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Venus pudica)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 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 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 했지 여러 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 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 라고 생각했다가
더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 이라고 믿었지만
일곱 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베누스 푸디카: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용어로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
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
당신 손목 있잖아
책을 펼쳐 내 쪽을 향해 보여줄 때
약간 비틀어진 모양,
난 그게 나무 같더라
물기 없는 갈색
나 거기서 태어난 거 같아
연노랑 잎맥으로
연노랑은 노랑의 이복 자매
가을이 떨어트린 약속
당신 지느러미 있잖아
내 미래 같더라
새벽에 자꾸 떨어지니 주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발꿈치를 들고 침대 주위를 배회하며
물고기 흉내를 내볼까
당신은 잠
미래는 강
전부를 맡기고 흘러가볼까
더듬더듬 헤엄쳐갔지
당신 머리는 이불이 내민 주먹 같더라
여기가 백회인가,
무구한 풀들이 모여 기도하는 백회인가
이마 코 입술은 당신이 덮는 이불인가
심정이 어때요, 내가 물을 때
재빨리 펼쳐 덮는 이불인가
당신 꿈 있잖아
내가 혼곤하게 잠들었을 때
왼쪽 귀에다 부어주는 꿈
뜨거운 주물(鑄物)로 탄생하는 꿈
내 꿈이랑 합쳐져 굽이치는데
가끔 벅차서 내가 흘리는 거
아나? 나비물로 촥, 끼얹어져
침대를 적시는 거
날들이 까마귀 떼로 내려앉아 뒤에 숨고
나는 모른 체,
뭉개진 구절초 얼굴들 하나하나,
펴서,
꼼지락꼼지락 다시
피어나도록 애쓰는 거
당신은 알까?
고요한 싸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 튼다
허방과 실패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
살기도 한다
비 오는 식탁
허기가 이기는 게임을 할래?
부엌, 할 때 ‘엌’ 하면 갈고리가 생각나
수많은 갈퀴들이 냄새를 긁어모으는 풍경
이름표를 떼고,
실체가 된 유령들이
식탁 아래 쌓이는 놀이를 할래?
말과 혀와 색을 숨기고,
위보다 아래를 풍성하게 해볼래?
울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물기 가득한 식탁
하나의 투명이 젓가락을 들자
누군가 귓속말 하고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야
탁 타다닥,
발버둥치는 물의 리
듬
식탁 위
올랐다 내려앉는 빗금처럼,
나풀거리는 젓가락들
울음 안개
윗집 아이가 운다
울음에 손톱이 돋아 허공을 긁고
아랫집 천장을 긁고
한낮의 정적에 미세한 홈을 판다
아이가 운다
울다 5초 간 악을 쓴다
악을,
악을,
악을,
악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리도
지루하고 어두울까
아이의 발끝에 숨은 살기가
다섯 해 동안 소량씩 모아온 악이
안개가 되어 우리 집 천장을 뚫고
바닥에 고인다
찢을 수도
닦을 수도
건질 수도 없는
울음 안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기다린다
쏟아질지 모르는 어떤 저의(底意)
어떤 벼랑,
어쩌면 비밀과 비밀을 찔러죽일
뾰족함