가 등 다양한 방면의 인물들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또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만 작업하던 카쉬가 캐나다 오타와 극장에서 상연되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전위예술가인 루스드레이퍼(Ruth Draper)의 연극 속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극장의 백열 조명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도서관에서 만난 평범한 20살 여학생의 모습, 섬세한 여인의 누드, 광학적 측면에서 시도했던 초현실주의 작품도 볼 수 있어 카쉬 사진 인생의 다채로운 이력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기획전시로 한국인물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대표하는 <한국의 인물사진 5인(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展>이 함께 열린다. 안익태, 백남준, 서정주를 비롯한 국내 예술가는 물론 배우 김혜수, 송강호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각계각층의 인물사진 20여 점이 전시되어 카쉬 작품과는 다른 느낌의 한국적인 인물 사진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한국카메라박물관이 협찬한 1930부터 1950년대의 스튜디오형 카메라가 함께 전시되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유섭 카쉬(Yousuf Karsh)
카쉬 작품 속에 담긴 세계 유명 인사들의 발자취-에피소드
1941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만나다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1874년~1965년)은 카쉬의 업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인물사진가로서의 카쉬의 명성이 바로 윈스턴 처칠과의 촬영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윈스턴 처칠 작품은 사진 역사상 가장 널리 재생산되는 이미지로 유명하다.
카쉬와 윈스턴 처칠과의 만남은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상이 된 지 1년 후, 처칠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후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를 방문했다. 당시 캐나다 수상이자 카쉬의 후원자였던 매킨지 킹은 그를 초청하여 처칠이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나 기분, 태도 등을 관찰하게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카쉬는 “윈스턴 처칠이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순간은 홀로 싸우기로 한 영국의 결정(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대해 프랑스 장교들이 했던 말을 자신있게 되 받아쳤을 때였다”로 말했다.
“교전 3주일 내에 영국은 병아리 모가지처럼 비틀리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프랑스 장교에게 처칠은 단호하게 “웬 병아리, 웬 모가지!”라며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연설을 듣고 난 후, 카쉬는 전날 조명과 카메라를 준비해 두었던 연설자 대기실에서 처칠을 기다렸다. 처칠이 팔짱을 끼고 캐나다 수상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고 각광을 켜자 놀란 처칠은, “이게 뭡니까, 이게 뭐에요?” 라며 소리를 질렀다. 카쉬는 당시 두려웠지만 한 발작 앞으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각하, 제가 감히 이 역사적 순간을 기념으로 남길 수 있는 행운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처칠은 가만히 카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왜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카쉬는 더욱 긴장했다. 처칠은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장난스럽게 연기를 한 번 내뿜으며 마음을 누그러뜨린 후, “한 장 찍어도 좋소” 라고 회답했다. 카쉬는 “조명과 카메라를 준비해 둔 곳까지 이 거대한 인물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움직이게 한 것은 참 대단한 일이었다. 이날까지도 나는 그 사건이 나의 외교적 기술을 뽐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여긴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처칠이 담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쉬는 재떨이를 내밀었지만, 그는 담배를 내려놓지 않았다. 카쉬는 우선 카메라 쪽으로 돌아가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한 후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카쉬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며 입에서 시가를 뺏어냈다. 카쉬가 카메라로 돌아왔을 때, 처칠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한 억센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바로 그때 카쉬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지만, 곧 처칠은 인자하게 웃으며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말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는 카쉬에게 직접 걸어와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을 찍게 할 수 있군요” 라고 했다. 이리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이끌어왔던 영국 총리의 강인한 내면을 담은 완성도 높은 윈스턴 처칠 작품이 탄생될 수 있었으며, 작품의 제목이 “으르렁거리는 사자”가 된 것이다.
1946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를 만나다 1946년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장군(1890년~1969년)과 첫 대면을 한 카쉬에게 그는 자신감에 차 있고 냉정하며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또한 가장 가까이에서 전쟁을 경험하면서도 인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뢰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촬영 후, 아이젠하워 장군이 인쇄된 자신의 사진을 보고 “전인류의 이해와 지식을 통해 이 세상의 무질서와 광란은 점차 질서와 논리로 대체 될 것”이라며 자신의 믿음을 카쉬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이 후, 1953년 제3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도, 은퇴하여 게티스버그에 머물렀던 때에도 카쉬는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은퇴 후 아이젠하워는 새로운 취미로 유화를 그렸으며, 그를 방문했을 당시 이젤 위에는 윈스턴 처칠과 그를 찍고 있는 카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놓여 있었다.
카쉬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의 자신감에 차 있는 강인한 인상을 강조하기 부각하기 위해 얼굴을 클로즈 업 촬영했다. 또한 사진 속에서는 드물게 좌측 45도 조명을 사용한 점도 눈에 띈다.
1943년, 조지 버나드 쇼(Geprge Bernard Shaw)를 만나다 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전기를 집필했던 레온 에델(Leon Edel)은 조지 버나드 쇼(1856년~1950년)를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타인을 매료시킨다”라고 평한 바 있다. 카쉬가 그를 만났을 당시 거의 9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청년처럼 방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왔다. 그의 몸가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눈동자, 번뜩이는 재치, 그리고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뻣뻣한 턱수염 등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카쉬는 기록하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 박사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기 위해 불러 낸 악마)라도 된 듯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던 버나드 쇼는 촬영 당일, 카쉬가 아무리 자신의 사진을 잘 찍어도 얼마 전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갔던 집에서 주인의 어깨 너머로 본 자신의 모습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악마적인 캐릭터란 참 나쁘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을 대변해 주기도 하지”라고 하며, 주인 어깨 너머로 본 자신의 이미지로 다가서자 이내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카쉬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의 농담을 잘 이해했는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카쉬를 바라보았고, 바로 그 순간 카쉬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카쉬는 45도 각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라이팅을 사용하여, 깊게 파인 버나드 쇼의 주름과 수염을 강조했다. 이로써 90세에 가까운 버나드 쇼의 표정 속에서 모든 것을 꿰뚤어 보는 대가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1948년,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만나다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1879년~1955년)을 촬영한 카쉬는 그에 대해 과학적 업적에 관한 이해 없이도 인격을 사진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물질 입자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에너지-질량 방정식 가설로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창조를 증명해 낸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카쉬는 그 누구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촬영 중간에 카쉬가 “세상에 원자 폭탄이 또 다시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묻자,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겠지요”라고 답했다. 하찮은 인간사 너머의 무한한 우주를 이해하고 있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위대한 대답이었다.
1948년, 헬렌 켈러(Helen Keller)를 만나다 카쉬는 헬렌 켈러(1880년~1968년)를 이렇게 회상한다. “3살 이후로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헬렌켈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뭐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눈은 그녀의 아름다운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카쉬가 헬렌켈러와 처음 조우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정확히 카쉬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카쉬는 그 때를 잊을 수 없는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헬렌 켈러는 친절함과 이해력,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카쉬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헬렌켈러의 초기 작품인 <일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법>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촬영 전 카쉬는 “우리가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실제로 당신을 보고 있으니, 더 이상은 일몰이 아닌 일출의 개념으로 당신을 기억하게 될 것 같군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모토로 삼고 지는 해의 어두운 그림자를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했다.
헬렌 켈러의 이와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은 카쉬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늘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살아 온 헬렌 켈러는 “보시다시피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귀도 멀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보다 한 가지 더 보고 한 가지 더 들을 줄 압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이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이렇게 돌아다닙니다”라고 말했다.
1954년,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를 만나다 스페인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첼로 거장 파블로 카잘스(1876년~1973년). 프랑스 남부 도시 프라드(Prades)에 위치한 한 수도원에서 그를 만난 카쉬는 그 당시를 “첼로의 거장과의 짧은 만남은 무척 유쾌한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 둘은 빠르게 마음이 통했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첼로를 카쉬가 운반해 주기도 했다. 카쉬는 그의 바하 연주가 너무 감동스러워 잠시 동안 사진을 찍는 것도 잊었을 정도였다. 또한 카쉬는 촬영 당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을 등지고 있는 사람을 찍은 적이 없었지만, 카잘스에게는 왠지 그러한 구도가 맞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텅 빈 방은 정상에 서 있는 조국에서 추방당한 예술가의 쓸쓸함을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 몇 년 후, 카잘스의 사진이 보스턴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한 노신사가 매일 같이 와서는 그의 사진 앞에서 오랜 동안 서 있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큐레이터가 어느 날 “선생님, 왜 항상 이 사진 앞에 매일 서 계시는 건가요?”하고 묻자, 그는 나무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시게. 지금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는가!”
카쉬가 촬영한 파블로 카잘스의 사진은 독특하게도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 카쉬는 이 사진 이전이나 이후에도 뒷모습을 찍은 사진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얼굴이 드러나는 초상 사진과 다르게 첼로를 켜고 있는 인물의 뒷모습만을 어두운 큰 공간 속에 작게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뒷면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궁금증과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긴다.
1954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caso)를 만나다 천재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년~1973년)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카쉬는 “사실 악몽과도 같았다”고 고백했다. 떠들썩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캔버스가 가득한 넓은 방들을 누비고 다니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 그의 집에서는 촬영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카쉬는 도자기 미술관에서 나중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당시 200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갖추고 미술관에 도착한 카쉬를 본 미술관 관계자들은 “피카소는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라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새로 산 셔츠까지 입고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알아서 구도를 잡아주는 피카소의 모습은 젠틀하기까지 했다.
피카소는 당시 사진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카쉬는 독특하게 그에게 어울리는 소품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평소 늘 여성이 함께 했던 피카소의 인생처럼 여체가 그려진 도자기 소품을 이용해서 상측 정면광을 이용해 강하게 표현했고, 이로써 피카소의 예술과 인생역정이 사진 속에 녹아날 수 있었다.
1956년,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을 만나다 <로마의 휴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햅번룩’이라는 패션 트렌드까지 완성,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오드리 햅번(1929년~1993년)이 카쉬를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미국 헐리우드에서였다. 오드리 햅번을 촬영할 당시 카쉬는 햅번에게 “당신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이 보입니다”라고 지적하자, 그녀는 세게 2차 대전 때 자신의 비참한 경험담을 카쉬에게 털어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오드리 햅번의 내면에 담긴 또 다른 모습을 시각적으로 완성한 카쉬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후, 한 유명인은 오드리 햅번만큼 자신이 아름답게 나와야 촬영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오드리 햅번 작품은 그녀의 심벌과도 같은 사진이다. 카쉬의 초상 사진 중 보기 드문 옆모습을 촬영한 사진으로, 45도 라이팅에서 밝은 부분 쪽으로 카메라를 옮겨 그녀의 흰 얼굴을 더욱 강조했다. 이리하여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상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절대적인 햅번의 아름다움이 완성되었다.
1957년,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를 만나다 제 35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1929년~1994년). 1957년 카쉬가 재클린 케네디를 처음 만났을 때는 존 F. 케네디가 메사추세츠 출신의 상원의원 시절이었다. 카쉬는 “이 때까지만 해도 메사추세츠 출신의 멋진 상원의원의 매력적인 아내였던 그녀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과부신세와 역경에 대해 아마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카쉬와 재클린 케네디는 뉴포트(Newport)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 집에서 만났다. 카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준 코르만델 휘장을 배경으로 그녀를 촬영했다. 몇 주 후, 뉴욕의 5번가를 걸어가던 카쉬를 발견한 재클린 케네디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달려와 자신의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물었다고 한다.
카쉬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에 가졌던 <미국의 전설>이라는 전시회에서였다. 카쉬는 “조용히 홀로 전시회장 입구에 서 있던 그녀는 많은 관중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존재”로 기억했다.
재클린 캐네디를 담은 카쉬의 작품은 동양의 기품 있는 자개 가구 앞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주지사 부인일 메사추세츠 주지원의 아내였던 당시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그녀의 눈빛과 흰 어깨, 그리고 흰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성숙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1957년,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를 만나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미국의 저명한 작가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1899년~1961년)를 카쉬가 만난 것은 그가 자살하기 4년 전이었다. 카쉬는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두루 갖춘 작가를 기대했었지만, 쿠바의 하바나 근방 ‘핑카 비히야’라고 불리는 집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제껏 그가 찍었던 인물들 중 가장 수줍음을 많이 탔으며, 묘한 친절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헤밍웨이는 네 번째 아프리카 원정 여행 당시 발생한 비행기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경의 삶 속에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 듯한 그의 인상을 카쉬는 덥수룩한 수염과 소박한 스웨터를 입은 헤밍웨이의 외관을 통해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촬영 전날 저녁, 카쉬는 그를 사전 조사할 겸 그가 즐겨 마시던 다이키리(Daiquiri, 쿠바 광산에서 이름을 딴 럼베이스 칵테일)를 맛보기 위해 헤밍웨이가 즐겨 찾는다는 ‘라 플로리디타’라는 바를 찾았다. 기록에 의하면 카쉬는 “하지만 내가 준비를 너무 많이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다음날 아침 9시, 무슨 음료를 마시겠냐고 묻는 그에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다이키리라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 카쉬!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그걸 마시겠다고?”
1971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만나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해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와 함께 지하 혁명군을 조직한 쿠바의 영웅적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1926년~현재)와의 첫 만남은 쿠바의 국경일인 1971년 7월 26일이었다. 쿠바의 하바나(Havana)에 도착한 카쉬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혁명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 대하여 군중을 압도하는 연설의 카스트로를 보았다. 보통 6시간 동안 이어지는 그의 평상시 연설보다 훨씬 짧은 2시간 반짜리였다. 이후 3일 동안, 셀리아 산체스(당시 쿠바의 국무장관)가 카쉬와 동행하며 가이드가 되어 주었는데, 그녀가 추천한 3곳의 사진 촬영 장소 중에서 카쉬는 군인 막사를 연상케 하는 휑한 벽에 책장만 놓여 있는 의전실을 선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곳은 카스트로가 가장 좋아하는 방이었다.
그 이후 촬영 여부를 모른 채 전전긍긍하며 지내다 떠나기 바로 직전이 되어서야 외무부는 카스트로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근심이 어리고 지쳐 보이던 그는 군복을 입고 나타나 악수를 청하며 카쉬를 따뜻이 맞이하여 주었다. 사진 촬영이 계속 지체되었던 점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허리띠와 권총을 풀어 옆에 놓인 탁자에 놓던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 사진촬영은 3시간 반 동안 이루어졌고, 중간중간 그들은 럼주와 콜라를 마시며 예전에 쿠바에 살며 사랑 받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추억을 곱씹기도 했다.
1981년,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을 만나다 <아라베스크>, <엘 시드>, <패션쇼> 등에 출연한 소피아 로렌(1934년~현재)은 고전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한 세계적인 영화 배우. 그녀를 만난 카쉬는 “소피아 로렌처럼 지성과 프로근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여배우를 촬영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작업이다”라고 고백했다. 카쉬가 촬영한 소피아 로렌 작품은 파리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이른 오후에 찍은 것이다. 그녀는 여느 엄마처럼 자신의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왔고, 그들 사이에 넘쳐나는 사랑과 애정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주로 흑백으로만 주로 작업하던 카쉬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이지 섹스심벌이었던 소피아 로렌의 관능미를 표현하고자 과감하게 컬러 사진으로 표현했다. 또한 한 여배우가 나이가 들면서 지성미와 완숙미가 어우러져 여유로움이 넘치는 모습도 함께 표현하고자 했다. 카쉬는 이 사진에서 화면의 위측과 아래측을 검게 처리함으로써 관람객은 그녀의 얼굴에 보다 편하게 몰입할 수 있다.
1988년,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를 만나다 본명이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Agnes Gonxha Bojaxhiu)인 테레사 수녀(1910년~1997년)는 인도 캘커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시작으로 성인으로 존경 받아 온 인물이다. 카쉬가 테레사 수녀를 만난 곳은 캐나다 오타와 대주교의 저택에서였다. 그녀는 간호 수녀들이 전세계 가난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살피는데 필요한 자금 모금운동을 하던 중간에 이곳을 방문했고, 오타와 대주교 저택에서는 따뜻한 환영회를 준비했다. 그녀는 열성적인 후원자들의 중심에 서서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일만을 향해 달리는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강인하고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를 위해 성대하게 차려진 점심상을 물린 채 부엌에서 식사하기를 고집했고, 일정에 잡혀 있던 환영회를 취소하고 고아원 방문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진 촬영에는 응해 주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시 했으나, 이내 이로써 자신의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된다면 응하겠다고 해주었다.
1990년, 제시 노먼(Jessye Norman)을 만나다 20세기를 빛낸 여성 성악가로 꼽히는 흑인 소프라노 가수 제시 노먼(1945년~현재).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제시 노먼은 깊이 있는 음색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압권이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된 여러 차례 리사이틀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카쉬의 카메라 앞에서는 그녀가 연기했던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의 위엄 있는 모습을 담은 절제된 여신이자 프리마돈나의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사진 촬영 중간의 휴식 시간에는 프리마돈나 같지 않은 애교 있고, 열정적이며 자유로운 소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목소리는 신이 내려 준 선물로, 스스로 아끼고 보호해야 함은 물론 때때로 아이처럼 달래기도 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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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물 사진 하나를 보는데도 그 사진 하나에 참 많은 것이 보이네요.
아.. 최고.. 순간의 찰라의 아름다움..
정말 아름답다라고 밖에 할말이 없는...
할말.....없습니다!!!!!
한마디로 놀랍네요~~!!
한장의 사진으로 이런 감동을 주다니요!!!
정말 멋져요~
와....멋쪄요.....
아직 못보고 있네요... 사진예술의 백미는 역시 인물인가봐요.
와!
오늘 관람하고 왔어요.. 인물의 내면의 모습을 사진한장에 섬세하게 담은것 같아 묘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와....여기 설명이 자세하게 다 나와있군요. 작품관련 스토리 읽느라고 힘들었어요. 일단 조명이 어두웠고 사람도 너무 많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