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의 성전화와 목사의 제사장화. 주일성수와 십일조 의무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의 진리에 상반되고 위배되므로
한국교회의 성경적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성도의 의식개혁에 우선순위라고 믿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자행되어 보편화 되어 있는 이 율법적인 관행들은
과거 천주교에서 자행하려 암흑시대를 주도했던 때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름만 다르게 진행되어
목사 우상화와 성도 우민화의 술책으로
교회를 제도화 시켜 체계적으로 통솔하고
성도들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관리하여
이기집단들의 기득권과 운영권을 수호하고 주도하려는 술수입니다.
(저들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은
이 네가지를 합리화시키려고 설득하려는 동기와 목적입니다.
그 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교인들의 환심을 사서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합니다.
혹 저의 이 견해에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이의를 제기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나 목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관행의 누룩이 한국교회 안에 들어와서 부흥과 성공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호도되어서 순수한 교회와 건전한 목회자들을 그 누룩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병들게 하는 미혹에 빠지게 하므로
결과적으로 복음의 진리에 위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의 성전화와 목사의 우상화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의무화는
한국교회의 악습이고 폐습이므로 철폐되어야 하나
소위 기득권을 쥐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 인식이 없으므로
일반성도들의 의식이 깨어 바뀌고 영안이 밝아져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개혁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셧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갈5:1)
진정한 성도의 삶은 어느사람의 요구나 강요에 의한
억지나 부득의함으로 인한 댓가성을 바라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기쁨에서 나오는
자원하는 심령과 자발적인 능력의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현실은 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어 감투를 씌워서 사명감을 심어놓고
부담감으로 인한 정죄감을 악용하여 성도들을 착취하며 갈취하여
전무후무한 사기행각을 거룩하게 자행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누가 되고 해가 되므로
전적으로 위배되는 율법적인 관행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하여 그들이 모두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저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과 믿음을 속이고 저버리며 만행을 자행한다면
그들의 완고함과 불신에 대한 죄는 그리스도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으로부터
그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노라 다만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패시키려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전엑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복음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랴?
아니면 하나님께 사랴?
아니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겠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6-10) |
첫댓글 주일과 안식일을 혼동하고 있고, 교회당이 성전으로 목사가 제사장으로, 헌금이 제물로, 강대상이 제단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 현 교회의 실정입니다.
저의 20대 중 후반 대학생 때의 이야기입니다. 내 상황을 고려해서 일주일에 두 번 아침에 한 두시간 알바하고 6~7만원을 받는 일을 수개월 한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십일조(6~7천원)를 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나의 누나를 위해 합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그냥 막연히 매형이 신학생이라서 누나가 사는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내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됐겠지'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누나에게 얼마를 달라고 기도를 할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60만원이라는 돈이 생각이 나서 그냥 '누나에게 60만원을 주세요'라고 단순히 기도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3일후 누나가 집에 왔습니다. 그래서 누가 모르는 사람이 혹시 60만원 주지 않았냐고 물어봤습니다. 누나가 "3일전에 목사님 사모님이 60만원을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돈이 그 시기에 정말로 필요한 돈이었다고 했습니다. 누나는 이 일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였고 하나님은 나를 움직이셨으며 마지막에 나도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전도하다 만나보면 자기 누나는 십일조도 많이하는데 왜 누나는 그모양이냐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데요. 실제로 그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사람이 사는 것을 들어보면 괜챤게 잘 살고 있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20살까지는 교회를 다니다가 바쁜 일들과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일들을 찿아 다니면서 자의든 타의든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꼭 다녀야 구원을 받는가? 나는 혼자서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이 흐릿해 지고 신앙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도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교회나 예수님을 비방하는 말이나 글 또는 다른 유명인의 가르침 등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 오히려 신앙인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100마리의 양 가운데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되어서 사자와 이리의 포로가 되어서 눌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계속 찾아다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로써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로마서 10:17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듣고 보는 것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존 뉴톤은 일반선원으로 일하다가 노예무역선 선장이 되었고 그 일에서 돌이킨 후에 노예무역을 폐지하는데 기여를 한 사람이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가를 작시한 사람입니다. 존 뉴톤이 선장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IVP출판사에서 나온 「존 뉴톤」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존은 혼자 떨어져 마을을 거닐었다. 지난 1년 동안을 스페인에서 보냈는데, 지금은 주변에 온통 네덜란드 말을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중고 서적상 앞을 막 지나려는 순간 근시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제목이 도드라져 보이는 작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존은 그 책을 집어 들고 목차를 훓어 보았다.
1712년에 나온 샤프츠베리 백작 3세의 「성격론」(Characteristics) 제 2권이었다. 샤프츠베리는 초월적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어떤 종교적 교리든 그것을 반드시 추종해야 한다는 강제성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이신론자 - 자유사상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 였다. 존은 곧바로 그 책에 흥미를 느꼈다. 서적상 주인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네주고 배로 돌아왔다. 그 낡은 책을 펼쳐 든 존은 몇 쪽을 무심히 넘겼다. (도덕주의자 - 철학적 광시곡)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흥미를 느낀 존은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존은 그 내용을 이렇게 이해했다. 성경은 지나치게 일반적이다.
한 사람에게 옳고 그른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그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는 부자연스럽고 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는 자유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고귀한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존은 그 사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해협을 지나오는 동안 시간만 나면 존은 그 책을 탐독했다.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어떤 문장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오랫동안 떠나있던 애블리로 다시 돌아온 존은 마을의 친구들을 찾는 대신 그 책을 읽고 또 읽는 것으로 그 여름을 다 보냈다. 이제 그 책의 거의
모든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모든 것-아이작 와츠의 교리문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와츠의 찬송들인 '영광의 어린 왕'(The Young Prince of Glory), '주님, 항상 우리를 도우사'(O God, Our Help in Ages Past) 같은 것들-은 우화나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샤프츠베리의 책은 젊은 존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의무감을 없애 버렸다. 이런 존 뉴톤은 전혀 하나님의 믿음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선원생활 가운데 계속해서 이 책에 빠져들어갔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스스로 버려버렸고 그 다음부터는 배의 선원들과 같이 각종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들과
사람들을 향한 비방과 욕을 해대는 쪽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꿈을 통해서 복음을 버리면 후에 복음의 진가를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존 뉴톤은 자신이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서 정말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과 예배 때의 부드러운 것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되었고 자기의 입으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어려움에서 구출해 주시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돌이킨 존 뉴톤은 목사가 되었고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이 임재해계시는 성전입니다. 또한 모든 이가 만인 제사장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제사장이 되고요 주일성수는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에 주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를 현대는 주일로 지키는 것이고 십일조는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바친 것으로 시작하여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11:42절을 읽어보시길 카페에 글을 쓰는건 님의 자유이지만 확실하고 정확하지 않고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 주장은 올바로 보지 못하는 여러 신자들에게 잘못된 길을 걷게 하는 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샬롬~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으신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햇습니다 새벽교사님 예배당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다는 성경을 말해주십이 옳을뜻하고 우리는 말씀으로 확증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12장 9절 14절)) ...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것을 거기서 행할찌니라
가나안땅을 얻은 후 이스라엘에는 12지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중에 실로를 택하셨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서 부터는 유다지파의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도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유대교의 성전과 기독교의 예배당을 동일시여기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분으로써 님의 신앙과 양심에 아무렇지 않습니까?
신앙과 양심이 어찌 되었다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성전과 예배당의 주된 역활이 같다라고 하는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님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정당한가에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이분법적 사고입니까? 성경적 사고입니까? 설득력 없는 반대아닌 반대는 계속 님의 주장에 모순만 드러나게 됩니다. 인정하실 것은 인정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인 신앙이며 양심입니다. 님의 신앙과 양심에 비추어 어떻게 성전과 예배당이 동일하게 주된 역할을 하는지요? 님은 율법을 지키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교인입니까? 아니면 믿음을 지키려다 유대교인들에게 순교당할 기독교인입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지 아니하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였으니 안식일에 매이지 말라는 말씀이고 내가 안식일의 주이이라고 했으니 이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나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어떤이는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게 여길수있고 어떤이는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길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고 각자의 마음에 정하라고 했고 ( 결코 어떤 날을 특정하지 않았음) 너희가 특별한 날과 달과 계절과 년을 지키는데 내가 너희를 위한 노력이 헛 될까 두렵다고 했읍니다.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과 안식일로 인하
안식일로 인하여 비판을 받지 말라고 했고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고 십자가에 못박았읍니다. 구약에서는 음식을 가려먹었지만 지금은 가려먹지 않고 자유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시었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태 23장에는 7 가지 禍가 있는데 그중에 4번째가 이지구상에서 십일조를 가장 잘하고 있는자들에게 향 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루살이 시비일조는 걸러내어 외치고 강조하는데 진짜로 중요한 약대는 꿀꺽 삼켜 흔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옳습니다. 어떤이는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게 여길수 있고 어떤이는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길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로 어떤 사람은 그 믿음안에서 주일을 거룩히 여기고 또 다른사람은 모든날을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문제는 위 본문의 글이 모든날을 같게 여기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복음에 위배된다고 하니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가려먹는것이 의미가 없고 할례가 의미가 없듯이 안식일도 의미가 없읍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감옥에서 해뱅시키고 자유를 주었는데 또다시 자꾸만 율법의 감옥으로 집어 넣으려는 누구이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루살이에 비유하였고 바울은 하루살이로도 취급지 않았읍니다. 만약에 바울이 십일조를 말했다면 그는 일구 이언자에 지나지 않읍니다. 나는 묻는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를 아느냐? 그는 본래 부자였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시었으니 그의 가난하심을 통하여 너희는 부자가 된다. 이것이 약대이다. 이약대 이 복음은 어디로 갔는가? 이 약대는 삼켜버리고 하루살이 십일조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및 모든 예불을 하루살이에 비유하신것은 그것을 드리는 자가 십일조 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율법의 감옥이 되어버린것은 사람이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써는 다 하실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곧 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십일조와 예물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십일조는 목숨걸고 외치고 있고 누구든지 십일조만 건드리면 이단 취급하니 이어찌 禍의 대상이 아닌가? 그들은 외친다.재물이 있는곳에 마음이 있다고 그들의 보화는 하나님이 아니고 재물이니 하나님과 재물에서 재물을 택한자이고 재물이 기준이고 척도 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재물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자들로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강도라고 했고 아버지의 집을 사장터로 만든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때 보다 더하고 돈을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 돈에 환장을 하고 걸신이 들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공식적으로 닫당하게 아니면 비 공식적으로 은근히 결국은 돈에 귀착한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는데 못할말이 어디 있는가?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고 아니라고 하는자는 현실을 외면하는자요 제대로 모르는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늘은 나의 보좌이고 땅은 나의 발등상이다 내가 쉴곳이 어디냐? 이 모든것을 내 손으로 만들지 않았는냐? 고 묻고계시다. 그러면서 성전 건축물을 돌위에 돌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뜨리었다.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고 너희가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결코 건축물이 아니라는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무엇이 부족한자 같이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시고 이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부자로 모든이에게 모든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한국 교회는 한님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바치지 않으면 금방 굶어 죽을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거
건축물은 건축물이고 돈(물질)은 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구요... 그것이 비록 동전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 될수 있고 사람의 것이 될수 있으며 건축물이 될수 있고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적하는 님들의 잘못은 님들의 주장을 모든이에게 강요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어떤이는 한날을 다른날보다 중하게 여기기도하고 또 어떤이는 모든날을 같이 여기기도 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대로 행할일이지 누구의 일방적인 믿음에 따라가야할 절대적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더군다나 그것을 "복음의 위배"로 규정짓는 것은 옳치 못한 행위입니다. 사람은 법을 행하는 자이지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법은 말씀가운데서 행하는 것이고 그것의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둘러보아도 십일조나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칭한것과 예배의장소를 성전이라고 칭한것이 복음에 위배된다라는 말이 옳은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위글을 주장하는 어떤 카페에서 많은 변론을 하여 그것이 복음에 위배가 아니라는 것을 놓고 말을 많이 주고 받았습니다... 혹시나 많은 이들이 이 주장에 넘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또는 내가 주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것은 아닌가하고 많이 기도했지만 아직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 많은분들이 바른주장을 펴시는 것을 오늘 보고 내 마음이 무척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바른지식을 가져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목사님을 주님보다 더 위한다거나 십일조를 축복의 통로로만 인식한다거나 주일에 매여서 사람들을 괴롭게하여서는 안될것입니다.. 각사람은 그사람의 믿음가운데서 주님께 평가를 받게 될것입니다... 나와 님들의 주장은 그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앞에 바로 평가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은 나를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아는 것이 무척중요할것입니다.
실제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모습에서의 존경과 섬김의 목회자 모습뒤에는 삶속에서의 성도들의 종과 같은 목자로 살아가시는 목회자가 대부분입니다... 십일조... 비단 그것에 목메시는 예스님 십일조는 구약성경에도 드리라고 나와있지요.. 그것이 형식이고 의무라면 십계명도 모두 의무이니 하지 말아야하는건가요?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부모공경안하고.... 한단어에 집착하시는 님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기만 하네요....ㅠㅠ 진정 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갑니다..ㅜㅜ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하여 네가 여러가지 많은 일로 염려하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오직 하나만으로 족하고 마리아는 이 좋은 쪽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읍니다.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예수 하나만으로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가지기 위해 모든것을 쓰레기로 버렸다고 하였읍니다. 나는 바울을 순수 복음주으자, 100% 예수주의자라고 하는데 예수 만이고 예수 뿐이고 예수 밖에 없읍니다. 에수만가지고 안됩니까? 예수 외에 그누구도 그무엇도 내세우거나 강조되어서는 안됩니다.그것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력을 약화 시키고 무효화 시키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어떤 날을 특ㅂ
어떤 날을 특별히 지키려는 행위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위한 노력이 헛 될까 두렵다고 했읍니다. 율법과 복음은 반비례 관계입니다. 실체가 왔으니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고 완전한 것이 왔으니 불완전한 것은 사라지는 것이고 전기불이 들어 왔으니 초불은 꺼야 합니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촛불을 못끄고 촛불을 들고 거리를 헤메고 있읍니다. 그만큼 촛불을 못믿는것입니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있읍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부정하지는 안했지만 소극적으로 하루살이로 인정하였고 할살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이를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 같이 외치는 자들에게 화를 발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소경이라고 하였으니 하루살이 십일조는 보면서 약대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루살이로도 취급지 않았으니 만약에 바울이 십일조를 말했다면 그는 바울이 아니고 一口二言 者에 지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만큼은 잘하고 자신이 있기에 때마다 십일조를 내세우는데 한번도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못하고 그런것을 가지고 내 앞에서 입을 벌리느냐? 는 식이었다. 바울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난하심의 은혜)를 알거니와 했지만 나는 묻노니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난하심의 은혜)를 아느냐? 그는
그는본래 부자였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통하여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고후 8: 9절에 기록 되어있읍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약대입니다. 이복음 약대는 꿀꺽 삼켜 버리고 하루살이 십일조만 목숨걸고 외치고 있으니 이 어찌 화가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한분이시고 선생님도 한분이시고 주도 한분이시고 그는 하늘에계시고 땅에 있는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했읍니다. 목사님도 특별한 자가 아닙니다.몸은 하나요 지체는 많은데 우리각자는 이지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다만 받은 은혜와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물론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하였고 교회의 일을 잘다스리고 특히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특별한 자리에 있는 것이아니고 그것도 무조건이아니고 잘(well)하는 자에게라는 단서가 붙읍니다.
구구절절 다 올으신 말씀인데, 글 속에 칼이 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내용을 이리 저리 살펴보아도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왠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은 분명 참된 내용을 담아내는 글이 너무 거칠다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더 강한 표현보다는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더 진한 감동을 묻어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에게는 실례되는 코멘트지만 양해바랍니다.
늘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저도 글 내용에 많이 찬성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여기 리플을 다신 모든 분들과 한국교회. 이런 저런 모든 눈에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모든 교회를 통해 역사하셨지 않습니까! 글 쓰신분 잘 하셨구요, 고생 하셨읍니다. 그런데 리플 다신 분들 논쟁은 성경에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걍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글 쓰신분은 리플에 맘 상하지 마시고 그냥 또 묵상하는 시간 생각 하는 시간 가졌으면 합니다. 전 예수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크리스챤의 한명입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따르려고 하는 의지를 늘 주시는 주님께 늘 감사하죠
성경에 하지 말라고 하셨다구요? 고치라고 말씀하신게 아니라 하지말라고 하셔다고요? 오히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져오지 말라고 하신것은 그들의 의와 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버려져야할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먼저 의와 신을 온전히 행하고 드리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살이에 비유하였고 지금 이지구상에서 십일조 생활을 가장 잘하고 있는 자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하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하며서 화와 저주를 발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하고 이것이 십일조를 인정한 것입니까? 화와 저주를 발하고있다는 더큰사실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주님께서 십일조를 하루살이에 비유한것은 그들이 더 중한바 의와인과신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의와인과신을 행하고 십일조와 예배를 드릴때에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가 화와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좋은글들 때문에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올바른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할수 있을만큼....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는게 현실이죠? 그리고 꼭 십일조를 해야만 ...복을 받을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것이 현실이죠! "십일조"를 꼭 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십일조를 드리면 그것이 올바른 예물이 될수 있을까요? 저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수 있을까! 라고 고민중에 이런 생각이 떠 오르더군요....
이 땅에 삶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를 다하듯 그리 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라는 마음의 확신이 오더군요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로만 외치면 그게 사랑인가요? 부모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돈 만 안겨 주는것이 그럼 사랑일까요? 부모님께 사랑한다고/말도하고 돈도 드리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사랑 일까요? 그러면 마음을 다해 부모님께 효도하는 그런 행동으로만 행하는것은 진정한 사랑일까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답은 없는것 같아요.
어떤이는 돈이없어서 마음으로/행동으로 부모님을 섬길수도 있고. 어떤이는 돈으로밖에 부모님을 섬길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고. 또 어떤이는 돈과 마음과 행동으로 부모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있겠지요. 어떤 방법이든... 그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 옳을 행동이 아닐까요? 우리는 살아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찬들 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공감 합니다 그것은 소중하지 않는것이 없다는 그런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를 감찰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이 있는곳에 "마음이"있다는 말.... 그런것 같네요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온전히 향하여 있다면 ... 물질이 대수일까요!!! 그보다 더 소중한 목숨도 내놓아야 할 판에... 우리들에게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지요 "죽으면 죽으리로다"라는 그 뜨거운 순간들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뜻을 잘 헤아리는 우리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이시군요... 물질은 우리가 축복을 받기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옳치 않습니다.. 왜냐면 축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댓가성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한데 어느곳에서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인해 그것이 없어져야할 구습으로 여기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 되어요..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어떻게 드려지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드릴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곧 주님의 말씀처럼 의와 인과 신을 바로 행할때 주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허락하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법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하여~은혜의 법 곧 성령의 법을 소개합니다. 종의 자식이 아니라, 자유한 자의 아들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전혀 이의없는 복종이 있어야 하고요, 아들은 자유한 상소자로서의 순종입니다. 하여~! 순종과 복종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순종하는 영혼으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복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언제 배반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은 종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