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불생인가에 대해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에 입각해서 교학적인 설명을 올려 보겠습니다.
곡식은 씨에서 싹이 나오 열매를 맺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씨는 그 이전의 곡식에서 거든 것이고 다시 그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서 그 시초가 없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계속 전해져 내려 왔으니 어느 때 갑자기 있게 된 것, 즉 무無에서 유有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생不生입니다.
다음에 지금의 곡식은 이전의 곡식에서 나온 것이나 그 이전의 곡식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어진다면 지금의 곡식은 있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멸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곡식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자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밎으니 종자는 끊임없이 형태가 변해서 서로 같지 않습니다. 싹으로 있을 때는 그 씨는 이미 변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상不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물이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단절된다면 씨에서 싹이 나오고 곡식이 열리는 그러한 상속은 있을 수 없을 것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단不斷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멸해도 싹이 생기므로 단斷이 아니고, 싹이 생겨도 종자가 멸하기 때문에 항상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절이 없다고 해서 만물이 하나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곡식은 씨와 같지 않고 씨는 곡식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일不一입니다. 반면에 하나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다른 것도 아닙니다. 곡식의 씨와 싹과 열매는 다른 물건이 아닌 곡식이라는 공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不異입니다.
다음에 싹이 곡식에서 나오긴 했으나 곡식중 싹이 오는 곳이 없습니다. 어디 딴 곳에서 왔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곡식의 싹이 씨가 아닌 다른 데서 온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래不來입니다. 동시에 곡식은 딴 것이 되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불거不去입니다.
이것은 용수보살의 팔불 중관사상으로서 불생 불멸 불상 부단 불일 불이 불래 불거의 8불(八不)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생불멸은 생멸의 양극단이 실재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첫댓글 참 좋군요^^ ()
그래서 용수께서는 팔불, 즉 사구백비가 결국 희론임을 증명함으로서 언어문자로는 진제에 도달할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언어와 문자로는 진리 그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언어나 문자에 의지 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표현하거나 가리킬수는 없겠지요.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를 통하여 언어와 문자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역대조사들의 가르침이며, 사구와 백비는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하지요.
그렇군요,,감사합니다.()
두두물물이 불신으로 불법을 설하고 있는데, 왜 언어와 문자에는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십니까.()
진제와 속제가 둘이아니고, 교와 선이 둘이아니나, 차별문에서 보면 그러하다는 것이겠지요.()
맑고 맑은 바닷물이 적정하여 파도가 없으면 물이 있음을 모르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면 물이 있음을 아나 ,본래가 다르지 않은 물이겠지요.()
차별문이라 하나 바르게 아신다면 차별문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소님의 말씀은 언어와 문자 없는 곳이라 하시고 석어님은 언어와 문자에도 진리가 깃들어 있다하시니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르군요..이거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글만봐서는 헷갈려서 생각하기 싫은 중생을 시험하시는거 같네요 ^^*()
생각하기 싫은 것도 마음의 작용이며 생각하기 좋아하는 것도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는 仙花님의 본래면목은 없지요.()
음...본래 면목이 있으려면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나요?...()
본래면목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습이 없으니 이름을 붙일수도 없고 볼수도 없습니다.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망상망념에서 일어난 것이니 어찌 실답다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실한 것은 살답지 않는 것에 없다는 말입니다.()
두두물물이 불신으로 불법을 설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언어 이전의 소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즉, 청산이 푸르고 강물이 흐르는 것은 만법이 그대로 불성의 표현인 것으로서 '푸르다'거나 '흐른다'는 언어 이전의 도리입니다.그렇다면 왜 언어나 문자는 실답지 못해서 진리 그 자체가 아니가하면,
마치,고추에 관한 논문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입에는 매운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그래서 언어와 문자에 진리가 없다고 하고, 실답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고추가 맵다'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것입니다.고추가 매운것은 사실이므로 언어문자로 실다움을 표현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실수하는 것이 바로 언어가 실답지 못하다고 해서 옳은 말도 틀리다고 하는 오류입니다.'고추가 맵다'라는 말에 매운맛은 없으나 분명 옳은 말입니다.언어가 실답지 못하다고 '고추가 짜다'라고 할수는 없습니다.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차별문이든 선문이든 이렇게 이치에 맞춰서 말해야합니다.
아, 그렇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맛을 보아도 그 맛이 아니니 그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니고,고추가 맵지 않으니 고추벌래는 기어가고 사람은 걸어간다.()
문을 열면 바로 바람이니 말하기 전에 상대가 생겨서 반론을 하고, 미국사람이 한국말을 모르니 고추가 맵는냐고 어떻게 물어볼 것인가.()
음...말하기 전에 상대가 생긴다...이거 또 헷갈리네요.아 뒤죽박죽 내머리..()
그 맛을 못봐서 그렇지, 예로부터 한 맛이라고 한 그 맛은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상견에 빠졌나..
바람은 밖에도 안에도 있다고할 것이 없으니 상대할 것이 본래 없고, 고추가 매운것은 급하면 다 물어보게 된다.()
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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